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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재정 정책 전문가로서 이름을 널리 알렸던 영의정 류정현.

그가 펼친 정책은 실로 혁신적이었다.

순자께서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적게 걷고, 나라는 절용(돈을 안 쓰고 절약하는 것)을 해야 모두가 부유해질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는 이 내용을 조선의 경제정책에 그대로 반영시키고자 하였다.

관에서 일하는 문관, 내시, 서리, 아전, 공노비를 비롯한 이들에게 일하는 동안 배곯지 말라고 점심을 주는 정책을 그는 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라 하여 폐지하여 버렸다.

배가 고프면 자신들이 직접 집에서 도시락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먹으면 되는 문제가 아닌가?

더불어 녹봉은 관원들만 받으면 되는 거라 생각하였고, 병사들은 ‘먹여 살려만 주면 되는 존재’라 여겨 녹봉을 주는 것이 재정낭비니 아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대붕 같은 난신적자가 나타나 조정의 올바른 기풍을 망치고 있으니, 참으로 조정의 미래가 걱정되는구나.”

자신은 조정에서 쓸데없이 사용되는 비용을 줄이고자 애를 썼다. 그러면서 관리들의 부수적인 수입원인 ‘녹봉’을 오래된 곡식으로 주는 건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이라 생각하여... 묵은쌀이 아닌 햅쌀로 주게 규정을 바꿨다.

햅쌀, 묵은쌀 둘 다 똑같은 쌀이기는 하지만 묵은쌀 2섬이 햅쌀 1섬 가격이라는 걸 감안하면... 묵은쌀로 녹봉을 받으면 관리들의 녹봉이 줄어드는 셈인데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간신 김대붕이 태상왕 전하와 주상 전하, 재상들의 눈을 모두 가리고 있으니 이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이 늙은 노신이라도 나서서 충언을 올려야겠지.”

물론, 충언을 올리는 것도 시기와 방법, 내용 선정이 중요하다. 과거 공부를 시작할 때도 처음부터 사서삼경을 읽는 게 아니라 천자문부터 읽어야 하듯이.

왕의 성총(총명함)을 가리는 간신 김대붕을 없애기 위해서는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나가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 백성들은 다른 일에 눈 돌리지 않고 농업에만 충실하게 될 것이며, 자기 땅도 없이 농사짓기에 먹을 것이 항상 부족한 농민들이 자신에게 고리대금을 빌릴 것이며.

그래야 자신은 높은 이자를 챙길 수 있고 더 좋게는 이자를 낼 수 없는 형편의 농민이 자신의 노비가 되어 집안 재산이 더욱 늘게 되는 것이다.

김대붕을 어떻게 하면 뒤탈 없이 찍어낼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그의 노비 한 명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고했다.

"대감마님, 집현전 부정자 나리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돌려보낼까요?"

자기를 찾아올 집현전 부정자는 단 한 사람밖에 없다. 온갖 충언을 아낌없이 올리기에 가문에서 기대받는 훌륭한 인재, 정창손.

원래라면 일개 정9품 나부랭이가 영의정을 바로 만나러 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류정현은 젊은 청년, 정확히 말하면 올바른 뜻(류정현 기준)을 가진 젊은이들을 몹시 좋아했다.

"정 효중(정창손의 자)이 찾아왔나 보구나. 그를 이리로 데려오고, 주안상을 조촐하게 봐오거라."

"예, 대감마님."

정창손은 류정현에게 예법상 흠잡을 데 없는 인사를 올렸다.

"영상 대감, 이리 기별도 없이 급히 찾아와 송구합니다."

"정 부정자가 이리 급히 찾아올 정도면 내게 급히 할 말이 있어서 온 게 아니겠나? 그리고 지금 집현전의 학자들, 육조의 판서라는 작자들 모두는 김대붕과 같은 난신적자, 간신에게 속아서 성현의 도를 가벼이 여기고 있는데... 오로지 자네만이 집현전에서 정도를 걷고 있다는 걸 내 잘 알고 있지."

그의 말을 풀어 말하면 김대붕은 장차 을사오적 같은 간신이 될 천하의 나쁜 놈이고, 그놈을 추종하는 관리 놈들은 조선을 버리고 사리사욕이나 추구하는 친일파나 마찬가지라는 뜻의 격한 말이다.

반면, 자신과 정창손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우는 충신이라는 찬사도 깔고 가는 것이고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영의정이라는 사람이 하급 관리 앞에서 '김대붕'을 난신적자, 간신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대붕 그 작자가 태상왕 전하께서 동전을 만들어 보급하는 정책이, 무조건 실패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신하된 자로서 어찌 태상왕 전하께서 심혈을 기울여 추진하고자 하는 정책을 가지고 시작도 전에 실패할 것이라 단언하다니요. 어린 나이에 장원으로 과거 급제하고 요행히 진해 현 백성들을 이롭게 하는 데 성공했다고는 하나, 참으로 교만 방자하기가 짝이 없지 않사옵니까?"

"허허, 우리 정 부정자는 젊은 혈기가 가득하구만."

"용서하십시오, 대감."

"혈기가 끓어 넘치는 것은 젊은이의 특권이고, 그걸 올바르게 지도해 주는 건 늙은이의 의무네. 자네가 그리 화를 내는 것이 불의를 보았기에 참지 못함이라는 걸 아는데, 어찌 내가 자네를 질책하겠나?"

조선시대 최악의 예산 절약 중독자이자 장차 효령대군 사위에게까지 돈 안 갚았다고 깽판을 치는 '위대한 고리대금 업자' 류정현과 세종대왕님 앞에서 백성은 개돼지라 교화가 안 된다 말할 꼰대 정창손.

이 둘은 너무 죽이 잘 맞았다. 류정현은 진심으로 이 젊은이가 좋았다.

가능하다면 자기가 쭉 끌고 올라가 주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솔직히 정 부정자 같은 충신을 놔두고, 저런 간신배 놈이 출세하다니 이 상황이 무척 마음에 안 든다네. 그렇지만, 하늘이 도우셨네. 근본이 썩은 놈이기에 자기 재주를 과신한 나머지 지금은 제 묫자리를 파고 있지 않은가?"

"김대붕의 묫자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네. 그놈은 지금 자신의 죽을 구석을 찾아가고 있어. 마치 자기가 재상이라도 된 것처럼 활개를 쳐대고, 면신례조차 면제받은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태상왕과 주상께서 총애하시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이제 두 분 전하의 숙원 사업인 화폐를 반대하고 나서다니, 놈이 죽고 싶어 환장한 것이 아니겠나? 뭐, 반대 한 번 한다고 두 분이 바로 김대붕을 찍어내지는 않으시겠지만..."

류정현이 눈을 반짝였다.

"저놈이 화폐 정책을 반대했다는 이야기를 자네가 상소를 통해 알리게. 그러면 나도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나서도록 하겠네."

김대붕은 순전히 조선을 위해, 백성을 위해 화폐 정책을 반대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류정현의 목적은 달랐다. 그도 겉으로는 조선을 위한다고 포장하였지만, 실상은 달랐으니.

조선 백성들이 계속해서 지금처럼 가난해야, 자기의 재산이 더 증식되고 부유해질 것을 알기에.

만약에 김대붕이 경제정책을 올바르게 펴는 바람에 백성들이 부자가 되어 자신에게 고리대를 안 빌리게 된다면 자신은 어찌 되겠는가.

"태상왕 전하께서는 기가 센 충신일 경우 유배를 보내거나, 엄히 질책함으로 바르게 키워내는 분이시지. 머지않아 김대붕은 평안도 벽지 같은 곳으로 유배를 가게 될 것이야."

"......"

"너무 서두르려 하지 말게. 사람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지. 이는 단순히 남녀상열지사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네. 일단 저놈이 시행하려 한 모든 고을에 장시 설치하는 건 못 막아도, 거기에 관리를 배치하는 것은 막을 수 있을 것이야."

정창손은 정치의 흐름을 타면서 자신은 손해 보지 않고 상대방만 골로 보내는 영의정의 노련함에 크게 감탄했다.

미래의 간신이 될 김대붕 그놈을 저렇게 깔끔하게 정리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니. 자신도 언젠가 류정현처럼 노련한 정치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역시 영상 대감의 지혜는 제갈공명에 비견 할만합니다."

"허허, 이 친구 지금 나에게 아부하는 건가? 뭐 듣기 싫지는 않네만."

류정현과 정창손의 앞에 주안상이 놓였다.

저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조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밤이 늦을 때까지 말이다.

**

김만덕이 나에게 말했다.

신의를 잃는 것은 죽음과 같다고.

또 그 누구에게서가 아닌 자신의 양심에게서 끊임없는 가책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그의 말에 깊이 공감하였다.

죽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죽을 때까지 계속하여 후회를 안고 가는 것이다.

내가 화폐 정책에 대해 상소를 올려서, 제대로 반대하고 나섰더라면...

내 눈에 종로 시전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자니 진해현 장시가 떠올랐다.

규모는 훨씬 작지만 진해현 장시에 나온 모두는 행복해 보였다.

그들은 가난한 백성이었지만 시장을 만들어 준 나에게 고마워하며 귀한 먹거리를 나눠주었다.

가장 귀한 음식을 나한테 주면서 그렇게 좋아했었다.

나 역시 그 마음이 너무 예쁘고 고마워서 체통 없이 배가 터질 때까지 얻어먹었다.

"화폐가 시행되면 조선에는 경제 대공황이 온다."

물론, 조선 백성들이 체험하게 될 경제 대공황 여파는 세계 대공황에 비하면 한 없이 작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이들이 잘못된 경제정책, 잘못된 화폐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죽음 같은 고통을 당할 것이다.

세종실록에는 지금의 영의정 류정현이 경시서(한양 시전 관리 기관) 도제조로 있던 시절, 쓰레기 동전으로 거래하지 않았다고 잡혀 온 백성을 곤장으로 쳐 때려죽인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지방 고을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비일비재했을 거다.

이 시기 이렇게 희생된 이들 모두는 사회적 약자였으며, 부유한 이들이나 권력을 가진 이들은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대공황으로 죽어 나간 이는 오로지 어린 백성뿐이다.

"내가 나서야만 하겠지."

내가 진해 현으로 다시 돌아갈 일이 있을지 없을지는 잘 모르겠다.

만약에 내가 아주 우연히 진해현을 들릴 일이 생긴다면...

화폐 때문에, 내가 그걸 안 막았기에, 나에게 고맙다면서 천인소도 쓰고 송덕비까지 세워준 진해현 백성들이 죽어 나갔다는 소리를 들으면 정말이지 참담할 것 같다.

그래서 영원히 후회하게 될 것이 두렵다.

"김 수찬 나리 아니십니까? 등청 시간은 아직인데... 아니, 왜 관복을 안 입으시고 하얀색 소복을 입고 오신 겁니까? 그리고 손에 든 도끼는 무엇이며... 멍석 들고 따라온 종은 또 무엇 때문이옵니까?"

"......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네."

"그야 당연한 겁니다만..."

나는 광화문을 지키는 수문장과 대화를 멈추고 종에게 멍석을 깔게 시켰다.

그 멍석 위에 도끼를 올려놓았다.

이방원이라면 화폐에 반대하고 나선 나를 죽일 수도 있다.

이방원과 세종 대왕님은 수백 년 뒤를 내다보고, 화폐 정책을 말 그대로 목숨 걸고 밀어붙일 사람들이니까.

나도 치워질 수가 있겠지.

그러나 내가 죽게 되더라도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맘이 든다.

"전하, 지금 동전을 화폐로 쓰게 하는 것은 조선을 망치는 길이 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말을 들은 광화문 수문장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화폐 반대가 무슨 의미인지 무관인 저 양반도 아는 것이겠지.

"신의 상소를 들어주시옵소서! 듣지 않으시겠다면, 이 도끼로 신의 목을 쳐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