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dd 3 AI agents (writing, revision, story-continuity specialists) - Add 4 slash commands (rovel.create, write, complete, seed) - Add novel creation/writing rules - Add Novelpia reference data (115 works, 3328 chapters) - Add CLAUDE.md and README.md 🤖 Generated with [Claude Code](https://claude.com/claude-code) 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137 lines
12 KiB
Markdown
137 lines
12 KiB
Markdown
|
|
나를 바라보는 집현전 부제학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
|
|
|
모르는 사람이 보면 첫사랑에 빠진 소년이라 착각할 정도로 말이다. 얼굴에는 태양처럼 밝은 미소가 떠올라 있고, 발걸음 또한 몹시 가볍다.
|
|
|
|
신참내기의 경우 이런 환대에 ‘내가 이렇게나 환영받다니 진짜 열심히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겠지만 나는 그 정도로 어설픈 사람이 아니다.
|
|
|
|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제학의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을 뿐 더러, 피부도 푸석푸석한 게 피로에 찌든 모습이다. 집현전도 호조 못지않게 야근에 시달리고 있다는 증거다. 관리들이 쉬는 휴일이라도 기방을 가거나 유람을 즐기거나 그런 건 생각도 못 하고, 그저 잠만 잤겠지.
|
|
|
|
그런데 내가 등장해서 이제 그 야근에서 벗어날 거 같으니 저토록 반겨주는 거다.
|
|
|
|
“아, 본관은 집현전 부제학 정인지라고 하네. 집현전 제학은 예조판서 대감께서 겸임 중이다 보니, 사실상 본관이 집현전의 총책임자라고 할 수 있지.”
|
|
|
|
“부제학 영감께서 저 같은 미관말직 관리를 이리 환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
|
|
|
“하하, 우리 김 수찬 같은 인재는 본관이 직접 챙기는 게 당연한 일일세. 상왕 전하께서도, 전하께서도 자네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다네. 영의정 대감이 자네를 좀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긴 하지만, 좌, 우의정 대감은 물론이고 6조 판서 대감들 모두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참으로 크다네.”
|
|
|
|
“그렇습니까?”
|
|
|
|
“자네도 알겠지만 원래 신입 관리가 오면 품계와 상관없이 ‘면신례’를 끝내기 전까지는 신귀(신입 귀신)라 하여, 서리(행정직 말단 공무원)들에게도 경시를 받는다네.”
|
|
|
|
면신례, 한마디로 말하면 신입 귀신이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한 예식이다. 말이 복잡하지만 쉽게 말해 이등병 길들이기 같은 거다.
|
|
|
|
이등병이 처음 부대에 전입을 오면 말년 병장이 ‘이등병’ 코스프레를 하면서 선임 중에 꼬운 놈 있으면 말해보라 하고, PX 가서 총 사오라 하고, 냉동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실컷 먹으라면서 체하기 직전까지 악기바리를 시켜서 군기를 잡는 미친 문화.
|
|
|
|
조선에서는 새로 과거에 합격한 관리, 부서 이동이 된 관리(재상급도 가끔 포함된다) 모두가 저 면신례를 치러야 한다.
|
|
|
|
한 번 치를 때면 쌀 100섬, 200섬은 족히 나가는 후한 밥 대접을 해야 하고, 선배들이 시키는 온갖 괴상한 짓도 다 해야만 한다. 진흙물에서 물고기 잡아 오기, 공노비 시켜서 자기 이름 부르면서 조롱하게 하기 등등.
|
|
|
|
나도 나름 각오를 하고 왔는데, 부제학 영감이 하는 말이 나를 새로 온 귀신이 아니라 사람 취급을 바로 해줘서 면신례 부조리를 안 당하게 해주겠다는 건가...
|
|
|
|
“그런데 자네 같이 유능한 관리를 새로 온 귀신이라 하여 막 대할 정도로 집현전은 개념 없는 관청이 아니라네. 업무 시간에도 술 마시면서 상소 올리는 사간원 놈들이라면 몰라도 말이야.”
|
|
|
|
집현전, 사간원, 사헌부는 다 같은 삼사(청요직)라서 서로 경쟁심이 심한 가 보다. 뜬금없이 사간원을 까니 말이다.
|
|
|
|
“자, 되었고. 저기가 자네 자리네.”
|
|
|
|
자리 배치가 좀 이상하다. 다른 집현전 학사들은 회사 사무실처럼 책상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왜 내 자리만 저렇게 떨어져 있는 거지?
|
|
|
|
심지어 배치된 의자가 두 개인데다가, 책상의 크기도 꽤 크다. 딱 봐도 한 명이 쓰는 게 아닌데... 몹시 불안하다.
|
|
|
|
저 자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이도라는 이름을 가진 대학교수님께서 ‘너는 사직할 수 없다. 영원히, 죽을 때까지.’라고 말하는 환청이 들리는 것만 같다. 보약을 달여 먹어야 하나?
|
|
|
|
“잘못 가리키신 거 아닙니까, 부제학 영감?”
|
|
|
|
“아니야, 저기가 김 수찬 자네 자리가 맞네.”
|
|
|
|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무슨 일을 하면 되겠습니까? 다른 학사들과 같이 사서삼경을 연구하거나 경연을 준비하면...”
|
|
|
|
정인지 영감이 날 보며 껄껄 웃었다.
|
|
|
|
“집현전 학사들이 하는 일반적인 일이 그거기는 하지. 경연을 준비하고, 농업이나 기술 연구도 하는 게 우리 집현전의 일이니 말이야. 그런데 김 수찬 자네는 예외야.”
|
|
|
|
김 수찬은 예외라는 말을 했을 때 집현전의 문이 열렸다. 그러고는 당상관을 상징하는 붉은 색 관복을 입은 아주 높으신 분이 내 가까이 걸어왔다. 가져온 서류가 도대체 몇 개야?
|
|
|
|
높으신 분 안색을 대충 살피니, 그 역시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아예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고 얼굴빛은 흙빛에 가까웠다. 대충 보아하니 휴일에도 야근으로 혹사당했던 게 틀림없다.
|
|
|
|
“...... 김 수찬!”
|
|
|
|
눈을 돌려보니 정인지는 다른 학사들이 있는 곳으로 이미 사라진 뒤였다. 아, 나는 6조 판서님들이든 누구든 간에 ‘정책 연구’ 의뢰하러 오는 분들 일을 처리하는 담당자로 배정된 거구나.
|
|
|
|
그러니 다른 관원들처럼 경연을 준비할 필요도, 경연에서 뭔가 강의를 하라고도 배정을 안 주는 거겠지.
|
|
|
|
납득이 쏙쏙 된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
|
|
|
당상관의 붉은 관복을 입으신 분은 호조의 황희였다. 그는 나에게 자리에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
|
|
|
나를 보는 그의 눈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말 한번 잘 못하면 아주 죽여버릴 기세다.
|
|
|
|
이래서 전임 현감이 나에게 호조에 가서는 ‘겸손한 척’을 절대 하지 말라고 한 거구나. 그에게 대고 제가 부족해서 고작 이 정도밖에 못했다고 말하면 황희는 나를 진짜로 죽일 것 같다.
|
|
|
|
“김 수찬, 자네 덕분에 호조는 아주 일복이 터졌네.”
|
|
|
|
“송구합니다.”
|
|
|
|
“송구할 일은 아니지. 자네가 백성들이 짊어진 무거운 공납도 잘만 걷으면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걸 태상왕(이방원) 전하께 증명한 덕분에, 건강이 심히 안 좋으셨던 태상왕께서 갑작스레 건강을 되찾으셨으니까.”
|
|
|
|
사회복지사, 간호사, 의사들이 입을 모아서 하는 말이 있다. 어르신들이 치매가 오고, 돌아가시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삶의 의지’가 약해질 때라고 말이다.
|
|
|
|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정말 별거 아닌 집안일을 힘들게 하는 걸 보고 효심에 찬 자손들이 말리면서 편히 쉬시라 하는 것이 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실상은 그분들께 자신은 쓸모없는 사람이라 느끼게 하여, 삶의 의지를 꺾는 바람에 치매나 우울증 같은 걸 앞당길 수 있으니.
|
|
|
|
옆에서 지켜보면서 잘하신다 격려하고 고맙다 칭찬하는 것이 어르신들을 건강하고 오래오래 살 수 있게 하는 길이라고 자주 말하는데. 태종 이방원도 세종이 정치 잘하는 거 보고 슬슬 미련을 내려놓다가...
|
|
|
|
내가 만든 공납의 긍정적 변화를 보고 설마 화폐(무조건 실패한다) 도입 각을 본 것은 아닐까?
|
|
|
|
“그러니 자네는 호조의 일을 가장 우선해서 도와야만 할 것이야.”
|
|
|
|
“여부가 있겠습니까.”
|
|
|
|
“그리고 이참에 내 사과 하나 하지. 나는 자네가 전시에서 조선의 세금 제도가 썩었다고 말했을 때 그것이 젊은이의 치기가 만든 철없는 소리라고만 생각했네. 그래서 나와 다른 재상들이 뼈를 깎아가면서 만든 최선의 결과를 자네가 모욕하는 것이라 생각했네.”
|
|
|
|
“대감...”
|
|
|
|
황희는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나에게 실망해서 그런 게 아니라, 자기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었다.
|
|
|
|
“자네가 옳았네. 조선의 세금 제도는 바뀌어야만 해. 상업이 말업이기는 하나, 무본억말이라면서 상인들을 무작정 탄압하는 것은 틀린 일인 거지. 백성을 괴롭히기만 할 뿐이니.”
|
|
|
|
“인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
|
|
“태상왕 전하께서는 아마도 이걸 바로잡고 싶은 마음에 우리 호조 관원들을 재촉하시는 것 같네. 장시를 모든 고을에 설치하고, 공납제도를 개혁해 백성을 죽이는 공납이 아닌 백성들을 살리는 공납이 되는 걸 보고 싶으신 것이야.”
|
|
|
|
태종 이방원은 자기 권력에 도전하는 자를 빼고는 모두에게 굉장히 따뜻했다.
|
|
|
|
어떤 한 관리가 자기 친구를 궁궐 구경시켜 주다가 하루 몰래 재워준 일이 발각되었다. 이는 엄연히 ‘사형’에 해당되는 큰 죄이지만 나쁜 짓을 하려고 한 게 아니라 판단하여 무죄로 풀어주었다.
|
|
|
|
그 외에도 어떤 백성이 길을 잘못 들어서 궁궐 안으로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바로 풀어줬다.
|
|
|
|
다른 임금이었으면, 아니 21세기 현대 국가였어도 그런 놈들은 최소 집행유예에 벌금형 아니면 징역 몇 년까지도 살 텐데 말이다.
|
|
|
|
그 외에도 어떤 미친 작자가 사주하여 궁궐 근처에서 아이들에게 공 3개를 주고는, 거기에 양녕, 효령, 충녕이라 이름을 적고서 차고 놀게 했었다.
|
|
|
|
그 공을 가지고 놀다가 아이 한 명이 효령이라 적어놓은 공을 빠트렸을 때 ‘효령이 빠졌어!’라고 외쳐대다가 잡히게 된 것인데. 조선 기준으로는 이것이 엄연히 주술(저주)로 볼 수 있어서 아이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가족들까지 싹 다 잡아 죽일 수 있는 대역죄였다.
|
|
|
|
다른 임금이었으면 저 아이들과 가족들은 조선 고문 풀코스를 다 겪은 뒤에, 거열형 당해서 죽었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고. 더 나아가서 ‘신하들 숙청 풀코스’까지 벌어질 수가 있었는데...
|
|
|
|
이방원은 무고한 백성이 죽는 걸 보기 싫어서 그냥 덮어버렸다. 왕권을 강화할 좋은 기회였음에도, 그냥 덮음으로써 그 기회를 스스로 버렸다.
|
|
|
|
화폐로 백성들 등쳐먹은 건 그의 애민 정신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자기 주장이 무조건 옳다고 믿는 그의 고집 때문이었을 거다.
|
|
|
|
그 애민 정신이 세종 대왕님에게도 전해져 내린 것 같다.
|
|
|
|
내가 여기서 시장 확대 정책을 내놓으면 높은 확률로 ‘화폐’ 이야기를 꺼낼 것 같지만... 그건 내가 목숨 걸고 말릴 것이다.
|
|
|
|
어차피 내가 개입하지 않았어도, 세종대왕님이 곧 하실 일이기도 하니.
|
|
|
|
이걸 내가 말리면 세종대왕님의 크나큰 실책 하나를 없애는 셈이 된다.
|
|
|
|
“자, 그러니 어서 말해보게. 시장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어찌해야겠나?”
|
|
|
|
...... 나는 어차피 수 틀어지면 사직 상소 내고 고향에 가버리면 그만인 놈이다.
|
|
|
|
그러니 조선에서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신박한 재정 정책을 내놓을 수가 있다.
|
|
|
|
“전국 모든 고을에 시장만을 전담하는 관원부터 배치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감당이 안 될 것입니다.”
|
|
|
|
비용 지출을 늘려서 백성을 이롭게 하자는 정책 제안하는 놈은 처음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