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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자정리,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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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진해현의 왕도 아니고, 조정에서 나보고 가라 하면 당연히 가는 게 맞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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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이렇게 떠나게 되니 마음이 무겁다.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은데, 할 일을 다 못 끝내고 가는 것 같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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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조선은 현재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중앙집권이 가장 강력한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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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고 하는데 안 가는 것 이것은 반역이 되니 무조건 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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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마친 일은 여럿 있지만, 후회 없을 정도로 열심히 한 건 맞잖아. 그거면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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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자신을 위로하고 깔끔히 정리해 놓은 문서 더미를 뒤로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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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본 이방을 비롯한 아전들이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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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같이 훌륭한 분께서 이토록 빨리 가시다니, 너무나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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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이네. 그리고 이번에 새로 오시는 분은 나 같은 종6품의 현감이 아니라 종5품의 현령이 아니신가? 나처럼 과거에 막 붙은 애송이가 아니라 관에서 잔뼈가 굵으신 분이 오는 것이니, 진해현은 지금보다 더 번영하게 될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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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해 현감으로 있었던 1년 반 동안 진해 현은 제법 많이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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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가 우리 현 근처를 떠돌던 유랑민이라지만, 저들이 진해현에 정착하면서 인구가 무려 10% 가까이 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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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지도 3%가량 늘었는데, 이건 개간이 본격적으로 끝나는 내년, 내후년쯤 되면 10% 정도로 늘어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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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이 활성화되면서 백성들의 생활 수준도 많이 올라갔고, 농업용수 조달이 쉬워지면서 농사로 얻는 소출도 15% 가까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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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현 자체가 애초에 '현감'이 다스리는 현치고는 좀 큰 편이었는데, 이번에 내가 여러 정책을 성공시키면서 번영한 것이 인정받아서... 고을의 격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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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치면 읍에서 소도시로 승격한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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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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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오신 사또는 나보다 자네들을 더 잘 보살펴 줄 것이네. 그리고 누가 보면 내가 유배 가는 줄 알겠어. 엄연히 정6품 상계로 영전하는 건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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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에서는 내가 세운 공을 아주 높게 쳐줬다. 그래서 품계를 무려 3개나 올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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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6품 상계, 정6품 하계, 정6품 상계라는 단계를 밟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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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새로 만들어진 순자법에 따르면 조선 관리들은 당하관(정3품 상계 미만)의 경우 거의 근속 승진이고, 15개월마다 품계를 하나씩 올려주는 게 일반적이다. 수령의 경우는 2년 6개월마다 진급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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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나는 1년 6개월 일했으므로 진급이 안 되는 게 정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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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생각하면 일반적인 관점에서 경사도 이런 경사가 없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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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를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그런데 고을 사람들이 가져온 선물은 어찌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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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물리도록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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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 고을 양반부터 백성들 그리고 저희 아전들까지 한마음 한뜻으로 모은 것들입니다. 이것까지 물리치는 것은 선물한 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는 일이 됩니다. 사또 덕을 안 본 사람이 없습니다. 사또께서는 모르시겠지만, 고을의 모든 이들이 마음을 모아 사또께서 조금만 더 저희 고을에 있게 해달라고 상소까지 올렸었습니다. 사또께서는 저희가 이랬다는 걸 알면 절대 하지 말라고 하실까봐, 끝까지 말씀은 안 드렸고, 상소를 거절당해서 사또께서 이리 가시게 되었습니다만... 이것까지 안 받아 주시면 정말 서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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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안 받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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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전들에게 절대로 송별회나 송별 선물 같은 걸 준비하지 말라고 이미 명을 내린 바 있다. 하여 나는 어제 송별 연회를 무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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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이렇게 선물을 준비했다니... 이건 다 백성들의 진심이라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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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 나 가지 못하게 한마음 한뜻으로 상소까지 올렸었다 하니. 이걸 안 받는 게 더 이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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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군. 그럼 받도록 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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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사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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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과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나는 동헌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새로 부임하는 현령과 인사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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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욱하고 부족한 소관이 현감이라는 큰일을 맡아 올바르게 처리되지 못한 일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도 새로 오신 현령 나리께서는 소관이 저지른 실책을 부디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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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책이라는 말을 들은 현령이 껄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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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김 현감은 과공비례라는 말을 모르나? 겸손이 너무 과한 것도 무례해 보일 수 있다네. 상왕 전하께서도 김 현감이 시장을 만들고, 양반과 백성들을 교화한 것을 아주 높게 평가하고 계시니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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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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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을 그냥 인사치레라 생각하는 40대 중반은 되어 보이는 현령이 넉살 좋은 차장님처럼 껄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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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 백성들이 사농공상을 가리지 않고, 한마음 한뜻으로 자네의 선정에 감사하며, 부디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게 해달라고 상소를 올렸다던데. 그런 자네가 이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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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니, 내가 여기서 진심으로 '부족하다'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그에게 실례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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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관직 생활을 십수 년 더한 선배 얼굴에 먹칠을 하면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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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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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네. 자네가 그런 사람이라는 건 저기 관아 마당에 수레로 몇 개씩이나 쌓여있는 선물 더미를 보면 알 수 있네. 이렇게나 많이 가져가는 데도 누구 하나 불만은커녕 자네 가는 길을 아쉽게만 여기는 백성들 표정을 보면서 뭔지 알 것 같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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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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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온 현령이 날 보고서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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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지방관으로 발령되어서 참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네. 호조는 지금 자네가 새로 만든 장시를 어떻게 전국 모든 고을로 확대해서 운영할 수 있는지 고민하느라 야근을 아주 밥 먹듯이 하고 있네. 다들 차 한 잔 마시고, 시 한 수 쓸 시간도 없이 죽어라 일만하고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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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사무 업무와 21세기 현대 사회의 사무 업무는 같은 업무를 함에 있어 그 강도 차이가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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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미국에서 9:00~18:00로 근무한다고 하면 점심시간에도 샌드위치 씹어 먹으면서 죽어라 일을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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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에서는 주어진 일만 잘 끝내면 된다는 전제하에, 업무 도중에 관리들끼리 잡담(업무 관련 이야기라는 핑계)을 하기도 하고 차를 마시면서 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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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눈앞에 있는 현령이 말하는 것처럼 밤늦게까지 밥 먹는 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을 빼고 서류만 들여다보면서 일하는 경우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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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급한 일이 터진 게 아니고서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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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보통 지방관으로 가면, 진급이 더뎌지겠구나 하고 한지에 내쳐진 기분이 든다고 하지만. 나는 호조의 고역을 벗어던지고 진해현으로 올 수 있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 여겼네. 덕분에 기쁜 마음으로 왔지. 김 현감이 일을 잘 해주었으니, 후임인 내가 그렇게 고생할 일도 없을 것 같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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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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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현감은 참으로 성실하군. 관직 생활로만 따지면 자네보다 13년을 더 지낸 선배로서 조언 하자면, 사람이 너무 성실하게만 살면 언젠가 부서질 수가 있어. 너무 곧게만 살아도 문제가 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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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겨듣겠습니다. 조금은 더 유연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현령 나리. 그러나 아직 마치지 못한 고을의 일이 너무 많은데 이 중 중요한 것들만 빠르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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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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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관이 보기에 지금 고을에서는 분변(똥오줌 같은 것)이 그냥 낭비되고 있습니다. 아직 백성들을 교화시키지 못하여 뒷간을 아무 곳에나 만들고 적당히 알아서들 하고 있는데... 이를 모아서 잘 썩힌다면 훌륭한 퇴비가 될 것이며, 농사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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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을 들은 현령의 얼굴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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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해주는 건 그저 꿀팁에 불과한데, 왜 저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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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가 인수인계해야 할 일을 현령에게 제대로 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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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히지 못한 분변은 결국 채소와 곡식을 죽일 뿐이고 효능 또한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 현령 나리께서는 무지한 백성들이 분변을 바로 밭에 뿌리지 못하게 엄히 금하시고, 짚이나 낙엽 같은 걸 분변에 섞어 20일 이상 삭힌 것만 쓰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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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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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농민들이 역을 수행할 때 관에서는 새참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령과 조례들이 새참 중 막걸리를 빼돌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을 하면 백성들의 환곡을 줄여준다고는 하나, 저들은 몸이 몹시도 힘들 텐데... 어찌 중간중간에 백성이 마셔야 할 막걸리를 빼돌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사령과 조례들도 힘들어서 그러는 것일터, 현령 나리께서는 이 점도 유심히 살펴 주시고... 저들에게도 술을 넉넉히 내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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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나는 인수인계해야 할 사항들을 정리해 놓은 책자를 현령에게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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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곡히 쓰인 글씨로 가득한 두툼한 책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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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보고 얼굴이 더 허옇게 변한 사또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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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현감 자네 대체 일을 어떻게 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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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욱한 제가 주상 전하께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힘써 행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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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온 현령이 내 어깨를 잡고서 단단히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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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현감, 자네에게 정말 중요한 말 한마디를 해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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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현령 나리. 새겨듣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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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그 말을 호조판서 대감 앞에서, 아니 호조의 관원들 앞에서 하지 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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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관리들은 나 때문에 야근을 덤터기 쓴 상태이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내가 모자라서 이 정도밖에 못했다는 말을 하면 화가 날 수밖에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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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가 한 일이 절대 적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못 마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닌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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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름을 제대로 삭혀서 퇴비로 만들어 쓰기만 해도 농업 효율이 제법 오를 테고, 백성들이 수인성 전염병에 걸려서 죽는 일 또한 줄어들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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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수도까지는 무리더라도 집과 공공장소에 반드시 변소를 마련하게 해서 거기에서만 볼일을 보게 해야 하고... 거기에 특산품 개발이나 그런 것까지 해야 할 일이 산더미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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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하나씩, 하나씩 해 나가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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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 보기에는 한참 모자란 수준이지만, 조금이라도 개혁을 진행하여 앞으로 나아간다면... 조선은 밝아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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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적당히 판을 깔아놓은 뒤 나는 은퇴하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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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를 해놓으면 꼰대 허조 대감도, 황금 많이 드시기로 유명하여 황금 대사헌이라는 별명을 가진 종신 영의정 황희도 나한테 뭐라고는 못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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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현령 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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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고서 내가 고을을 떠나려 할 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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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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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이제는 사또가 아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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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 저 같은 상인은 안 데려가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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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덕이 날 보면서 씩 웃었다. 옆에는 그의 딸 김겨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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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으로 가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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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께서 밀어주시면 저도 조선에서 가장 큰 시전의 맨 구석 자리 하나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거 아닙니까? 진해현에 있는 상회는 자식 놈에게 맡겨도 되니, 저는 더 큰 물에서 놀아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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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덕이 내 옆에 있어 준다면 앞으로도 돈 문제 때문에 머리 아파질 일은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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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은 내가 선물로 잔뜩 받은 이 곶감이니, 건어물이니 하는 귀한 물건들도 처분도 해야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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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감만 따져도 내가 지금까지 받은 게 1톤 가까이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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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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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사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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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고 우리는 곧장 한양으로 떠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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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가 본 것은 내가 가야 할 길 양옆으로 진해 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있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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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은 나를 보자 울기부터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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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사또. 사또 덕분에 내년쯤이면 저도 손바닥만 하기는 합니다만, 땅 한 조각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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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 덕분에 내년 환곡 갚을 걱정을 안 해도 되니 잠자리에 누우면 두 발이 절로 쭉 펴집니다. 너무 행복합니다. 사또께 받은 은혜를 갚지도 못했는데, 왜 벌써 가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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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내가 세금을 더 내라고 했을 때 반대했던 양반들도 내가 가는 길을 배웅하러 와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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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은 나를 향해 아주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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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 덕분에 백성들이 먹고 입는 것이 풍족해지고, 고을 이곳저곳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어진 마음으로 고을을 보살펴 주신 은혜를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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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을 보고 있자니 나까지 눈에서 눈물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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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환송의 말들을 뒤로 하고 나는 한양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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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나는 이곳을 떠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있게 될 자리에서 더 열심히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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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이들 모두도 조선의 발전을 같이 누리게 될 거라 믿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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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김대붕이 떠난 관아에는 양반과 상인, 농민 가릴 것 없이 수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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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부임한 현령은 그 광경을 보며 머리가 어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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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짬이 있는 자라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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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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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고을의 선비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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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사또께서 이 고을에 베풀어주신 은혜가 크니, 송덕비를 세워 그 은공과 어진 마음씨를 기리고자 합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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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덕비 건립은 김대붕이 전혀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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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가난한 백성부터 양반들까지 순수한 마음으로 돈을 모아온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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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하겠네. 또한 본관도 어명을 받은 몸이니 성은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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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이렇게 했지만, 현령의 속은 매우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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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 전하께서 관원들에게 엄히 명해 휴일에는 출근을 금하였기에, 그날은 좀 쉴 수 있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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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을 제외한 날에는 끝없이 야근에 시달려 왔기에 이곳으로 오게 되어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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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 대상이 되는 전임 사또가 양반과 백성이 한마음 한뜻으로 송덕비 세우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놈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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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거면 호조에서 야근하는 것이 나은 게 아닌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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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고서 그는 김대붕이 써놓은 업무 인수인계서를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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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미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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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일장이 열리는 날에는 사고가 많아지니, 현령인 내가 직접 장시에 가서 백성들을 재판하고 규율을 감찰해야 한다? 그리고 양반들이 공납 내는 걸 줄이고자 하면, 송덕비를 들먹이면서 올바른 행동을 행하라고 교화해야 하며. 상인들에게 세금을 받아야 하니, 상인들이 자기 재산을 속이고 있는지 아닌지 연에 한 번 정도는 직접 나가보아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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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 생활만 10년 넘게 했지만 이런 미친 놈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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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들까지 다 하나하나 감시하고, 시장 열어놓은 데에서 직접 일하는 사또가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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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야하는 일이 많으면 호조가 더 나을 것만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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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지방관으로 발령받으면 어지간한 임금의 특별한 지시가 없는 이상 편히 일하고 돈 모으는 게 조선의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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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김대붕이 벌여놓은 일을 상왕, 지금 주상 전하께서 만족할 정도로 수습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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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 받아서 한 재산 쌓는 건 포기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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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사실 가능하기는 하다. 김대붕만큼만 하면 쌀 2천 섬 어치를 챙겨가도 아무도 뭐라 안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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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김대붕만큼 하는 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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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니면 청렴결백해야만 한다. 그래야 김대붕으로 인해 눈이 높아진 양반, 아전, 백성들에게 동정표라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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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서, 저 일을 다 수습하려면...? 죽어라 일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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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령은 이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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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가서 그냥 매일 밥먹듯이 야근하고 싶다. 그게 더 마음도 편하고 몸도 편하겠어,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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