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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현에서 학식 높기로 이름깨나 떨치던 선비 정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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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금 내 앞에 처참한 모습으로 묶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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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 귀는 화살로 뚫려 있고, 상투는 풀린 데다가, 목은 나무 말뚝 위에 얹혀있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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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학식 높은 양반으로 존경받던 자의 말로라 하기에 너무 비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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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보면 세상만사가 참 허무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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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내가 놈을 죽이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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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죽을 짓을 해서 죽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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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3년 전 부민고소금지법이 만들어졌다. 백성이 자신의 고을 사또를 고발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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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사또가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거나, 이루 말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는 융통성이 발휘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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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놈은 시장이 열려 백성들이 조금 살만해지니 자기에게 고리대금을 안 빌릴까 봐 편법을 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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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마땅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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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놈의 죽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고을 백성들의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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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양반 유난히도 이자를 비싸게 처 받더니...천벌을 받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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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이 아무리 높아 봐야 뭐 해. 먼저 사람이 되어야지...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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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고을에서 웃어른으로 존경받았던 사람이 지금은 인간쓰레기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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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학소의 이름은 진해현에서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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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제 형벌을 집행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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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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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이방, 또 무슨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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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학소 저 자가 가지고 있는 집, 토지, 노비가 적지 않습니다. 그건 어찌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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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은 내 앞에서 손을 비벼대며, 주변에 있는 아전들에게도 시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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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학소의 재산을 좀 나눠줄 수 있냐고 물어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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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에서는 정학소의 자산을 다 몰수해서 관아로 들여라 말아라 언급한 바가 없으니... 여기서는 약간의 융통성을 발휘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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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온 뒤로 저들을 심하게 굴린 면도 있고 부정부패까지 많이 줄어든 것을 감안하면... 여기서라도 좀 떼어주긴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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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학소 저자가 가지고 있는 토지 중에 은결(관아에 신고하지 않은 밭) 전부, 토지 3할, 창고에 있는 물건의 절반 정도는 없어진다 해도 알 길이 없겠군. 그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관아로 들이도록 하게. 또한 정학소의 노비는 모두 관아의 노비로 부릴 것이며, 정학소의 가족은 다른 고을의 공노비로 보내도록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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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알고 시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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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해놓고도 참 웃기다. 부정부패를 알면서도 용인하고, 적절한 수준에서 조정하는 게 최선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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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가야 할 길이 참 멀고도 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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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형을 집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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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사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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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시를 내리자 우리 관아 군교에 의해 정학소의 목이 순식간에 잘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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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이 죽는 모습을 보며 모인 이들 모두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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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이 열려서 마을 사람들이 살만해지니까 기어코 반대하고 나서더니... 죽어 마땅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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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죽었네, 잘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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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들이란 어지간하면 고을에서 웃어른 대접을 받는 분들인데... 얼마나 인덕이 없었으면 저런 소리를 듣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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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인간이 못돼먹었기에 나를 찾아와 시장을 여는 건 백성들을 게을러지게 만드는 짓거리라면서 꼰대 같은 소리나 해대고 부민고소금지법을 우회해 상소를 올려서는 나를 골탕 먹이려 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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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이라는 게 머리에 장착된 자였다면 지금과 같은 결말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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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모인 이들을 다 해산시켜라. 그리고 고을의 선비들에게 연락을 넣어서 모두 관아로 와달라고 해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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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사또. 그런데 그분들은 왜 부르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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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의 미래에 대해서 조금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자 함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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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고을 세금 제도가 좀 많이 개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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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권력으로 백성들의 허리를 휘게 만드는 세금 제도를 완전히 뒤집어엎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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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개판인 걸 가만히 놔둘 수도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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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아는 이상 어떻게 조금이라도 고쳐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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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으로 보기에는 임시방편에 불과한 수단일지라도... 당사자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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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 선비들을 불러놓고 빈속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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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만나면 인사말로 ‘밥은 먹었어?’라고 묻는 게 전통이자 예의인 조선에서는 더더욱 그래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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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고, 조선에서는 조선법을 따라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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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을 선비들을 위해서 제법 거한 상을 차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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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현의 현감으로 부임을 했으면 마땅히 고을의 어른들께 인사부터 드리고, 조언을 구했어야 하는데... 제가 아직 미숙하기도 하고 공무에도 쫓기는 처지라 이런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늦었습니다. 송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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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딱히 송구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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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 현감으로 부임해서 백성들 사정을 돌보고, 땡중들이 부정부패 저지른 거 처단하고 뭐 그런 게 중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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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유지들 만나서 희희낙락거리며 비싼 음식 처먹고, 관기 불러서 춤추는 연회 자리 여는 게 뭐가 중요해? 이런 건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리는 게 당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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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이런 식의 인사는 하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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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맡은 현감이라는 자리가 한국으로 치면 조그마한 군의 군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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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 노릇 제대로 해 먹으려면 ‘지역 유지’라 불리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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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러면 쟤네 중 누구라도 오늘 아침에 죽은 정학소처럼 날 가지고 끊임없이 괴롭힐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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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백성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부정부패와 싸우는 나를 건드리면... 정학소처럼 목 없는 귀신이 될 거라는 건 저놈들도 잘 알게 되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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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은 일이 일어날 여지는 안 만드는 게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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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에 이 고을에서 제일 명망이 높다 일컬어지는 선비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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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께서 공무로 아주 바쁘신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다망하신 와중에 저희를 이리 불러서 상을 차려 융숭한 대접을 하여 주시니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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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아직 나이가 어려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여러분들께서 많은 조언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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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런 대화가 오고 가면 서로 하하 호호 웃어야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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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 여기서 웃고 있는 건 나 혼자뿐이고, 다른 선비들은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것처럼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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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밖에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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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직접 손을 쓴 건 아니지만 이방원이 정학소의 집안을 완전히 멸문시켜 버렸고, 그 과정을 보면서 자칫하면 자신도 정학소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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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사실 오늘 제가 고을의 현명하신 선비님들께 이렇게 와주십사 청을 드린 것은 한가지 협조를 해 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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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어떤 협조를 드리면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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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내년에도 올해와 똑같은 양의 공납을 내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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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을 들은 선비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들의 심정은 백번 이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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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땡중들이 공납으로 바치는 공물을 비싼 가격으로 샀다고 속여서 횡령했다는 걸 밝혀냈다. 그 결과 백성들이 공납으로 내야 하는 세금이 대폭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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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 조금 보태면 이전에는 공납으로 아무리 가난한 형편이라도 한 가구당 쌀 두 섬을 내야 했던 것을 이제는 한 섬만 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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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땅도 많고, 노비도 많은 고을 선비들에게는 이게 엄청나게 크게 다가왔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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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은 이전의 절반만 내도 되게 된 상황인데 자기들은 이전처럼 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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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불공정한 일이라 여겨지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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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 덕분에 백성들이 져야 하는 공납의 부담이 크게 줄었습니다. 더불어 가난한 백성이 시장을 통해 남는 시간에 짚신을 삼든, 돗자리를 짜든, 나물을 캐든 해서 내다 팔 수 있게 되었으니 살림 또한 크게 폈지요. 이 미천한 유생이 50년 넘게 살아오면서 이렇게 백성들을 위해주시는 사또는 처음 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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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찬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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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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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대표하는 선비는 여기서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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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께서도 아시겠지만, 부유하다 해서 세금 내는 것이 그리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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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씀에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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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은 많이 버는 자이니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는 말에는 나도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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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부자의 입장이라도 세금을 내는 것은 굉장히 뼈아픈 일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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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 달에 천만 원 벌면, 매년 3,000만 원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 이게 적은 돈이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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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많이 버니까 그 돈을 내고도 여유가 있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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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들도 내가 땡중들 때려잡아서 세금 줄인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자신들에게도 혜택이 돌아와 그 돈으로 뭘 할까 즐거운 고민을 했었을 텐데... 그걸 백지로 돌려버린다니 화가 나는 건 당연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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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선비의 의무가 무엇이겠습니까? 백성들을 교화하고, 저들이 굶주릴 때 먹을 양식을 내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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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는 합니다. 하지만, 가난한 백성들은 공납 부담이 줄어드는데, 저희는 계속해서 이전과 같이 부담해야 한다는 건 불공평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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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이 하는 말 자체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니 나도 ‘그럼 죽어.’ 이렇게 말하는 대신 대화를 하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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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녀석들은 아주 치명적인 범죄 하나를 저질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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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관리들 월급 적게 주는 대신에 탈세, 세금 횡령 이런 걸 암암리에 허락해 주는 나라이긴 하지만, 그래도 하면 안 되는 짓이 있고 해도 되는 짓이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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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는 내가 고을 현감이라는 권력만 가지고는 손을 대기 힘들어서 꺼내지 않으려고 했던 건데. 이방원이 나를 전적으로 지지해 준다면... 조정이 나를 지지해 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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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저들을 이것으로 협박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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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전들과 달리 뇌물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 제 손에 들려 있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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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두루마기 소매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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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농사와 관련된 책이지요. 내용을 읽다 보니까 작년 진해현에 약간의 흉년이 왔다고 적혀 있던데... 제가 백성들에게 작년 농사가 흉년이었는지 일일이 물어보고 다녀야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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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기로 진해현 작년 농사는 ‘평범한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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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년이라고 보고를 올렸다는 건 ‘기군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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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을 속인 거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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