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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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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현에서 학식 높기로 이름깨나 떨치던 선비 정학소.

그는 지금 내 앞에 처참한 모습으로 묶여있다.

양쪽 귀는 화살로 뚫려 있고, 상투는 풀린 데다가, 목은 나무 말뚝 위에 얹혀있는 상태.

마을에서 학식 높은 양반으로 존경받던 자의 말로라 하기에 너무 비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걸 보면 세상만사가 참 허무하다니까.”

그렇다고 내가 놈을 죽이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놈은 죽을 짓을 해서 죽는 거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부민고소금지법이 만들어졌다. 백성이 자신의 고을 사또를 고발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된 것이다.

누가 봐도 사또가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거나, 이루 말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는 융통성이 발휘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놈은 시장이 열려 백성들이 조금 살만해지니 자기에게 고리대금을 안 빌릴까 봐 편법을 쓴 거다.

죽어도 마땅한 거다.

그리고 놈의 죽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고을 백성들의 반응이었다.

“저 양반 유난히도 이자를 비싸게 처 받더니...천벌을 받는 거지.”

“학문이 아무리 높아 봐야 뭐 해. 먼저 사람이 되어야지... 사람이.”

한때는 고을에서 웃어른으로 존경받았던 사람이 지금은 인간쓰레기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정학소의 이름은 진해현에서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면 이제 형벌을 집행할까?

“사또.”

“김 이방, 또 무슨 일인가?”

“정학소 저 자가 가지고 있는 집, 토지, 노비가 적지 않습니다. 그건 어찌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이방은 내 앞에서 손을 비벼대며, 주변에 있는 아전들에게도 시선을 보냈다.

정학소의 재산을 좀 나눠줄 수 있냐고 물어보는 거다.

조정에서는 정학소의 자산을 다 몰수해서 관아로 들여라 말아라 언급한 바가 없으니... 여기서는 약간의 융통성을 발휘해도 된다.

내가 온 뒤로 저들을 심하게 굴린 면도 있고 부정부패까지 많이 줄어든 것을 감안하면... 여기서라도 좀 떼어주긴 해야겠다.

“정학소 저자가 가지고 있는 토지 중에 은결(관아에 신고하지 않은 밭) 전부, 토지 3할, 창고에 있는 물건의 절반 정도는 없어진다 해도 알 길이 없겠군. 그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관아로 들이도록 하게. 또한 정학소의 노비는 모두 관아의 노비로 부릴 것이며, 정학소의 가족은 다른 고을의 공노비로 보내도록 하게.”

“그리 알고 시행하겠습니다.”

내가 말해놓고도 참 웃기다. 부정부패를 알면서도 용인하고, 적절한 수준에서 조정하는 게 최선이라니.

조선이 가야 할 길이 참 멀고도 험하다.

“참형을 집행하라.”

“예, 사또.”

내가 지시를 내리자 우리 관아 군교에 의해 정학소의 목이 순식간에 잘려버렸다.

놈이 죽는 모습을 보며 모인 이들 모두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시장이 열려서 마을 사람들이 살만해지니까 기어코 반대하고 나서더니... 죽어 마땅하지...”

“잘 죽었네, 잘 죽었어.”

양반들이란 어지간하면 고을에서 웃어른 대접을 받는 분들인데... 얼마나 인덕이 없었으면 저런 소리를 듣게 된 거야?

하긴 인간이 못돼먹었기에 나를 찾아와 시장을 여는 건 백성들을 게을러지게 만드는 짓거리라면서 꼰대 같은 소리나 해대고 부민고소금지법을 우회해 상소를 올려서는 나를 골탕 먹이려 했겠지.

개념이라는 게 머리에 장착된 자였다면 지금과 같은 결말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거다.

“여기 모인 이들을 다 해산시켜라. 그리고 고을의 선비들에게 연락을 넣어서 모두 관아로 와달라고 해주게.”

“예, 사또. 그런데 그분들은 왜 부르시는 겁니까?”

“고을의 미래에 대해서 조금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자 함이네.”

지금 고을 세금 제도가 좀 많이 개판이다.

그러나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권력으로 백성들의 허리를 휘게 만드는 세금 제도를 완전히 뒤집어엎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개판인 걸 가만히 놔둘 수도 없는 일.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아는 이상 어떻게 조금이라도 고쳐 봐야지.

내 눈으로 보기에는 임시방편에 불과한 수단일지라도... 당사자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테니까.

**

고을 선비들을 불러놓고 빈속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사람을 만나면 인사말로 ‘밥은 먹었어?’라고 묻는 게 전통이자 예의인 조선에서는 더더욱 그래서는 안 된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고, 조선에서는 조선법을 따라야지.

나는 고을 선비들을 위해서 제법 거한 상을 차려주었다.

“진해현의 현감으로 부임을 했으면 마땅히 고을의 어른들께 인사부터 드리고, 조언을 구했어야 하는데... 제가 아직 미숙하기도 하고 공무에도 쫓기는 처지라 이런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늦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사실 딱히 송구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고을 현감으로 부임해서 백성들 사정을 돌보고, 땡중들이 부정부패 저지른 거 처단하고 뭐 그런 게 중요하지...

지역 유지들 만나서 희희낙락거리며 비싼 음식 처먹고, 관기 불러서 춤추는 연회 자리 여는 게 뭐가 중요해? 이런 건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리는 게 당연하지.

그럼에도 이런 식의 인사는 하는 게 맞다.

내가 지금 맡은 현감이라는 자리가 한국으로 치면 조그마한 군의 군수다.

군수 노릇 제대로 해 먹으려면 ‘지역 유지’라 불리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안 그러면 쟤네 중 누구라도 오늘 아침에 죽은 정학소처럼 날 가지고 끊임없이 괴롭힐 수가 있다.

물론, 백성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부정부패와 싸우는 나를 건드리면... 정학소처럼 목 없는 귀신이 될 거라는 건 저놈들도 잘 알게 되었겠지만...

귀찮은 일이 일어날 여지는 안 만드는 게 좋지.

나의 말에 이 고을에서 제일 명망이 높다 일컬어지는 선비가 대답했다.

“사또께서 공무로 아주 바쁘신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다망하신 와중에 저희를 이리 불러서 상을 차려 융숭한 대접을 하여 주시니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아직 나이가 어려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여러분들께서 많은 조언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보통 이런 대화가 오고 가면 서로 하하 호호 웃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웃고 있는 건 나 혼자뿐이고, 다른 선비들은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것처럼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거다.

내가 직접 손을 쓴 건 아니지만 이방원이 정학소의 집안을 완전히 멸문시켜 버렸고, 그 과정을 보면서 자칫하면 자신도 정학소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인사말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사실 오늘 제가 고을의 현명하신 선비님들께 이렇게 와주십사 청을 드린 것은 한가지 협조를 해 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입니다.”

“저희가 어떤 협조를 드리면 되겠습니까?”

“그것은 내년에도 올해와 똑같은 양의 공납을 내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말입니다.”

내 말을 들은 선비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들의 심정은 백번 이해가 간다.

나는 땡중들이 공납으로 바치는 공물을 비싼 가격으로 샀다고 속여서 횡령했다는 걸 밝혀냈다. 그 결과 백성들이 공납으로 내야 하는 세금이 대폭 줄었다.

과장 조금 보태면 이전에는 공납으로 아무리 가난한 형편이라도 한 가구당 쌀 두 섬을 내야 했던 것을 이제는 한 섬만 내면 된다.

가진 땅도 많고, 노비도 많은 고을 선비들에게는 이게 엄청나게 크게 다가왔을 텐데...

백성들은 이전의 절반만 내도 되게 된 상황인데 자기들은 이전처럼 내라?

얼마나 불공정한 일이라 여겨지겠어.

“사또 덕분에 백성들이 져야 하는 공납의 부담이 크게 줄었습니다. 더불어 가난한 백성이 시장을 통해 남는 시간에 짚신을 삼든, 돗자리를 짜든, 나물을 캐든 해서 내다 팔 수 있게 되었으니 살림 또한 크게 폈지요. 이 미천한 유생이 50년 넘게 살아오면서 이렇게 백성들을 위해주시는 사또는 처음 뵈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러나 사또.”

이들을 대표하는 선비는 여기서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탄식했다.

“사또께서도 아시겠지만, 부유하다 해서 세금 내는 것이 그리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그 말씀에 동의합니다.”

부자들은 많이 버는 자이니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는 말에는 나도 동의한다.

그렇지만 부자의 입장이라도 세금을 내는 것은 굉장히 뼈아픈 일일 거다.

내가 한 달에 천만 원 벌면, 매년 3,000만 원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 이게 적은 돈이 결코 아니다.

돈을 많이 버니까 그 돈을 내고도 여유가 있기는 하지만.

양반들도 내가 땡중들 때려잡아서 세금 줄인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자신들에게도 혜택이 돌아와 그 돈으로 뭘 할까 즐거운 고민을 했었을 텐데... 그걸 백지로 돌려버린다니 화가 나는 건 당연하겠지.

“하지만, 선비의 의무가 무엇이겠습니까? 백성들을 교화하고, 저들이 굶주릴 때 먹을 양식을 내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기는 합니다. 하지만, 가난한 백성들은 공납 부담이 줄어드는데, 저희는 계속해서 이전과 같이 부담해야 한다는 건 불공평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저놈이 하는 말 자체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니 나도 ‘그럼 죽어. 이렇게 말하는 대신 대화를 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이 녀석들은 아주 치명적인 범죄 하나를 저질렀는데.

조선이 관리들 월급 적게 주는 대신에 탈세, 세금 횡령 이런 걸 암암리에 허락해 주는 나라이긴 하지만, 그래도 하면 안 되는 짓이 있고 해도 되는 짓이 따로 있다.

여태까지는 내가 고을 현감이라는 권력만 가지고는 손을 대기 힘들어서 꺼내지 않으려고 했던 건데. 이방원이 나를 전적으로 지지해 준다면... 조정이 나를 지지해 준다면...

내가 저들을 이것으로 협박할 수가 있다.

“저는 아전들과 달리 뇌물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 제 손에 들려 있는 건...”

넓은 두루마기 소매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보였다.

“작년 농사와 관련된 책이지요. 내용을 읽다 보니까 작년 진해현에 약간의 흉년이 왔다고 적혀 있던데... 제가 백성들에게 작년 농사가 흉년이었는지 일일이 물어보고 다녀야겠습니까?”

내가 알기로 진해현 작년 농사는 ‘평범한 수준’이었다.

흉년이라고 보고를 올렸다는 건 ‘기군망상’이다.

임금을 속인 거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