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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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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포트 게이트를 건넌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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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이질감 끝에 감았던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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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왔구나. 본인이야말로 이그나투스 대공. 태양의 후예여, 그대를 초정한 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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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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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발견했다. 위엄 넘치는 레드 드래곤이 아닌, 바닥을 뒹굴거리는 붉은 머리 꼬맹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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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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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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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끔뻑이며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생물체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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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불꽃을 닮은 선명한 적발. 뭐로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비싸 보이는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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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의 양옆으로 길게 솟은 뿔. 이를 중심으로 작은 뿔들이 엮여있는 모습은 왕관을 연상케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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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 부근에서 살랑이는 꼬리는 붉은 비늘이 촘촘하게 덮인 것이 꽤나 위협적이지만……전체적으로 오동통하고, 실루엣이 뾰족하다기보다 둥글어서 귀엽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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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드래곤의 특징들. 하지만 이그나투스 대공은 못 해도 제국의 역사만큼 나이를 먹은 존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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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아니, 용이 이런 꼬맹이의 모습으로 바닥을 굴러다니며 손님을 맞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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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어이가 없었으나, 마탑의 사람들에게는 대수로울 것 없는 평소의 모습이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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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이 한숨을 푸욱 내쉬며 바닥과 물아일체가 되어있는 이그나투스를 번쩍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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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 아무리 피곤하셔도 손님을 누워서 맞이하시면 안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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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하지만 의자에 올라가는 것도 슬슬 귀찮단 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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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른 사형들을 시켜서라도 하셨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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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래도 다른 사람을 전부 물리고 이렇게 혼자 게이트를 열었으니 괜찮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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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잘하셨지만, 아무튼 다음에는 꼭 의자에라도 앉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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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주변의 의자에 이그나투스를 앉혀놓는 메이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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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앉은 상태로도 추욱 늘어진 모습에 카렌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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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카렌아. 혹시 서부에는 최대한 편한 자세로 손님을 맞이하는 관습이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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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그런 건 없습니다. 애초에 메이킨 양도 깜짝 놀라 이그나투스 대공 각하를 의자에 올려두시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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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냥 귀찮음이 많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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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을까요? 어쩌면 다른 사정이 있을 수도 있고요. 적어도 저희를 무시하거나 그런 느낌은 아닌 것 같아 보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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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소곤거리고 있자니, 거의 드러눕다시피 의자에 걸터앉은 이그나투스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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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손님들 앞에서 미안하게 됐구나. 허나,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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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다 들렸나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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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 보여도 귀는 좋은 편이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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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말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는 이그나투스. 덕분에 누워있을 때는 몰랐던 그녀의 전신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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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의자에 앉았을 뿐인데, 발이 닿지 않을 정도의 단신. 하지만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땅에 닿을 정도로 길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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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이 빠르게 정돈해 주는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이목구비는 조각상처럼……아니, 이 세상 존재가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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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와 여인. 그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어중간한 매력이 아닌 양쪽의 매력을 전부 품고 있는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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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보다도 더 시선을 뗄 수 없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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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만 해도 선명한 붉음을 품고 있다고 여겼거늘, 이그나투스의 눈동자는 그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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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 불꽃, 리얼 레드 등등.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채도 높은 붉은색을 나타내는 단어를 떠올렸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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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무엇 하나 이그나투스의 눈동자를 온전히 표현하지는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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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충류의 그것처럼 세로로 갈라진 동공이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리고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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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자하브가 선조 회귀에 가까운 수준으로 혈계능력을 각성했다더니……그 말이 사실인가 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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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눈으로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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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계능력 자체가 보이는 것은 아니니라. 그저 체내에 품고 있는 마나의 성질과 순도를 느낄 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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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다른 자하브들과 비교하면 어떤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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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자하브들과 비교해서 말이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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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말한 이그나투스가 당장이라도 꾸벅거리며 졸 것 같은 나른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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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최근 500년간 보아온 자하브들과는 비교가 안 되겠군. 그전과 비교하면……순도만 따지면 샤메스. 아, 자하브의 시조이니라. 샤메스와 비슷한 것 같다만, 마나량은 다른 후예들에 비해 조금 부족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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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량이……부족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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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연금술사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먹었던 영약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었고, 이후에도 여러 인체실험의 부작용을 잠재우기 위해 여러 영약을 마구잡이로 퍼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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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의 흑마법사 지부를 박살 내고, 암살자 길드를 조지며 나온 영약 중 나와 극상성인 것들과 동료들에게 줄 분량을 제외하면 전부 퍼먹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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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상이나 브로커, 때로는 용병들에게 돈을 주고 영약을 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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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마나 다루는 법은 잘 모르는데, 마나량이 너무 많아서 종종 마나가 꼬이며 내상을 입었던 적도 있으니 말 다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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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내가 마나량이 적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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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무한한 마나를 생성한다는 드래곤 하트를 가진 입장에서 작아 보인다는 소리인가 싶었으나, 분명 다른 자하브들과 비교했을 때 적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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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어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이그나투스가 픽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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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자존심 상해하지 말거라. 보아하니 아직 어린 것 같은데, 나이가 어리면 당연히 쌓은 마나도 적을 수밖에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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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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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초대부터 500년 전까지의 자하브는 순 괴물 딱지였다는 소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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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별로 체감이 안 되긴 했지만, 제벨라에게 들었던 이야기처럼 자하브의 혈통이 열화된 것 자체는 사실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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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그나투스가 나와 자하브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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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태양과 불꽃의 차이를 말하라고 하면 나도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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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해야 규모와 온도밖에 생각나지 않는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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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실망감이 차올랐을 무렵. 이그나투스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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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이렇게 자세히 보니 다른 자하브들과 조금 느낌이 다른 것도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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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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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이 정도로 시간이 흘렀으면 아무리 후손이라도 조금 변하기도 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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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쩍 눈으로 보는 정도로는 정말 구분 못 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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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에는 누구보다도 민감할 터인 드래곤이 이렇게 반응한다는 건, 사실상 평범한 방식으로는 구별할 수 없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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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전문적인 방식으로 깊게 파고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애초에 그 정도로 의심받는 상황이 되면 어차피 뭘 하건 들킬 수밖에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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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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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한숨을 푸욱 내쉬던 도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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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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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하는 이그나투스. 사람의 것이 아닌 뾰족뾰족한 이빨이 엿보이며, 작은 불꽃이 뿅하고 튀어나왔다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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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 덕분에 슬슬 자다 깬 꼬맹이에서, 꽃단장한 꼬맹이 수준까지 올라온 이그나투스가 머쓱하다는 듯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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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부터 손님맞이가 형편없어 미안하구나. 부끄러운 말이지만 몸 상태가 조금 좋지 않아서 어쩔 수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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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별로 신경 쓰진 않아. 생각해 보면 나도 아까부터 처음 보는 사이인데 반말로 대하는 중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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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 자하브가 초면인 사람에게 반말은 무례한 짓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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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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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는 대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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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몇 번이고 곱씹게 되는 주제였기에 슬슬 감이 잡혀가고 있다. 하여, 내가 생각한 자하브스러움을 조금 발휘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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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은 사람이 아니니까 괜찮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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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가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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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이그나투스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기 위해 조용히 있던 카렌이 기겁을 하며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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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 또한 경악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지만……정작 이그나투스 본인은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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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자하브는 시간이 지나도 자하브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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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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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자하브는 대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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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웃음을 짓는 사이. 이그나투스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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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해해 주어 고맙구나. 허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 계약 내용부터 확실히 하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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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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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대답을 듣자마자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허공을 긋는 이그나투스. 그 간단한 움직임에 어마어마한 마나가 요동치더니, 이내 손가락의 궤적을 따라 허공에 세로로 금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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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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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진 공간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궤짝. 이그나투스의 손짓에 뚜껑이 열린 궤짝 너머로 반짝이는 황금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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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한 100만 골드이니라. 필요하다면 직접 세어도 괜찮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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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걸 어느 세월에 다 세고 있겠어. 여기서는 명예로운 이그나투스 대공의 말을 믿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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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자하브는 제법 달콤한 말을 할 줄 아는구나. 혹시 그대도 이 몸을 노리는 것이더냐? 아쉽지만 포기하거라. 이 몸은 자하브와 달리 무의미한 번식 활동에 흥미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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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예전에는 좀 더 어른스러운 몸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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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예나 지금이나 이 몸은 그대로다만. 아, 뿔과 꼬리가 좀 더 굵어지긴 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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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 자평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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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과 좋은 승부가 될 법한 키. 그리고 카렌보다도 안쓰러운 가슴팍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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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100만 골드를 지불할 능력이 있다는 건 확인했으니 됐어. 필요한 건 강력한 용아병을 만들기 위한 내 아기씨……정액이지? 양은 얼마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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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병에 가득 채울 정도면 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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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허공을 열어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는 이그나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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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가득 채워야 하는 건가……좀 많긴 하지만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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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조건이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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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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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지만 이 근방에는 창녀가 없느니라. 서부는 전장이며, 마탑은 전초기지. 여기에 거주하는 이는 전부 이 몸이 가르치고, 이 몸을 따르는 이들이니, 아무리 필요한 일이라지만 자하브의 손에 망가지게 두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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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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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혼자 해결하려 했다는 말을 하려던 순간. 이그나투스의 오동통한 꼬리가 꿈틀거리더니, 그 끝에 무언가를 휘어감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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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이걸 사용하거라. 이 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착정 마도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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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투명한 재질. 원통형의 생김새에서는 부들부들해 보이면서도 묘한 단단함이 느껴지며, 한쪽 끝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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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완전 오나홀이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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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랑이는 꼬리로 저걸 쥐고 있으니 엄한 상상이 마구마구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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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판타지 세상에서 이런 걸 볼 줄은 몰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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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웃음만 짓고 있자니, 이그나투스의 자랑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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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말거라. 온도 유지 마법, 69가지의 진동 패턴, 그리고 약간의 환상 마법까지 걸어 두었으니 아직 시험해 본 적은 없지만 제법 쓸만할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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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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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손으로 해결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런 생각으로 이그나투스의 특제 마도구를 받아들려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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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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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느껴지는 흉흉한 존재감. 실내에 있음에도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굉음에 반사적으로 전투태세를 취하며 감각을 일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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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건 나만 그런 것이 아닌지, 시종일관 늘어져 있던 이그나투스 또한 몸을 벌떡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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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손님을 맞이하는 도중이라니.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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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을 푸욱 내쉬며, 처음 보는 곧은 걸음으로 창문 쪽으로 향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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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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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창문을 열어 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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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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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투신에 다급히 창문 쪽으로 달려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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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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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더니, 창문 너머의 풍경을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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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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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대했던 위엄 넘치는 모습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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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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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가 만들어 준 오나홀이 꾸욱 짓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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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이 쏙 빠지네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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