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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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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서부
텔레포트 게이트를 건넌 뒤.
약간의 이질감 끝에 감았던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잘 왔구나. 본인이야말로 이그나투스 대공. 태양의 후예여, 그대를 초정한 자이니라.”
“……음?”
그리고 발견했다. 위엄 넘치는 레드 드래곤이 아닌, 바닥을 뒹굴거리는 붉은 머리 꼬맹이를.
“이그나투스 대공?”
이게?
눈을 끔뻑이며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생물체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타오르는 불꽃을 닮은 선명한 적발. 뭐로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비싸 보이는 옷.
머리의 양옆으로 길게 솟은 뿔. 이를 중심으로 작은 뿔들이 엮여있는 모습은 왕관을 연상케 하며.
엉덩이 부근에서 살랑이는 꼬리는 붉은 비늘이 촘촘하게 덮인 것이 꽤나 위협적이지만……전체적으로 오동통하고, 실루엣이 뾰족하다기보다 둥글어서 귀엽기 그지없다.
알기 쉬운 드래곤의 특징들. 하지만 이그나투스 대공은 못 해도 제국의 역사만큼 나이를 먹은 존재 아닌가.
그런 사람……아니, 용이 이런 꼬맹이의 모습으로 바닥을 굴러다니며 손님을 맞는다고?
순간 어이가 없었으나, 마탑의 사람들에게는 대수로울 것 없는 평소의 모습이었던 걸까.
메이킨이 한숨을 푸욱 내쉬며 바닥과 물아일체가 되어있는 이그나투스를 번쩍 들어 올렸다.
“스승님. 아무리 피곤하셔도 손님을 누워서 맞이하시면 안 되죠.”
“으으……하지만 의자에 올라가는 것도 슬슬 귀찮단 말이니라.”
“그럼 다른 사형들을 시켜서라도 하셨어야죠.”
“그, 그래도 다른 사람을 전부 물리고 이렇게 혼자 게이트를 열었으니 괜찮지 않느냐.”
“그건 잘하셨지만, 아무튼 다음에는 꼭 의자에라도 앉아주세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주변의 의자에 이그나투스를 앉혀놓는 메이킨.
의자에 앉은 상태로도 추욱 늘어진 모습에 카렌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카렌카렌아. 혹시 서부에는 최대한 편한 자세로 손님을 맞이하는 관습이 있니?”
“아뇨. 그런 건 없습니다. 애초에 메이킨 양도 깜짝 놀라 이그나투스 대공 각하를 의자에 올려두시지 않았습니까.”
“그럼 그냥 귀찮음이 많다거나?”
“그렇지 않을까요? 어쩌면 다른 사정이 있을 수도 있고요. 적어도 저희를 무시하거나 그런 느낌은 아닌 것 같아 보입니다만…….”
그렇게 소곤거리고 있자니, 거의 드러눕다시피 의자에 걸터앉은 이그나투스가 입을 열었다.
“이거 손님들 앞에서 미안하게 됐구나. 허나,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라.”
“으음. 다 들렸나 보네.”
“이래 보여도 귀는 좋은 편이라 말이지.”
그리 말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는 이그나투스. 덕분에 누워있을 때는 몰랐던 그녀의 전신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평범한 의자에 앉았을 뿐인데, 발이 닿지 않을 정도의 단신. 하지만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땅에 닿을 정도로 길었으며.
메이킨이 빠르게 정돈해 주는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이목구비는 조각상처럼……아니, 이 세상 존재가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다.
소녀와 여인. 그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어중간한 매력이 아닌 양쪽의 매력을 전부 품고 있는 얼굴.
하지만 그보다도 더 시선을 뗄 수 없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
머리카락만 해도 선명한 붉음을 품고 있다고 여겼거늘, 이그나투스의 눈동자는 그 이상이었다.
루비, 불꽃, 리얼 레드 등등.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채도 높은 붉은색을 나타내는 단어를 떠올렸으나.
그 중 무엇 하나 이그나투스의 눈동자를 온전히 표현하지는 못하리라.
파충류의 그것처럼 세로로 갈라진 동공이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리고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휘어진다.
“당대의 자하브가 선조 회귀에 가까운 수준으로 혈계능력을 각성했다더니……그 말이 사실인가 보구나.”
“그게 눈으로 보여?”
“혈계능력 자체가 보이는 것은 아니니라. 그저 체내에 품고 있는 마나의 성질과 순도를 느낄 뿐이니라.”
“과연. 다른 자하브들과 비교하면 어떤데?”
“다른 자하브들과 비교해서 말이느냐?”
그리 말한 이그나투스가 당장이라도 꾸벅거리며 졸 것 같은 나른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적어도 최근 500년간 보아온 자하브들과는 비교가 안 되겠군. 그전과 비교하면……순도만 따지면 샤메스. 아, 자하브의 시조이니라. 샤메스와 비슷한 것 같다만, 마나량은 다른 후예들에 비해 조금 부족하구나.”
“마나량이……부족하다고?”
미친 연금술사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먹었던 영약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었고, 이후에도 여러 인체실험의 부작용을 잠재우기 위해 여러 영약을 마구잡이로 퍼먹었다.
칼립소의 흑마법사 지부를 박살 내고, 암살자 길드를 조지며 나온 영약 중 나와 극상성인 것들과 동료들에게 줄 분량을 제외하면 전부 퍼먹었고.
정보상이나 브로커, 때로는 용병들에게 돈을 주고 영약을 구하기도 했다.
실제로 마나 다루는 법은 잘 모르는데, 마나량이 너무 많아서 종종 마나가 꼬이며 내상을 입었던 적도 있으니 말 다 했지.
그런 내가 마나량이 적다니.
순간 무한한 마나를 생성한다는 드래곤 하트를 가진 입장에서 작아 보인다는 소리인가 싶었으나, 분명 다른 자하브들과 비교했을 때 적다고 했다.
어이가 없어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이그나투스가 픽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너무 자존심 상해하지 말거라. 보아하니 아직 어린 것 같은데, 나이가 어리면 당연히 쌓은 마나도 적을 수밖에 없지.”
“그……런가.”
즉, 초대부터 500년 전까지의 자하브는 순 괴물 딱지였다는 소리인가.
솔직히 별로 체감이 안 되긴 했지만, 제벨라에게 들었던 이야기처럼 자하브의 혈통이 열화된 것 자체는 사실인 모양이다.
……그리고 이그나투스가 나와 자하브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뭐어. 태양과 불꽃의 차이를 말하라고 하면 나도 잘 모르겠지만.
기껏해야 규모와 온도밖에 생각나지 않는단 말이지.
약간의 실망감이 차올랐을 무렵. 이그나투스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으음. 이렇게 자세히 보니 다른 자하브들과 조금 느낌이 다른 것도 한데…….”
“……!”
“하기야. 이 정도로 시간이 흘렀으면 아무리 후손이라도 조금 변하기도 하겠구나.”
슬쩍 눈으로 보는 정도로는 정말 구분 못 하는 모양이다.
마나에는 누구보다도 민감할 터인 드래곤이 이렇게 반응한다는 건, 사실상 평범한 방식으로는 구별할 수 없다는 소리.
보다 전문적인 방식으로 깊게 파고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애초에 그 정도로 의심받는 상황이 되면 어차피 뭘 하건 들킬 수밖에 없겠지.
이걸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속으로 한숨을 푸욱 내쉬던 도중이었다.
“하아암…….”
돌연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하는 이그나투스. 사람의 것이 아닌 뾰족뾰족한 이빨이 엿보이며, 작은 불꽃이 뿅하고 튀어나왔다가 사라진다.
메이킨 덕분에 슬슬 자다 깬 꼬맹이에서, 꽃단장한 꼬맹이 수준까지 올라온 이그나투스가 머쓱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까부터 손님맞이가 형편없어 미안하구나. 부끄러운 말이지만 몸 상태가 조금 좋지 않아서 어쩔 수 없느니라.”
“뭐어. 별로 신경 쓰진 않아. 생각해 보면 나도 아까부터 처음 보는 사이인데 반말로 대하는 중이었고.”
“뭣? 자하브가 초면인 사람에게 반말은 무례한 짓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게냐……?”
“……?”
자하브는 대체 뭘까.
요즘 들어 몇 번이고 곱씹게 되는 주제였기에 슬슬 감이 잡혀가고 있다. 하여, 내가 생각한 자하브스러움을 조금 발휘해 보기로 했다.
“드래곤은 사람이 아니니까 괜찮지 않나?”
“가, 가주님?!”
나와 이그나투스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기 위해 조용히 있던 카렌이 기겁을 하며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메이킨 또한 경악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지만……정작 이그나투스 본인은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자하브는 시간이 지나도 자하브로구나.”
“…….”
진짜 자하브는 대체 뭘까…….
헛웃음을 짓는 사이. 이그나투스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해해 주어 고맙구나. 허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 계약 내용부터 확실히 하자꾸나.”
“좋지.”
내 대답을 듣자마자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허공을 긋는 이그나투스. 그 간단한 움직임에 어마어마한 마나가 요동치더니, 이내 손가락의 궤적을 따라 허공에 세로로 금이 간다.
쩌적-
갈라진 공간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궤짝. 이그나투스의 손짓에 뚜껑이 열린 궤짝 너머로 반짝이는 황금이 보였다.
“약속한 100만 골드이니라. 필요하다면 직접 세어도 괜찮으니라.”
“아니. 저걸 어느 세월에 다 세고 있겠어. 여기서는 명예로운 이그나투스 대공의 말을 믿어야지.”
“……당대의 자하브는 제법 달콤한 말을 할 줄 아는구나. 혹시 그대도 이 몸을 노리는 것이더냐? 아쉽지만 포기하거라. 이 몸은 자하브와 달리 무의미한 번식 활동에 흥미가 없으니.”
“혹시 예전에는 좀 더 어른스러운 몸이었나?”
“으음? 예나 지금이나 이 몸은 그대로다만. 아, 뿔과 꼬리가 좀 더 굵어지긴 했느니라.”
“아오, 자평 진짜…….”
카렌과 좋은 승부가 될 법한 키. 그리고 카렌보다도 안쓰러운 가슴팍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아무튼 100만 골드를 지불할 능력이 있다는 건 확인했으니 됐어. 필요한 건 강력한 용아병을 만들기 위한 내 아기씨……정액이지? 양은 얼마면 되나?”
“이 병에 가득 채울 정도면 되겠구나.”
마찬가지로 허공을 열어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는 이그나투스.
이걸 가득 채워야 하는 건가……좀 많긴 하지만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리라.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조건이 있느니라.”
“뭔데.”
“미안하지만 이 근방에는 창녀가 없느니라. 서부는 전장이며, 마탑은 전초기지. 여기에 거주하는 이는 전부 이 몸이 가르치고, 이 몸을 따르는 이들이니, 아무리 필요한 일이라지만 자하브의 손에 망가지게 두겠느냐.”
“……아니,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는데.”
그냥 혼자 해결하려 했다는 말을 하려던 순간. 이그나투스의 오동통한 꼬리가 꿈틀거리더니, 그 끝에 무언가를 휘어감아 내밀었다.
“대신 이걸 사용하거라. 이 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착정 마도구이니라.”
반투명한 재질. 원통형의 생김새에서는 부들부들해 보이면서도 묘한 단단함이 느껴지며, 한쪽 끝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있었다.
……이거 완전 오나홀이잖나.
살랑이는 꼬리로 저걸 쥐고 있으니 엄한 상상이 마구마구 피어오른다.
설마 판타지 세상에서 이런 걸 볼 줄은 몰랐는데.
헛웃음만 짓고 있자니, 이그나투스의 자랑이 이어졌다.
“걱정 말거라. 온도 유지 마법, 69가지의 진동 패턴, 그리고 약간의 환상 마법까지 걸어 두었으니 아직 시험해 본 적은 없지만 제법 쓸만할 것이니라.”
“그, 그러냐…….”
아무튼 손으로 해결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런 생각으로 이그나투스의 특제 마도구를 받아들려던 순간.
—————!!
바깥에서 느껴지는 흉흉한 존재감. 실내에 있음에도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굉음에 반사적으로 전투태세를 취하며 감각을 일깨웠다.
그리고 이건 나만 그런 것이 아닌지, 시종일관 늘어져 있던 이그나투스 또한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필이면 손님을 맞이하는 도중이라니.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한숨을 푸욱 내쉬며, 처음 보는 곧은 걸음으로 창문 쪽으로 향하더니.
덜컥.
그대로 창문을 열어 몸을 던진다.
“엉?”
갑작스런 투신에 다급히 창문 쪽으로 달려갔지만.
화아악!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더니, 창문 너머의 풍경을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 가득 채웠다.
“오.”
내가 기대했던 위엄 넘치는 모습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말랑.
이그나투스가 만들어 준 오나홀이 꾸욱 짓눌렸다.
……기운이 쏙 빠지네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