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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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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저점매수

자잘한 것들이 아닌, 고위 흑마법사를 쓰러뜨린 건 좋다.

놈들이 던전 역류를 직접 일으킬 능력은 없다는 걸 안 것도 좋다.

하지만 순수하게 티배깅과, 내 죽음(아님)에 분노해 목숨을 걸어준 유리아를 위해 일종의 쇼맨십이 생중계되고 있었던 건 문제다.

“카렌아……나는 나약하고 병든 사람이다.”

“요즘 나약하고 병든 사람은 몬스터 수준으로 변이된 사람을 맨손으로 찢나 봅니다.”

“들어보렴. 육체적인 힘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밤마다 나는 복수라는 허상에 사로잡혀 껍데기뿐인 목표에 시선을 빼앗기고, 돌아가지 못하는 과거를 향해 끝없이 발을 옮기는 망령에 불과하단다.”

“농담도 잘하시네요. 어제도 자하브의 식량 창고를 거덜 낼 기세로 고기만 골라 드시고는, 배를 까놓고 시끄럽게 코 골면서 주무시지 않았습니까. 배불리 먹고, 푹 잔다. 저는 이만큼 속 편한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뭐야. 나 코 골아? 아니 애초에 내가 코 골며 자는 건 어떻게 알았니? 설마…….”

“주인의 건강을 염려하는 것은 집사의 덕목이라 그런 것일 뿐이니, 오해하지 말아 주시길.”

“…….”

대체 무슨 착각을 하는 거냐는 듯, 별꼴 다 보겠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이며 이쪽을 훑어보는 카렌.

이 와중에 무표정을 유지하는 것이 참 꼴받았다.

“……조용히 하고 마저 들어. 어디 보자. 어디까지 말했더라?”

“으븝. 읍읍.”

“자기 손으로 입 막지 말고 그냥 말해도 돼.”

“예. 돌아가지 못하는 과거를 향해 방황하는 망령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가주님.”

“맞아 그랬었지. ……그런데 이다음이 뭐였지?”

“그걸 저한테 물으셔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눈을 끔뻑이는 카렌.

사실 조금 전의 말은 전생의 내가 지구에서 뒹굴거리며 읽었던 인터넷의 뻘글의 일부다.

대충 엄청 수려한 문장으로 헛소리하는 내용이었는데…….

아쉽게도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그사이에 까먹은 모양이다.

잠시 떠올리려 고민했으나, 여전한 막막함에 그냥 결론만을 말했다.

“카렌카렌아.”

“네.”

“오직 네 볼따구만이 정신적으로 지친 나를,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단다.”

“또 그 소리십니까…….”

한숨을 푸욱 내쉰 카렌이 무언가 작성하던 수첩을 잠시 덮고는 말을 이었다.

“대체 왜 그렇게 제 볼을 주무르려고 하시는 건가요.”

“원래 사람은 말랑말랑한 걸 만지면 기분 좋아져.”

“예를 들면 여자의 가슴 같은 것 말인가요?”

“어? 어……그렇지?”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않았던 터라 순간 버벅이는 목소리. 하지만 정작 스트레이트를 날린 카렌은 태연한 어조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으음. 그랬군요. 가주님의 취향은 가슴이 말랑한 여성…….”

“그런 건 또 뭐 하러 기억하는 거냐?”

“그야 슬슬 가주님의 반려분을 물색해 보아야 할 시기니 말입니다.”

“제벨라 누님은 어쩌고?”

“두 번째 반려를 말하는 겁니다.”

“두 번째라니…….”

그럴 생각은 없고, 상황이 찾아오기 전에 어떻게든 몸을 뺄 생각이지만 아무튼 일단 나는 제벨라와 약혼 상태다.

그런데 벌써부터 다음 아내를 찾는다고? 이게 맞아?

어이가 없어 카렌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가 눈을 끔뻑이며 똑같이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서로 눈동자를 바라보며 끔뻑이기를 반복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입을 벌리는 카렌.

“아. 최근 가주님께 혼담이 많이 들어와서 일차적으로 거를 필요가 있었을 뿐입니다. 지금 당장 들이자는 의미가 아니라요.”

“역시 그렇지? ……잠깐. 혼담? 갑자기? 왜?”

“그야 일전에 가주님께서 보여주신 위업은 이미 제국 전역에서 유명하니 당연한 일 아닙니까. 당연히 혼담이 쏟아질 만하죠. 순수하고 강력한 피를 원하는 귀족은 얼마든 있으니 말입니다.”

“진짜 왜?!”

백 보 양보해서 자하브령에서, 혹은 남부에서 유명해진 건 이해하겠다.

하지만 제국 전체에서? 대체 어떻게? 무슨 수로 알고?

어이없어하는 내 모습에 카렌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전투의 피로로 눈치채지 못하셨던 건가요. 그 자리에는 자하브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아카데미의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이게 뭔.”

그러니까 내가 아무도 안 볼거라 생각하고 폼 잡으며 했던 모든 언행을 자하브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제국 각지에서 뽑힌 유수의 인재들도 봤다는 거지?

그걸 또 쪼르르 달려가 본가에 알렸고, 그 탓에 제국의 이름있는 귀족들 대부분이 내가 흑마법사 상대로 반쯤 정신줄을 놓고 싸우는 모습이나, 부활(아님)을 했다는 걸 알고 있다는 소리잖아.

음음. 무슨 상황인지 완벽히 이해했어.

“카렌.”

“네?”

“명령이야. 볼따구 이리 대.”

“……읏!”

명령이라는 말에 움찔한 카렌. 이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는 느릿하게 이쪽으로 향해 얼굴을 들이민다.

눈을 질끈 감은 것이 표정 변화가 드문 카렌에게서는 보기 힘든 얼굴이다.

그대로 카렌의 양쪽 볼을 잡고 천천히 잡아당긴다. 저항 없이 쭉쭉 늘어나는 뺨.

이 맛이지. 드디어 좀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네.

카렌을 번쩍 들어, 마주 보는 자세로 무릎 위에 앉혀놓고는 마구 볼따구를 주무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죽었다 살아났다고 착각할 만큼 강한 혈계능력을 보유한 나를 향해 쏟아지는 무수히 많은 악수의 요청.

뭐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나도 모르고 있었지만, 내게는 귀족의 피가. 그것도 상상 이상으로 진하게 흐르고 있던 모양이니까.

하지만 그게 자하브의 것은 아니다.

애초에 내가 지닌 대부분의 힘은 인체실험을 통해 강제로 얻거나, 따로 죽어라 단련해 손에 넣은 것.

혈계능력을 타고난 것으로 보이는 건 분명 형님이었다.

사실 나도 또 다른 자하브의 혈족이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였다던가.

좀 정신 나간 생각인 것 같지만, 형님이 갑자기 혈통의 어두운 비밀에 눈을 떠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나를 낳았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야 나는 흑마법사 조직에 팔려 갈 때까지 지구에서의 기억을 제외하면 평범한 아이였으니까.

근친으로 만들어진 농후한 자하브의 핏줄을 타고났다고 하기에도 문제가 많은 것이.

일단 나이만 어렸지, 머리는 그대로인 내게 어머니와 형님은 그냥 평범한 모자 관계로 모였다는 것.

무엇보다 나와 형님의 나이 차이가 고작 1살밖에 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내가 귀족 혈통일지는 몰라도 자하브가 아니라는 건 확정이라는 뜻.

그런 상황에서 내게 전국적인 관심이 쏠리는 것은 영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이다.

언젠가 실각당해 내려와야 한다면 더더욱 그러하고.

하지만 핀치는 찬스. 위기란 곧 기회의 다른 이름인 법 아니겠는가.

자하브의 남자가 전부 죽었다는 소식에 유리아의 아카데미 생활이 꼬였듯.

‘남자가 없어 어떻게든 찾아서 가주로 내세운 사생아가 너무 강함’이라는 소식은 다른 이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겠는가.

분명 저점 매수의 기회처럼 보이겠지.

자하브는 제국의 4대 대공 가문이라 불릴 정도의 명문. 하지만, 최근의 연속된 던전 역류를 막느라 재정적, 군사적 어려움을 겪고 있고.

이제 막 가주직에 오른 신임 자하브 대공은 사생아 출신이라 배운 것이 없고, 내부에서의 균열도 적잖이 있겠지만…….

대신 지닌 힘은 무시할 수 없으니, 자하브의 권세가 약해진 지금 연을 맺어두면 나중에 더 큰 이득이 되어 돌아올 거라 여기는 것이다.

그래. 내게 혼담을 보내오는 귀족들은 지금 당장의 이득이 아니라, 언젠가 찾아올 미래의 떡상을 믿고 내게 투자하려는 것이다! 전생의 내가 처음 주식할 때처럼……!

그리고 전생의 나처럼 무릎에서 산 게 아니라, 사실 어깨에서 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으흐흐.”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마구 만지작대던 카렌의 볼따구를 놓아주었다.

“카렌카렌아.”

“……네.”

“혼담 그거 다 취소해.”

“네?”

“대신 자하브와 연을 맺고 싶다면 친구비를 내라 그래. 당연한 말이지만 많이 내는 만큼 우정이 깊어질 거라는 말도 덧붙이고.”

“친구……말씀이십니까?”

“어. 친구비만 내면 다 친구지 뭘.”

가볍게 대답했건만, 어째서인지 카렌이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제벨라 아가씨께, 아카데미의 학생들에게, 그리고 서신을 보내오신 모든 귀족가에 그리 전하겠습니다.”

“응? 어, 응.”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는 총총걸음으로 멀어지는 카렌의 뒷모습에 씨익 웃어 보였다.

좋아. 이제 남은 건 돈은 받아먹었으면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만 남았다.

나도 바보는 아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내가 뭔가 의도적으로 조지려 하면 오히려 역효과로 좋은 결과만 나온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돈은 받았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자연스레 불만이 쏟아질 테고, 이는 고스란히 나의 평판 문제로 이어질 터.

그렇게 내 주가는 알아서 떡락한 끝에, 최종적으로는 상장폐지에 이를 것이다……!


에녹의 계획 자체는 합리적이었으나, 문제는 그가 생각치 못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는 점이다.

우선 아무도 자하브에게 품위라던가, 신의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

친구비? 심심하면 근처 영지 삥 뜯는 건 자하브의 오랜 전통이었다. 빌린 돈을 갚으라고 했더니 협박이 날아오는 건 연례행사고.

그럼에도 자하브와 연을 맺으려던 가문이 항상 존재해 온 이유는 간단하다.

귀족 사회에서는 대공 같은 최고위 귀족의 이름을 빌린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기 때문.

헌데, 에녹은 친구비를 받으면 자하브와의 친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금액에 따라 줄까지 세워주겠노라 한 것 아닌가.

돈을 받은 뒤에는 침묵할 뿐, 너네 돈 좀 많아 보인다? 같은 소리를 하며 더 내놓으라고 깽판을 부리지도 않았고.

애초에 고위 귀족과의 연을 트기 위해서는 막대한 뇌물이 필요하단 것은 이 세계의 상식.

그런 의미에서 에녹은 암암리에 이루어지던 것을 양지로 끌어 올려 공정한(?) 경쟁을 시킨 것뿐이다.

무엇보다 이전 세대의 자하브였다면 여식도 받아 가고, 지참금 명목으로 돈도 뜯어갔을 터.

에녹은 다 필요 없고 순수하게 돈만 내놓으라고 하는 셈 아닌가.

당연히 상대적으로 에녹의 평가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아득히 뛰어넘는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시조를 넘어선 자, 다시 떠오르는 태양을 품은 사내, 흑마법사들이 두려워하는 대적자……그런 사람이 돈만 주면 친구가 되어준다고요?”

제국에는 돈이라면 썩어 넘치도록 쌓은 집단. 마탑이라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

“당장 스승님께 연락해야 해요!”

그리고 마탑에는 해결하지 못한 오랜 문제가 하나 있었다.

어쩌면 새로운 친구가 이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은가.

공문을 읽던 아카데미 소속의 유망한 마법사 소녀가 한참의 고민 끝에 명상 중이던 자신의 룸 메이트에게 물었다.

“유리아. 자하브 대공 각하……그러니까 너네 오빠는 어떤 사람이야?”

“내 남편임.”

“?”

“아, 형부기도 하고.”

“???”

뭐, 그렇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