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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말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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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으로, 현실의 여성에게 혐오와 환멸을 느껴 직접 이상형을 조각한 남성이다. 심지어 그 조각상과 결혼하고 아이까지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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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여신의 도움이 있었다고 한들, 기본은 돌덩이인 육체와 성관계를 나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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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굳이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아마 아프로디테가 조각상을 사람이랑 똑같은 형태로 만들어준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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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자동인형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기야 했다만, 솔직히 말해서 그리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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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신화 속에 등장하는 그가 신비라는 형태로 세상에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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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발견된 곳은 김포의 공공 화장실 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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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을 옮기며 김이서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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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망치 소리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경찰이 현장에 찾아갔습니다만, 그 자리에서 대부분 살해당했습니다. 그 후에 관리국으로 사건이 이전되었죠. 발견된 게 비교적 최근이라, 제법 자세히 기억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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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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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들의 사인은 조각상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피그말리온이 망치를 후려치는 순간, 조각상이 되어 박살 나 사망했습니다. 당연히 피나 장기 같은 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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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난폭한 신비인 모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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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또 아닙니다. 피그말리온은 온화한 성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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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왼쪽으로 코너를 꺾었다. 지나가던 격리팀 직원들이 그녀를 향해 인사를 건네주고, 김이서도 적당히 받아주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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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성에겐 가차 없습니다. 원본 피그말리온 또한 현실의 여성은 혐오했으니까요.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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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같은 남성이면 문제없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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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현장에서 사망한 경찰도 전부 여성이었습니다. 애초에 피그말리온 자체가 여자 화장실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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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한 연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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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릅니다. 여타 다른 신비가 그렇듯, 그 자리에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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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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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서가 발걸음을 멈추고 한 격리실 앞에 섰다. 이안이 그녀의 뒤에서 격리실 문 옆에 달린 명패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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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말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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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한 회색빛으로 적힌 명패. 돌가루가 살짝 떨어지는 것을 보아하니 괴이의 성격에 맞게 조각으로 장식한 모양이다. 아마 이것 또한 놈을 격리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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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옆에 달린 창문 사이로 미세한 물 냄새가 풍겨왔다. 슬쩍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니 방의 가장자리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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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많은 양은 아니지만, 적당히 운치를 즐길 정도는 되는 수류. 김이서는 격리실 옆에 쌓여있는 마스크를 꺼내 착용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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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말리온은 관리국 내부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인간에게 친화적인 괴이입니다. 다만 아시다시피, 모든 신비는 결과적으로 인간에게 해롭습니다. 그 또한 마찬가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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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의 중앙에는 상아로 이루어진 남성 형태의 조각상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조각상은 돌망치와 못을 들고 진열장 위에 놓인 누군가의 얼굴을 새롭게 조립하는 중이었다. 바닥으로 돌가루가 후드득 떨어지고, 흐르는 물을 타며 그것들이 배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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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말리온과 대화할 수 있는 최장 시간은 20분입니다. 그 이상을 넘어가면 피그말리온이 영감을 얻고, 남녀 상관없이 상대방을 ‘조각’하려 듭니다. 물리적인 파괴가 불가능한 개체이기에, 생존을 위해선 빠르게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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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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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의 조각상을 비난하거나 비평해선 안 됩니다. 굳이 칭찬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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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나누는 20분 동안은 안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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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이라면 안전합니다. 운이 좋다면 그가 직접 당신을 위해 조각상을 만들어줄 수도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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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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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상을 만들어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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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에는 굉장히 꺼림칙하지만, 관리국피셜 운이 좋다고 말할 정도라면 최소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 받아서 마법으로 분해하거나 재창조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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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은 김이서가 건네주는 마스크를 착용하며 조각에 열중하고 있는 피그말리온을 돌아보았다. 아직 그는 두 사람을 인식하지 못한 것처럼 느릿느릿 망치를 휘둘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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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 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질 때마다 미약한 피 냄새가 수향(水香)에 섞여 풍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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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하는 덩어리 중 일부가 본래 사람이었기 때문에 번져오는 향이었다. 카르텔을 통해 조달하는 시체나 사형수의 몸뚱어리 중 일부는 저곳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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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놀랍지도 않은 사실이었다. 카르텔이 취급하는 품목 중에서 가공한 인간의 살점이나 장기, 혹은 통째로 된 시체 하나가 있다는 것쯤이야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들과 나름 협력 관계를 구축한 관리국이 카르텔의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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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그들이 어떻게 시체를 가져 왔는지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대신, 괴이와의 직접적인 대화에 호기심이 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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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신비랑 긴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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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척귀신? 그 자리에서 팔을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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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안타깝게도 이안은 원숭이보다 진화된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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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그 구울보다 강한 괴물들이 언어 체계를 가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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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파크에 있는 직원들과는 대화를 조금 나눠보기는 했지만, 그건 전부 공간에 어울리는 문답이 전부였다. 병원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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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도서관에서 사서와 제법 긴 대화를 나눠보았지만, 그때 그의 상태는 사실상 유치원생과 다를 바가 없었다. 멀쩡한 상태의 신비는 결코 아니었다. 크루즈의 선장 또한 신비보단 신비와 결합한 인간에 더욱 가까운 형태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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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굳이 따지자면 이번이 신비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는 첫 번째 기회였다.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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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분 동안 안전하다면 괴이랑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데,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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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이 마도서를 까딱이며 물었다. 김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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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합니다. 다만 저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일단은 여성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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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상관없어. 내 몸 정도야 혼자 지킬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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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그럼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문제가 생긴다면 이걸 꾹 눌러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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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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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방범 벨처럼 생긴 물건을 이안에게 내밀었다. 흔히 미성년자들이 차고 다니는 그 벨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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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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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벨을 받아 들었다. 생긴 건 좀 그래도, 안전 수단을 하나 주겠다는데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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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법은 그냥 누르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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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사용하면 마법사님 주변으로 다가오는 모든 유기물과 무기물들의 속도가 굉장히 느려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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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어린이 보호구역 괴이 같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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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 짚으셨습니다. 비슷한 원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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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밖에 안 나왔다. 이안은 한숨을 푹 내쉬며 벨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격리실의 출입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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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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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저항 없이 문이 옆으로 열렸다. 그와 동시에 화악 풍겨오는 돌과 피, 그리고 물 냄새. 이안은 잠깐 걸음을 멈췄다가, 마도서를 펼치기 쉽게 잡으며 천천히 피그말리온을 향해 다가갔다. 몇 걸음 가지 않아 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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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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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매끈한 벽이 전부다. 아무래도 내부에서 외부를 볼 수 없도록 조처를 해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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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합리적인 방비였다. 이안은 숨을 길게 토해내며 격리실의 이중문을 열고, 본격적으로 피그말리온의 작업실에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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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굴러다니는 돌가루가 신발에 밟혔다. 그와 동시에 피그말리온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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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의자에 앉아서 기다려라. 이번 작업만 끝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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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조각상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두꺼웠고, 또한 깨끗했다. 평범한 사람과 다른 점은 살짝 끊어지듯이 들린다는 게 전부였다. 나머지는 사람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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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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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은 그의 말을 굳이 거스르지 않고, 적당히 벽에 기대어 서서 그를 기다렸다. 피그말리온의 고개가 순간 그를 향해 돌아갔다가 다시 조각으로 기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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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조각의 마무리 작업을 마친 그가 망치를 테이블에 놓아두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움직이는 대로, 육체를 형성하고 있는 그의 조각상 몸뚱이가 바스러졌다가 다시 재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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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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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를 마치고, 피그말리온이 이안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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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마법사께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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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그덕삐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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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이안 근처로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안은 손에 쥔 마도서의 표지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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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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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대화. 좋지. 여성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남성이라면 누구든지 환영이다. 취향이 어떻게 되지? 얼굴은 예쁜 편을 선호하나? 아니면 추한 편? 몸매는? 가슴과 엉덩이는 역시 큰 게 좋나? 털은 무조건 없어야 할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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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더욱 천박한 내용의 대화 주제가 튀어나왔다. 이안의 얼굴이 순간 구겨졌지만, 그는 근처에 진열된 조각상을 들여다보며 대충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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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매는 아무래도 좋아. 얼굴만 예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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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는 말이군. 결국 궁극적인 아름다운 얼굴이니까. 그래서 나 같은 조각사들이 얼굴을 세심하게 깎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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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쾌활하게 웃으며 구석에 놓아둔 조각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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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보이나? 아프로디테 님의 외형을 본떠서 만든 조각상인데, 내가 깎은 모든 조각상 중 저게 가장 아름답지. 그래서 밤마다 생명을 불어넣어 진짜 아프로디테 님처럼 움직이게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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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원본 피그말리온의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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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제 신화에서 그가 만든 조각상이 여신의 힘 덕분에 생명을 얻은 반면, 피그말리온 괴이는 직접 자신의 힘으로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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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보다 훨씬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괜히 관리국에서 그를 이리 붙잡아 놓고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이안은 침음성을 흘리며 벽에서 몸을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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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언제부터 존재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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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잘 모르겠군. 그런 걸 생각하며 사는 성격은 아니라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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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말리온이 큭큭 웃으며 손가락 사이로 못을 돌려댔다. 그의 관절이 움직일 때마다 돌가루가 후드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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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음. 널 보고 있으며 영감이 마구 샘솟는군. 아주 오랜만에 보는 훌륭한 모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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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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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다시피, 나는 이 세상에서 얼굴을 가장 중시한다. 다른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얼굴이 제일 중요하다는 뜻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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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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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점에서 네 얼굴은 제법 훌륭하군. 하지만…… 괜히 마법사를 자극할 필요는 없겠지. 네 얼굴을 조각하는 일은 피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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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말리온이 아쉽다는 듯 입술을 핥으며 못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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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영감을 주기는 했으니 나도 한 가지 보답하겠다. 원하는 모델을 말하면 그 형태 그대로 깎아주지. 원한다면 생명도 넣어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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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다. 하지만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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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입장하기 전에, 그가 원하는 조각상을 만들어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참이다. 가져가서 재창조 마법으로 이리저리 굴려보면서 연구할 가치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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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그럼 하나 부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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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이 작게 웃으며 마도서를 손으로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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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지닌 작은 소녀.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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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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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묘사가 누구를 그리는 건지 깨달은 심해견문록이 짧게 진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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