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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겠습니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하지만 전쟁터에 침묵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
혼돈의 와중에도 시스템은 돌아가야만 했다.
이민재는 환자에게 시술을 진행하는 미친놈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자신은 뒤편의 시스템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이민재는 떨고 있는 박성정에게 속삭였다.
“1년 차.”
“네, 선생님!”
“기록. 시간대별로 들어간 약물들이랑 수액 종류랑 양 다 기록됐어? 지금부터는 초 단위로 적어. 내가 하는 모든 말이랑 한현재가 하는 모든 행동, 환자 바이탈의 모든 변화 전부 다. 지금 기록된 건?”
박성정은 거의 울기 직전인 얼굴로 자신이 휘갈겨 쓴 화이트보드를 더듬더듬 읽어 내려갔다.
“그, 내원 시각 09시 14분. 09시 16분부터 NS(생리식염수) 1리터 로딩 시작했고, 09시 18분에 트라넥삼산( 지혈제) 1그램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MTP 발동됐고, 2분 후에 Rh- O형 pRBC 2유닛 수혈 들어갔습니다. STAT으로 나간 랩 결과는 아직…”
“그만하면 됐어.”
이민재는 간결한 브리핑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무너져도 기록은 남겨야 한다.
나중에 우리 목을 살려줄 유일한 동아줄이니까.
그 모든 속삭임과 부산스러움의 중심에서 내 몸의 주인은 오직 한 점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초음파 모니터 속에서 희미하게 박동하는 대퇴동맥의 단면.
그리고 그 위를 덮고 있는 피부와 지방층, 그리고 근육.
메스의신의 왼손은 프로브를 미세하게 움직여 최적의 각도를 찾았고, 오른손에 들린 바늘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숨을 멈췄다.
바로 지금이다.
바늘 끝이 환자의 피부를 뚫고 들어가는 바로 그 순간.
“….”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바늘 끝이 피부에 닿기 직전 그는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왜?
뭐가 문제지?
메스의신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내 이름이 적힌, [응급의학과 한현재]가 적힌 사원증을.
“한… 현재.”
메스의신이 어색하게 내 이름을 읊조렸다.
“그래, 현재야. 미안하다.”
…
……뭐?
뭐가.
뭐가 씨발.
뭐가 미안한 건데 이 미친 귀신 새끼야.
내 머릿속에서 모든 회로가 타버리는 소리가 났다.
미안하다고?
지금?
이 상황에서?
아니지?
내가 지금 생각하는 그거 아니지?
‘미안하다 현재야. 생각해 보니 이건 내 능력 밖의 일인 것 같구나. 괜히 나섰다가 네 의사 인생만 망칠 것 같으니 나는 이만 돌아가겠다.’
…이런 거 아니지?
‘미안하다 현재야. 방금 손이 살짝 미끄러져서 대동맥을 찢어버린 것 같구나. 이 환자는 이제 30초 안에 죽을 것이고 너는 살인자가 될 것이다.’
…이런 건 더더욱 아니겠지?
내 안의 내가 공포와 분노로 절규하는 동안 내 몸의 임시 주인은 진짜 속내를 드러냈다.
“그, 거기. 잠시 조용. 집중 좀 하게.”
…
아.
아니, 이 미친놈이!!!!
나는 깨달았다.
자신의 실패나 환자의 죽음에 대해 사과한 게 아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위급한 상황 속에서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는 이민재와 박성정에게 ‘아가리 좀 닥쳐달라’는 말을 메스의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회성을 발휘하여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내 의사 인생이 성격 파탄 난 귀신의 사회성 훈련 교재로 전락하고 있잖아.
사회성이라는 걸 아예 유전자 단위에서부터 탑재하지 않은 미친놈.
메스의신은 다시 완벽한 집중 상태로 돌아가 모니터와 바늘 끝에 모든 신경을 모으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C-arm이 띄워놓은 흑백의 투시 영상을 응시했다.
환자의 골반뼈와 대퇴골의 윤곽이 유령처럼 희미하게 드러나 있었다.
“방사선사 선생님. 지금부터 펄스로 짧게, 계속 쏴주십시오. 멈추라고 할 때까지.”
“네, 넵!”
방사선사의 긴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삑, 삑, 삑.
짧게 끊어지는 음과 함께, C-arm 모니터의 영상이 실시간으로 깜빡이기 시작했다.
메스의신은 다시 초음파 프로브로 환자의 사타구니를 비췄다.
화면 속에서 대퇴동맥이 검고 둥근 원으로 박동하고 있었다.
그는 바늘을 45도 각도로 눕혔다.
그리고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바늘을 피부 아래로 쑥 찔러 넣었다.
그 움직임에는 내가 채혈할 때마다 겪었던 그 지긋지긋한 망설임이나 손 떨림 따위가 없었다.
어떻게 저런 손을 가진걸까.
난 아직도 채혈을 못…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2년 차 치고는 쪽팔린 손을 가진 게 사실이니까.
피부를 뚫고 지방층을 지나서, 그리고 근막을 통과하는 때의 미세한 저항감.
그리고 마침내 바늘 끝이 모니터 속 혈관의 정중앙을 정확히 꿰뚫는 순간.
바늘 뒤로 선홍색 동맥혈이 작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완벽한 단 한 번의 성공.
그 광경을 본 소생실 구석에서 아주 낮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오….”
몇몇 젊은 의료진들의 입이 경이로움으로 벌어져 있었다.
“저거… 되게 빨리 넣네. 능숙하고.”
“저걸 한 번에 넣어버리네.”
“근데… 근데 이거 원래 외상외과 교수님들이나 영상의학과에서도 인터벤션 담당 쌤들이 하는 거 아닌가….”
“쉿. 조용히 해.”
웅성거리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뒤쪽에서는 이민재가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네, 혈액은행이죠? 응급의학과 이민재입니다. 지금 트라우마 베이 1번에 있는 트라우마 환자, 네, MTP 발동 중인데 좀 늦어서요. 혈액팩 구성 1대 1대 1 비율로 맞춰서 계속 쏴주세요. 농축적혈구, 신선동결혈장, 혈소판. 네. 멈추지 말고 계속 올려 보내주세요. 네.”
“바이탈 BP 52/palpable, HR 168회. 떨어진다. 조심하고.”
한재언의 점잖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메스의신은 그 모든 소음 속에서도 조금의 동요도 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그는 바늘 안으로 끝이 구부러진 얇은 가이드와이어를 스르륵 밀어 넣었다.
C-arm 모니터 위로 가느다란 은색 선 하나가 나타났다.
그 선은 미끄러지듯 나아가고 있었다.
손끝이 계속해서 움찔거렸다.
조심 조심, 아주 작고 미세하게 손가락이 움직였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을 다루듯 혈관 벽이 다치지 않도록 아주 미세하게 와이어의 방향을 조절하고 있다는 뜻이다.
어떻게 이런 미친 짓을 하지.
나는 절대로 이런 쪽 전공은 못 할 것 같다.
이걸 어떻게 해. 이 개 쪼꼬만 실선을 갖다가 혈관에다가 집어넣는 일을 어떻게 사람이 하는 건데.
현대의학 스게.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두가 숨을 죽였다.
C-arm 모니터 위로 가느다란 은색 선 하나가 혈관을 거슬러 올라가는 광경에 소생실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였다.
이 초현실적인 술기의 한가운데서 나는 내 몸의 주도권을 빼앗긴 채 그저 이 모든 것을 1열 VVIP석에서 관람하는 기분을 낼 뿐이었다.
여기 팝콘은 안 파나요.
바로 그때, 소생실 문이 벌컥 열리며 간호사 한 명이 거의 비명을 지르듯 뛰어 들어왔다.
손에는 방금 출력된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A4 용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선생님! STAT으로 나간 랩 결과 나왔습니다!”
그 외침에 이민재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는 종이를 낚아채듯 받아 들고 그 위에 적힌 숫자들을 미친 듯이 훑어 내렸다.
“pH 7.1, 젖산 12, 칼륨 6.5, 헤모글로빈 5.8… 아이고, 완전히 맛이 갔네.”
이민재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는 전화기를 붙들고 있던 다른 손을 놓지도 않은 채, 간호사를 향해 오더를 내리기 시작했다.
“바이카보네이트 두 앰플 지금 당장 IV 라인으로 쏴주고, 칼슘 글루코네이트 한 앰플 준비하자. 혈액은행에는 혈소판이랑 FFP(*신선동결혈장) 비율 맞춰서 계속 올리라고 전해주고.”
그가 미친 듯이 오더를 쏟아내는 동안 내 몸의 주인은 그 모든 소음을 마치 다른 세상의 일처럼 완벽하게 무시하고 있었다.
이 초인적인 집중력은 대체 어디서 얻은 걸까.
나는 그저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내 몸의 주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시선은 오직 C-arm 모니터 속에서 춤추는 가이드와이어에 고정되어 있었다.
와이어는 이제 장골동맥을 지나 복부 대동맥의 하부를 향해 꾸준히 전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민재가 나를 향해, 아니아니, 메스의신을 향해 물었다.
“어디로 갈 거야? 신장 동맥 아래에서 터뜨릴 거지? 골반 출혈이니까. 이제 거의 다 도착했네.”
그 질문은 당연했다.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는 골반에서 철철 나오는 피니까.
합병증 발생율 및 생존율도 가장 낮고.
애초에 Pelvic fracture(* 골반 골절)의 경우 신장 아래에서 터뜨리는 Zone 3 REBOA가 표준으로 여겨진다.
신장이나 장으로 가는 혈류는 최대한 살려둬야 하기에 그런 것이다.
대동맥을 틀어막더라도 최소한의 장기는 살려야 한다는 마지노선.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메스의신의 말은 내가 아는 상식에서 살짝 벗어났다.
“아뇨.”
그는 C-arm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무심하게 대답했다.
“Zone 1에서 터뜨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