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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마지막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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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의학과 의국은 어수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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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이라는 시간을 버텨낸 4년 차 레지던트들이 마침내 떠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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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함에서는 4년 묵은 퀴퀴한 냄새와 함께 낡은 교과서와 짝퉁 크록스, 그리고 정체 모를 영양제 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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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자리에서 그 풍경을 조용히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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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섭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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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 유성훈이 커다란 택배 상자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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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야, 보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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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훈이 자랑스럽게 펼쳐 보인 것은, 오성서울병원이라는 푸른색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갓 배송된 의사 가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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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오성 가운. 어제 딱 배송이 왔거든. 핏이 아주 그냥 죽이지 않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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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훈은 가운을 걸쳐보며 어색하게 맵시를 뽐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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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예. 자랑도 너무 많으면 독입니다 유성훈 선생님. 눈부셔서 눈을 못 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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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쭈? 이 새끼 봐라. 이제 나 다른 병원 간다고 아예 남 취급이네? 서운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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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농담에 나는 손사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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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축하드리는 거죠. 대한민국 최고의 병원으로 가시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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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휴, 쨋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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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훈은 어색한 듯 가운을 벗어 다시 상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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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평소의 그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와 내 어깨를 툭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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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 많았다? 너 같은 놈이 내 근무때 자주 들어왔으면 나도 좀 편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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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저야 이제 고생할 일만 남았죠,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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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1년 차가 제일 힘든 법이야. 그거 버텼으면 나머지도 어떻게든 버텨. 죽이 되든 밥이 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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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유성훈과의 짧은 작별 인사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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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훈은 상자를 들고 의국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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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너머로 유성훈이 응급의료센터 간판 앞에서 잠시 멈춰 서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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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훈은 이내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권역응급의료센터’라는 글자를 살살 만져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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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얼굴에는 후련함과 착잡함이 뒤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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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훈의 모습을 보며 감상에 젖어 있는데, 등 뒤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내 멱살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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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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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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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는 인사 안 해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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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남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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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뭐… 그… 선생님과는 앞으로도 인사를 자주 하게 될 텐데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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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지극히 합리적인 대답에 이민재는 세상이 무너지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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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야! 나는! 우리는! 이 응급실에서 피와 땀을 나누며 뜨거운 심장을 공유하는 전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작 그런 사무적인 인사로 우리의 관계를 끝내려는 것이니! 이 행태는 참으로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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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양반은 당최 감을 잡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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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열정의 반만이라도 시험공부에 쏟았으면 벌써 전국 수석을 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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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로는 전국 5등이었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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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튼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오늘부터 나는 4년 차 선배가 아니다! 임상강사 이민재라고 한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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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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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와 레지던트 사이의 어중간한 존재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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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예… 펠로, 아니. 임상강사 과정 밟으시는 거 참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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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지못해 손을 잡고 억지 축하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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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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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정문 앞에서 유성훈과 이민재가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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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아쉽냐? 아쉬우면 너도 남지 그랬냐. 컴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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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재가 넉살 좋게 놀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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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랄하지 말고. 난 빨리 서울로 올라갈란다. 너나 여기 뼈 묻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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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훈은 그렇게 받아치고는 미련 없이 택시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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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모든 풍경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피식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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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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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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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며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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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에서도 아주 희미하게나마 사람 사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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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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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년 차의 겨울이 가고, 새로운 3월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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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의 공기는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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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치프는 최수민이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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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민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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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야!!! 좋은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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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국 문을 박차고 들어온 이민재의 모습은 여전히 변한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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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직책만이 바뀌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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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강사의 아침은 레지던트의 아침과는 공기의 밀도부터가 다르구나!!! 느껴지느냐! 이 자유의 향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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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재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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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차 치프 시절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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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시끄러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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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정신없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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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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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전문의를 땄다고 사람의 본질까지 크게 달라지는 건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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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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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는 새로운 얼굴들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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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바리한 눈빛의 새로운 인턴들, 그리고 그 인턴 딱지를 갓 떼고 레지던트라는 새로운 계급장을 단 작년의 나와 같은 표정의 새로운 레지던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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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 가지 가장 중요하게 변한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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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장이 아주 조금 바뀌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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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자, 대강 기본적인 설명은 다 들었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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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4년 차가 된 한재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얼어붙어 있는 신규 1년 차 앞에서 팔짱을 낀 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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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수들은 전부 우리 병원에서 인턴 하던 애들이니까 적응은 그나마 좀 낫겠네. 병원 구조나 EMR 사용법 같은 기초적인 건 안 가르쳐줘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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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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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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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언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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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너희들을 주로 가르치고, 갈구고, 이끌어줄 사람은 저기 앉아있는 한현재 선생이다. 너희들 뭐 궁금한 거 있으면 무조건 한 선생한테 먼저 물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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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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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마시며 구경하던 나는 갑작스러운 지명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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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 바로 위 1년 선배이기도 하고, 작년에 뭐 소문이 많긴 했거든? 혼자 내과 더블보드를 준비하네, 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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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 선생님…? 그건 그냥 헛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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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하려 했지만 한재언은 내 말을 가볍게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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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뭐 실제로도 머리에 든 건 많아. 혼자 뭘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는지. 가끔은 우리 같은 고년차들보다 진단은 더 잘 볼 때도 있고. 쨋든 뇌때가리는 큰 것 같으니까 모르는 거 있으면 자주 조언 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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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과찬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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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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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서의 눈이 존경심으로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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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말아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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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얘 전설적인 소문은 다들 들어서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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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언의 입가에 악마 같은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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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 소생실에서 데미지 컨트롤 한답시고 환자 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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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앗, 선생님!! 예전 이야기는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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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의 비명을 지르며 한재언의 말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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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언은 내 필사적인 모습이 아주 재밌다는 듯 껄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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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그래. 현재가 싫어하니까 이쯤에서 관둘게. 무튼 너희는 진짜 축복받았다. 바로 윗 기수에 천재가 있잖아. 다른 과 동기들한테 자랑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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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라는 말 좀 그만해요, 이 양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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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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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천재라는 단어가 앞으로 내 레지던트 생활을 얼마나 더 피곤하게 만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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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튼! 기타 등등 자세한 건 여기 한현재 선생한테 묻고. 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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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언은 그렇게 모든 책임을 내게 떠넘기고 쿨하게 의국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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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차는 바빠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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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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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하는 일도 1년 전이랑 크게 바뀐 건 없잖아… 4년 차라고 특별히 바빠지는 게 뭐가 있다고 저렇게 폼 잡고 사라지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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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재언의 뒷모습에 대고 속으로 욕을 뱉으려다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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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쩌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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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양반은 떠났고 이 가엾은 어린 양들을 이끌어야 할 책임은 온전히 내게로 넘어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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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반강제로 응급실 신입 투어의 진행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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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머리 신발 양말 싹 다 젖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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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투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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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스테이션으로 가자. 인턴 때 쓰던 EMR 계정은 오늘부로 바뀌었을 텐데 로그인은 새로 해 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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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뇨.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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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바로 해봐. 오늘 너희들 정식 출근 첫날이니까 아마 처방 권한이랑 다 풀려있을 거야. 그거부터 확인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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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테이션 구석의 컴퓨터 두 대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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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서와 박성정은 허둥지둥 자기 사번으로 로그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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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에 익숙한 EMR 인터페이스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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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일단 출근 시간까지 13분 남았으니까 그전에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다 체크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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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자리의 모니터를 가리키며 인턴, 아니 1년 차들을 불러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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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봐봐. 지금은 조용하지만 곧 새 환자가 들어올 텐데… 아, 마침 누가 접수하네. 저렇게 트리아지가 되면 대강 여기 보이지? 왼쪽 환자 목록 모니터에 이름이랑 나이랑 주호소가 뜨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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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화면에 새로고침된 환자 목록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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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건 간호사 선생님이 1차로 분류해 준 거지 아직 전산상으로 확정된 게 아니야. 그래서 우리가 환자를 보고 나서 일일이 EMR 차트에다가 진단명이랑 KTAS 등급을 딱 입력을 해줘야 돼. 이거 제대로 안 하면 나중에 환자분 본인부담금이 개처럼 깨지는 수가 있어서 민원 폭탄 맞기 싫으면 무조건 제대로 체크해줘야 하고. 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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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차팅 화면을 열어 진단 입력 창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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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진단 코드 넣는 칸 보면 제일 위에 KTAS 분류 있지? 주 진단명 넣을 때 잊지 말고 이것도 중복해서 꼭 같이 넣으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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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넵!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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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기본적인 인수인계를 마치고 우리 셋은 스테이션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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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도 아직 새로운 환자는 들어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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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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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성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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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옆에 앉은 박성정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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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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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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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응급의학과 왜 온 거야? 진짜 궁금해서 그래.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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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정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주 솔직하고 현실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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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워라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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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라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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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주변 선배들이 응급의학과는 출근과 퇴근이 명확해서 퇴근 후의 삶이 그나마 보장되는 과라고 해서요. 칼퇴가 가능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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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대답을 듣고 잠시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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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완전 MZ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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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도 MZ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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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 옆에 있던 백은서가 해맑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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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한 선생님. 생각보다 응급실이 되게 조용하네요. 환자도 없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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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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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모든 반사신경을 동원해 백은서의 입을 막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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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ㅂ… 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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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서 ‘없고’라는 마지막 음절이 터져 나오는 것과 거의 동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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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루루루루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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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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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션의 전화기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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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이마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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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 최고의 금기를 제일 먼저 교육했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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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근처에 있던 간호사가 수화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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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청진대병원 응급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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