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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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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은 연말의 어수선함으로 가득 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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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들에게 12월 말은 또 다른 의미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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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 레지던트 합격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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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한 해 나의 삶의 질을 결정할 운명의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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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우리의 당직 부담을 덜어줄 새로운 노예… 아니, 새로운 후배가 들어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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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내내 나와 김지훈은 틈만 나면 병원 내부 전산망의 공지사항 게시판을 새로고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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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5 키가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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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뜨는 거야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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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훈이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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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오늘 오후 중에 뜬다고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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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닥쳐봐. 뜰 때 되면 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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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겉으로는 쿨한 척했지만 내 심장 역시 불안하게 날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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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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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가 새로고침되면서 새로운 게시글 하나가 목록 최상단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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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전공의(레지던트) 1년 차 최종 합격자 명단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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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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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김지훈은 거의 동시에 외치며 모니터 앞으로 머리를 맞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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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어디 있냐… 어디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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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크롤을 미친 듯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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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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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의학과 | 정원(TO): 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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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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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작년과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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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밑으로 제발 네 개의 이름이 다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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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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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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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4명에… 두 명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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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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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을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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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두 개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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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와중에도 익숙한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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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정? 얘 결국 EM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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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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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함께 절망하던 김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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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그때 똥꼬에 뭐 들어간 환자 짬 처리했던 그 인턴? 걔가 대체 왜 왔대? 너한테 복수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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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쳐 김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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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아냥을 씹고 다른 이름 하나를 더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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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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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원서 접수하러 왔던 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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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뭐. 나쁘진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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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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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명보다는 낫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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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두 명이야, 두 명! 반타작이라고! 내년에도 여전히 1년 차처럼 당직을 졸라 서야 한다는 소리야! 내년에도 우리 인생은 조뺑이가 확정이라는 소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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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명보단 낫잖아 이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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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것보다야 낫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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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과들은 뭐 없냐? 우리만 이 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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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지훈의 말에 다른 과들의 합격자 명단을 훑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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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과랑 외과는 그럭저럭 선방해서 어느 정도 채웠고. 어… 산소는 전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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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부인과 | 정원(TO): 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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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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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청소년과 | 정원(TO): 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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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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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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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훈이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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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아예 비워주지 [none]은 왜 써놓은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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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야. 흉부외과 한 명 있다. 미친놈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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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혈관흉부외과 | 정원(TO): 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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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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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김지훈은 동시에 감탄사를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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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렇게 다른 과의 흥망성쇠를 안주 삼아 떠들고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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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에서 서늘한 그림자가 우리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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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현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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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걸지 마 김지훈. 나 지금 다른 과 망했는지 살았는지 구경하느라 바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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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등 뒤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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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안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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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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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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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돌리자 천은정 교수가 팔짱을 낀 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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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교수님! 아이고! 오신 줄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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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자에서 튀어 오르듯 일어나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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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해야죠! 당연히 일 해야 합니다! 지금 바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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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다다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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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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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어김없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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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환자들이 내 손을 스쳐 지나갔고, 나의 첫 레지던트 생활은 귀신들의 끝없는 잔소리와 함께 저물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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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맞이한 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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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트의 1년은 3월에 시작해서 이듬해 2월에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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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끝은 곧 한 해의 끝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언제나 이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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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의학과 전체 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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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는 병원 앞 고깃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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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들어온 파릇파릇한 1년 차부터 오늘을 마지막으로 병원을 떠나는 4년 차들, 그리고 교수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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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멍하니 맥주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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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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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트 1년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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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옥 같던 시간이 이제 정말로 끝나가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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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동안 고기가 익고 술잔이 오가던 그때 박웅 과장이 숟가락으로 불판을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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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자, 다들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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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스럽던 식당이 순간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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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자리는 지난 4년간 우리 응급의학과를 위해 청춘을 바친 자랑스러운 우리 4년 차 선생들을 떠나보내는 자리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다! 자, 모두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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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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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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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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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앞으로의 찬란한 미래에 대해 한번 들어봐야지! 유성훈 선생은 앞으로의 계획이 어떻게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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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차 유성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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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뭐, 어쩌다 보니까 운이 좋아서 서울에 있는 오성서울병원 중환자의학과 전임의 과정으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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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 성훈이는 큰 물로 올라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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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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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욱 선생은 어디라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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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는 거의 엮일 일이 없어 얼굴만 겨우 알던 김민욱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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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부산 생활도 슬슬 정리하고 고향인 통영에 있는 종합병원 응급의학과 과장 자리로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이제 저도 좀 편하게 살아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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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모두가 부럽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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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저런 길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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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치그치. 고향 내려가서 지역 의료에 힘쓰는 것도 아주 훌륭한 선택이지. 자, 마지막! 우리 의국장! 이민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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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선이 이민재에게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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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몇 달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병원 중 하나인 아성병원의 펠로우 자리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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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재는 비장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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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여러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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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재가 잠시 말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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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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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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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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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는다고?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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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이민재! 제 청춘과 영혼을 바친 이곳, 청진대학교의료원에 뼈를 묻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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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 교수석 테이블에서 “푸웁!”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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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돌리자 천은정 교수가 방금 마신 물을 뿜고 사레가 들려 켁켁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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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뭣? 민재야 너 방금 뭐라고? 남는다고? 어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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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셨습니까? 교수님들은 다 아시는 줄 알았는데요. 저 그냥 여기 청진의료원에 뼈를 묻기로 했습니다! 저는 응급실을, 그리고 여기 계신 여러분들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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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뭐야 이거. 나만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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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나도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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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가 이걸 모를 수 있는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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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교수가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과장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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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교수가 평소에 민재를 하도 닦달하고 놀려대길래 내가 특별히 천 교수한테만 비밀로 했죠! 서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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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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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은정 교수가 배신감에 찬 얼굴로 과장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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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모든 상황을 파악한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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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재의 서프라이즈 폭탄선언으로 회식 자리의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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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동안의 소란이 이어지던 그때 박웅 과장이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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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의 시선은 테이블 가장 끝자리에서 거의 투명인간처럼 앉아있는 두 명의 젊은 얼굴을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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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는 아주 귀한 손님들이 오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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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모든 시선이 박성정과 백은서에게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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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 1년 차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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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예비 1년 차 선생들도 오늘 참석하셨는데 소감은 어때? 이 자리에 온 소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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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웅 과장의 질문에 박성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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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 그… EM… 진짜… 참… 좋은… 네… 과 같습니다… 선배님들도 다 좋으시고… 많이 배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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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혼 없는 대답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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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정 선생은 의학 지식보다 포커페이스를 먼저 연습하도록 해야겠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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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박성정의 신고식이 끝나고,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 옆의 백은서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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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백은서 선생은 왜 여기 왔나? 응급의학과가 좋아서? 아니면 그냥 성적 맞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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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웅 과장의 짓궂은 질문에 백은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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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 한현재 선배님이 환자분 개복술 하시는 거 보고 지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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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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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럽던 고깃집 안의 모든 소음이 그 순간 거짓말처럼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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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입에 넣으려던 돼지갈비 한 점을 그대로 접시 위에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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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초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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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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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재의 폭소가 정적을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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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웃음소리를 신호탄으로 식당 전체가 웃음바다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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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저 또라이를 보고도 EM에 지원한 인턴이 다 있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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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재는 거의 눈물을 흘릴 정도로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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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 1년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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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테이블에 있던 4년 차 유성훈이 웃음을 참으며 진지하게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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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한현재처럼 미쳐가지고 환자 배 째면 안 된다? 알았지? 쟤는 그냥 돌연변이야 돌연변이. 쟤는 면허를 걸었다니까. 미친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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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심지어 그때 반말까지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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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우 박세영이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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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치심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고개를 숙이고 소주만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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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앗, 선생님! 예전 이야기를 왜 또 꺼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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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항변은 거대한 웃음소리에 묻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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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 그리 예전 이야기도 아니구만! 불과 몇 달 전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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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재가 나를 놀리며 술잔을 채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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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잔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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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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