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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멍한 상태로 수련위원회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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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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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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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난 운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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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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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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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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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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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힘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누군가 급하게 뛰어와 엘리베이터 문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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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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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목소리. 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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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웅은 숨을 몰아쉬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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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닫히고 좁은 공간 안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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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뭔가 데자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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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이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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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어떻게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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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문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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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징계를 받을 줄 알았는데,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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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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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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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오늘…결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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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을 고르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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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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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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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노골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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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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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국 가장 원초적인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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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과장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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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과장 박웅은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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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내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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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저, 그… 혹시 과장님께서 뭔가 저를 위해서 힘을 좀 써주신 게 아닌가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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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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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 드라마의 가장 흔한 클리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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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친 부하 직원을 과장이 온몸으로 막아서는 감동적인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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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웅 과장이 뒤에서 나를 위해 발 벗고 나서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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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회의실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것도 사실은 나를 변호하다가 다른 교수들과 싸우고 난 뒤의 탈진 상태였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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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조심스러운 질문에 과장이 마침내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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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 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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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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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저, 그… 그러니까 과장님께서 뭔가 저를 변호해주셨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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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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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은 정말로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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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별거 안 했는데? 그냥 위원회 열린다고 해서 너 인사 평가 관련 서류 몇 개만 행정팀 통해서 제출하고 말았지. 뭐, 평소 근무 태도 성실하고, 동료들과의 관계 원만하며, 학구열이 높고… 뭐 대충 그런 거. 싹싹한 놈이다. 뭐 이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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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형식적인 서류 몇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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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오늘 징계는… 왜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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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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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이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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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징계할 껀덕지가 없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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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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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해봐. 뭐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다 시술했어? 아니잖아. 중간에 전태정 교수가 와서 마무리했지. 그럼 네 책임은 거기까지야. 그리고 네가 시술하는 동안 옆에 임상강사 이민재가 버티고 서 있었잖아. 물론 그놈도 수련의지만, 어쨋건 전문의 면허가 있는 놈이라고. 그럼 규정상 지도 감독 하에 이루어진 술기라고 볼 수도 있는 거고. 결정적으로 네가 우리 병원 규정을 명백하게 위반한 게 있어? 응급실에서 레보아를 꽂으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냐고.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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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렇긴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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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전문의의 감독 없이 2년 차가 단독으로 시행하면 안된다는 암묵적인 룰은 있었지만 명문화된 규정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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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된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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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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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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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멍한 상태로 먼저 내리는 과장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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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그냥 껀덕지가 없어서 끝난 거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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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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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로비는 점심시간이 가까워진 탓인지 제법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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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보호자, 그리고 흰 가운을 입은 수많은 의료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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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은 나보다 몇 걸음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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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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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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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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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이 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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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은 진짜 쓸 만한 것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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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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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리 과 대표 똥손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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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작년에 사고 친 그 개복술 건도 그렇고. 이번에 그 레보아인지 뭔지 그것도 그렇고. 결과적으로는 다 성공시킨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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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메스의신이 성공시킨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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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닙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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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계적인 겸손 모드를 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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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미친 짓을 2년 연속으로 하는 레지던트가 우리 과에 굴러 들어왔는데 내가 이걸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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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이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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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재 그놈도 그렇고. 아주 또라이가 둘이다 둘. 우리 과에.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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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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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장의 마지막 말에 반박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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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는 맞는데 둘이 아니라 셋 아닌가요 과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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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포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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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말없이 병원 로비를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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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문 밖으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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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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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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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목소리가 조금 더 진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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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내가 외상센터 파견 교육 관련해서 얘기했던 거. 기억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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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기억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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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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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이 타이밍에 다시 그 얘기를 꺼낸다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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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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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지금 징계위원회 불려 갔다 온 사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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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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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이 잠시 말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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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이 쿵쾅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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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아니라고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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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아마 안 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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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서 마침내 내가 기다리던 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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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에에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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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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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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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준 교수와 메스의신의 콜라보레이션 지옥 훈련은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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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의 울음을 터뜨릴 뻔한 감격을 억누르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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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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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다는 표정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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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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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내 모든 안도감을 산산조각 내는, 다음 문장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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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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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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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헬기 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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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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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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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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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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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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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보처럼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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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은 내 반응이 뭐가 그리 웃긴지, 아니면 그냥 내 존재 자체가 웃긴 건지 모르겠지만 아주 유쾌하게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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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하! 왜, 싫어? 하늘을 나는 응급실! 얼마나 낭만적이냐! 강현준 교수가 너 탐낸다고 하도 노래를 부르길래 외상센터 대신 이걸로 퉁치기로 했다 내가! 가서 많이 배우고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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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이 내 어깨를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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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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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응급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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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아터진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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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듯한 소음과 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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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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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 같은 소리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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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콥터? 내가? 하늘을 나는 응급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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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미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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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땅 위에서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2년 차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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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과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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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이 말도 안 되는 명령에서 벗어날 구실을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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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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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나를 줘패 왔던 그 빌어먹을 규정이라면 이번에는 나를 구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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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제가 알기로는 응급의료 전용 헬기, 그 닥터헬기에는 응급의학과 전문의나 외상외과 전문의가 탑승해서 현장 처치를 시행해야 하는 걸로 아는데 저는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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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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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은 내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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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웅의 얼굴에 ‘어라, 그런 게 있었나?’ 하는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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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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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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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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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역시 나 같은 저년 차는 안 되는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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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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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은 갑자기 헛기침을 하며 가슴을 쭉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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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아주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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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내가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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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이 자신의 가슴팍을 두 번 툭툭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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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보다 법규와 규정을 철저히 준수하는 우리 청진대학교의료원 응급의학과의 양심! 과장 박웅 아니냐! 내가 설마 그런 기본적인 것도 확인 안 하고 너를 헬기에 태우려고 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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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래 보입니다 과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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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은 주머니에서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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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정에는 이미 무언가 문서 파일이 띄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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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화면을 내 코앞에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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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알아왔지! 자,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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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에는 [응급의료 전용헬기 운용 세부지침]이라는 딱딱한 제목의 문서가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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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응급의료센터 공식 자료라는 로고까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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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냐? NEMC 공식 자료! 이게 바로 닥터헬기의 모든것을 규정하는 바이블이다! 자 여기 페이지를 한번 내려가 보렴! 쭉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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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은 손가락으로 화면을 빠르게 스크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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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손가락 끝을 따라 눈알을 필사적으로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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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조항과 세부 규정들이 어지럽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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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손가락이 한 부분에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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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 읽어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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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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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의료팀 의료진의 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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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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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권역응급의료센터 또는 지역응급의료센터, 권역외상센터에 소속된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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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첫 줄을 읽는 순간 다시 한번 희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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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가] 항부터 저는 해당 사항이 없는데요 과장님. 제가 전문의로 보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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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이 친구가. 끝까지 읽어보라니까! 계속 봐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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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닦달에 마지못해 다음 항목들을 읽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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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이 정하는 소정의 항공의학 관련 교육을 수료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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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해당 응급의료 전용헬기(주헬기)에 5회 이상 탑승하여 현장 훈련을 이수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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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5회 이상의 헬기 탑승 훈련 후에도 신체적 또는 심리적으로 항공 근무에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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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든 항목을 다 읽고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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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님. 저는 저기에 해당되는 교육도 탑승 훈련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 심리 상태는 지금 당장이라도 정신과 상담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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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진심 어린 호소에 과장은 또다시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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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아직 핵심을 못 봤구만! 자, 여길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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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스크롤을 아주 조금 더 내려 깨알 같은 글씨로 적힌 조항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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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은 위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재난 상황 대응, 헬기 정비 및 점검, 교육·훈련, 사업 평가 및 조사 등의 목적으로 닥터헬기에 별도의 인원을 탑승토록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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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은 교육·훈련이라는 단어를 손가락으로 콕 찍어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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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교육 보이지? 훈련도 보이고! 너는 정식 항공의료팀 의사로 탑승하는 게 아니야! 외상센터 파견 교육의 일환으로! 수련의 자격으로! 교육과 훈련을 위해 타는 거라고! 껄껄. 됐지? 아무런 법적 문제도 없고 절차상 하자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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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과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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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영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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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잘 알아들었으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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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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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8월에 우리 병원에서 닥터헬기 신규 인력 교육이랑 훈련 과정이 있을 예정이니까 그때 되면 내가 다시 자세히 알려줄게! 너를 하늘을 나는 의사로 만들어주마!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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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은 혼자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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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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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몇 달이나 남았지만 그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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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한 환청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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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잠시만요, 과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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