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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 전, 나는 아직 선생님이라는 호칭보다는 학생이라는 말이 더 익숙한 어리바리한 인턴 나부랭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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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날도 나는 평화롭게 응급실에서 온갖 잡일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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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평화란 내 손으로 직접 환자의 생사를 결정할 책임이 없다는 데서 오는 수동적인 평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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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이 하는 일이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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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슈터가 점검중인 새벽 3시에 ABGA 검체를 들고 검사실까지 전력 질주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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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에 밀려있는 EKG 용지 수십 장을 처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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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에 CT를 찍어야 하는 환자를 덜컹거리는 스트레쳐에 실어 영상의학과까지 이송하고 한 시간 뒤에 다시 데리러 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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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끝도 없이 울려대는 전화를 받아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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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의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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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최악은 단연코 채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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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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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에 들린 주삿바늘이 할머니의 얇고 약한 혈관을 또다시 빗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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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다섯 번째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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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앙상한 팔뚝은 내 무능함의 증거처럼 시퍼런 멍 자국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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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꼭 피를 뽑아야 하나요… 우리 엄마 아파하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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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광경을 지켜보던 간호사가 깊은 한숨과 함께 내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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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 쌤, 잠깐 비켜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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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간호사 선생님은 토니켓을 다시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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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내가 찾지 못했던 그 혈관을 정확히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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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기 안으로 검붉은 피가 부드럽게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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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옆에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으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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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검사를 위해 환자들의 팔을 여러번 찔렀고, 결국에는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야 했으며, 스테이션으로 돌아와서는 레지던트 선배에게 ‘너는 손이 달려있긴 한 거냐’는 갈굼을 당하는 그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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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의대생 시절 상상했던 응급실의 모습과 내가 인턴으로서 마주한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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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 응급실은 언제나 극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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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심장이 멎은 환자가 실려오고 천재 의사가 기적처럼 환자들을 살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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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영웅의 모습을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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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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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인턴으로 응급실을 돌던 그 한 달 동안 수십 명의 심정지 환자가 소생실로 실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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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친 듯이 흉부 압박을 하고, 약물을 쏟아붓고, 제세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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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들 중 살아서 응급실을 걸어 나간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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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심정지 환자들은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죽었거나, 혹은 우리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소생실 침대 위에서 싸늘하게 식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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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은 매일매일 죽어가는 환자들만 보는 곳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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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그 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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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부터 코가 좀 막히는데, 콧물 약 좀 처방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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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근처라서요. 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픈데, 비타민 수액 한 대만 놔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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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찾아보니까 제 증상이 췌장암 말기랑 똑같던데, 지금 당장 CT랑 MRI 다 찍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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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응급실의 의사들은 내가 상상했던 영웅과는 거리가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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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라기보단 질병과, 외상과, 그리고 때로는 환자나 다른 과 의사들과도 지독하게 싸우는 싸움꾼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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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의학과 의사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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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자기 앞에 놓인 환자 한 명을 어떻게든 살려내기 위해, 혹은 다른 곳으로 무사히 살아있는 상태로 넘기기 위해 발버둥 치는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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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 생활을 하며 많은 환상이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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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환상. 생명의 경이로움에 대한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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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환상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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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나는 응급의학과를 지망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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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시절 나는 희대의 명작이라 불리던 한 의학 드라마에 미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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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속 응급실은 언제나 긴박했고 의사들은 언제나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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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 속에서도 절대 환자를 포기하지 않았고 기적처럼 생명을 살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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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드라마의 모습에서 내가 가야 할 길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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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진짜 의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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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최전선에서 온몸으로 환자의 생명을 지켜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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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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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바로 내가 되고 싶은 의사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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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아마도 그 드라마 때문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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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모든 환상은 그 잘 짜인 각본과 화려한 연출에서 비롯되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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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서, 너 미쳤냐? EM이 워라밸 좋다는 것도 옛말이야. 단점이 더 많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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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성격에 응급실 가면 한 달도 못 버티고 뛰쳐나온다. 매일 밤 주취자랑 싸우고, 보호자한테 멱살 잡히고, 피 토하는 환자 뒤치다꺼리하는 게 네 꿈은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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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수많은 선배들과 동기들의 만류 섞인 외침에도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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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조언들은 내 뜨거운 사명감 앞에서는 그저 패배자들의 변명처럼 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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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히려 그들을 한심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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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는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환자를 살리겠다는 열정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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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응급실에 갈 날만을 손꼽아 고대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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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턴이 되어 마주한 현실은 내가 상상했던 그 어떤 지옥보다도 더 끔찍했고, 그 무엇보다 더 거대한 괴리감으로 나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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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에서는 심장이 멎은 환자가 실려 오면 주인공이 달려들어 기적처럼 살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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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실의 응급실에서 내가 처음 목격한 CPR은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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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에서는 초보 의사가 획기적인 진단과 술기로 환자를 살려내고 칭찬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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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내가 처음으로 흉부 압박을 했던 환자는 내 눈앞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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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선고를 하는 교수님의 무감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에 복도로 뛰쳐나가 주저앉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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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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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의학과 의사들은 질병과 싸우고, 외상과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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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동시에 막무가내인 환자와 싸웠고, 병실을 내주지 않으려는 다른 과와 싸웠으며, 병원의 삭감 지침과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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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는 사명감보다 지독한 냉소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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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현실은 그 어떤 선배나 동기의 만류 섞인 외침보다도 나를 응급의학과에서 더 멀어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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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건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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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 생활이 끝나갈 무렵 마침내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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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꿈꿨던 영웅은 이 지옥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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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애초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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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응급의학과를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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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의사라는 길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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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생명을 다루는 다른 과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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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옥 같은 최전선이 아니라면, 조금 더 정돈되고 예측 가능한 환경이라면 어쩌면 나는 내가 꿈꿨던 의사의 모습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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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내가 가졌던 순진한 신념을 그나마 지켜주는 마지막 일일듯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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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응급실의 사람들이 나빴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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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나와 가장 많이 마주쳤던 1년 차 선배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버텨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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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현재, 조수연 선배는 친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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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수십 번을 실패했던 ABGA 채혈을 한현재 선배는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자기 환자를 보는 틈틈이 옆에 와서 각도는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동맥의 맥박은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를 차분하게 가르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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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실제로 시범을 보여주시진 않으셨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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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셨던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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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훈 선배는… 그냥 늘 바빠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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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스테이션 컴퓨터 앞에서 무언가를 미친 듯이 타이핑하고 있거나, 전화기를 붙들고 전화를 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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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최민준 선배는… 그냥, 조금 생각이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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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멍한 표정으로 복도를 걸어 다녔고 가끔은 자신이 방금 무슨 오더를 냈는지조차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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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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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그냥 내 솔직한 감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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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차 선배들도 다들 좋은 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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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선배들의 지친 모습은 내게 오히려 더 큰 경고처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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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내 1년 뒤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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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코 저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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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M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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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응급실에서의 마지막 날 굳게 다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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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는 응급의학과 쪽으로는 시선도 두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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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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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 환자가 실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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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렌 소리도 없이, 예고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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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부에 철근이 박힌 채 피를 쏟아내며 바닥으로 쓰러진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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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허둥댔고, 모두의 얼굴에 절망이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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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압은 바닥을 쳤고 환자의 심장은 멎기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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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광경을 소생실 구석에서 뛰어다니며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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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봐. 이게 현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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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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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바로 응급실의 본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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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 영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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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압도적인 죽음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져 내리는 평범한 인간들만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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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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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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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차 한현재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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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손짓, 모든 것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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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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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마디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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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들이 미쳤냐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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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허가 날아갈 거라고 절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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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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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선배의 손이 내가 실습하며 본 그 어떤 외과의사의 손보다도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이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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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타딘을 들이붓고 멸균 포를 까는 그 모든 과정이 마치 한 편의 예술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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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선배의 손에 들린 메스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꺼져가는 생명을 구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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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는 오직 그 한 사람만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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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죽음의 한복판에서 모든 규정과 상식을 뛰어넘어 오직 환자를 살리겠다는 단 하나의 신념만으로 칼을 든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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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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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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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내가 봤던 드라마에서의 그 모습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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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모습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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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처럼 고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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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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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본질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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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응급의학과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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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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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마음을 고쳐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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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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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굳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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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의학과로 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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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처럼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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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괴물이 될 자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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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적어도 저 사람의 등 뒤에서, 저런 전쟁터의 한복판에서 도망치지 않는 의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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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날 밤 내 꺾여버린 꿈의 조각들을 다시 주워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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