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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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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 전, 나는 아직 선생님이라는 호칭보다는 학생이라는 말이 더 익숙한 어리바리한 인턴 나부랭이였다.

그리고 그날도 나는 평화롭게 응급실에서 온갖 잡일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평화란 내 손으로 직접 환자의 생사를 결정할 책임이 없다는 데서 오는 수동적인 평화다.

인턴이 하는 일이 그렇지 뭐.

에어슈터가 점검중인 새벽 3시에 ABGA 검체를 들고 검사실까지 전력 질주하는 것.

오전 7시에 밀려있는 EKG 용지 수십 장을 처리하는 것.

오후 2시에 CT를 찍어야 하는 환자를 덜컹거리는 스트레쳐에 실어 영상의학과까지 이송하고 한 시간 뒤에 다시 데리러 가는 것.

그리고 끝도 없이 울려대는 전화를 받아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인턴의 일상이었다.

그중에서도 최악은 단연코 채혈이었다.

“아얏!”

내 손에 들린 주삿바늘이 할머니의 얇고 약한 혈관을 또다시 빗나갔다.

벌써 다섯 번째 시도였다.

할머니의 앙상한 팔뚝은 내 무능함의 증거처럼 시퍼런 멍 자국으로 가득했다.

“선생님… 꼭 피를 뽑아야 하나요… 우리 엄마 아파하시는데….”

결국 이 광경을 지켜보던 간호사가 깊은 한숨과 함께 내게 다가왔다.

“인턴 쌤, 잠깐 비켜봐요.”

책임간호사 선생님은 토니켓을 다시 묶었다.

그리고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내가 찾지 못했던 그 혈관을 정확히 찾아냈다.

주사기 안으로 검붉은 피가 부드럽게 차올랐다.

나는 그 옆에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으로 서 있었다.

피 검사를 위해 환자들의 팔을 여러번 찔렀고, 결국에는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야 했으며, 스테이션으로 돌아와서는 레지던트 선배에게 ‘너는 손이 달려있긴 한 거냐’는 갈굼을 당하는 그런 사람.

내가 의대생 시절 상상했던 응급실의 모습과 내가 인턴으로서 마주한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다.

드라마 속 응급실은 언제나 극적이었다.

매일같이 심장이 멎은 환자가 실려오고 천재 의사가 기적처럼 환자들을 살려낸다.

나는 그 영웅의 모습을 꿈꿨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내가 인턴으로 응급실을 돌던 그 한 달 동안 수십 명의 심정지 환자가 소생실로 실려 왔다.

우리는 미친 듯이 흉부 압박을 하고, 약물을 쏟아붓고, 제세동을 했다.

하지만 그들 중 살아서 응급실을 걸어 나간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심정지 환자들은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죽었거나, 혹은 우리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소생실 침대 위에서 싸늘하게 식어간다.

응급실은 매일매일 죽어가는 환자들만 보는 곳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어제부터 코가 좀 막히는데, 콧물 약 좀 처방해 주세요.

‘회사 근처라서요. 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픈데, 비타민 수액 한 대만 놔주세요.

‘인터넷 찾아보니까 제 증상이 췌장암 말기랑 똑같던데, 지금 당장 CT랑 MRI 다 찍어주세요.

그리고 응급실의 의사들은 내가 상상했던 영웅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웅이라기보단 질병과, 외상과, 그리고 때로는 환자나 다른 과 의사들과도 지독하게 싸우는 싸움꾼처럼 보였다.

응급의학과 의사는 아니었다.

그저 자기 앞에 놓인 환자 한 명을 어떻게든 살려내기 위해, 혹은 다른 곳으로 무사히 살아있는 상태로 넘기기 위해 발버둥 치는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

인턴 생활을 하며 많은 환상이 깨졌다.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환상. 생명의 경이로움에 대한 환상.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환상까지도.

맨 처음 나는 응급의학과를 지망했었다.

학생 시절 나는 희대의 명작이라 불리던 한 의학 드라마에 미쳐 있었다.

화면 속 응급실은 언제나 긴박했고 의사들은 언제나 영웅이었다.

주인공은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 속에서도 절대 환자를 포기하지 않았고 기적처럼 생명을 살려냈다.

나는 그 드라마의 모습에서 내가 가야 할 길을 봤다.

저게 진짜 의사구나.

삶과 죽음의 최전선에서 온몸으로 환자의 생명을 지켜내는 사람.

저거다.

저게 바로 내가 되고 싶은 의사의 모습이다.

그래, 아마도 그 드라마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의 모든 환상은 그 잘 짜인 각본과 화려한 연출에서 비롯되었다는 뜻이다.

“백은서, 너 미쳤냐? EM이 워라밸 좋다는 것도 옛말이야. 단점이 더 많다니까?”

“네 성격에 응급실 가면 한 달도 못 버티고 뛰쳐나온다. 매일 밤 주취자랑 싸우고, 보호자한테 멱살 잡히고, 피 토하는 환자 뒤치다꺼리하는 게 네 꿈은 아니잖아.”

대학 시절 수많은 선배들과 동기들의 만류 섞인 외침에도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 조언들은 내 뜨거운 사명감 앞에서는 그저 패배자들의 변명처럼 들릴 뿐이었다.

나는 오히려 그들을 한심하게 여겼다.

그들에게는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환자를 살리겠다는 열정이 없다고.

나는 응급실에 갈 날만을 손꼽아 고대해왔다.

하지만 인턴이 되어 마주한 현실은 내가 상상했던 그 어떤 지옥보다도 더 끔찍했고, 그 무엇보다 더 거대한 괴리감으로 나를 덮쳤다.

드라마 속에서는 심장이 멎은 환자가 실려 오면 주인공이 달려들어 기적처럼 살려냈다.

하지만 현실의 응급실에서 내가 처음 목격한 CPR은 실패했다.

드라마 속에서는 초보 의사가 획기적인 진단과 술기로 환자를 살려내고 칭찬받는다.

현실에서 내가 처음으로 흉부 압박을 했던 환자는 내 눈앞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망 선고를 하는 교수님의 무감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에 복도로 뛰쳐나가 주저앉아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응급의학과 의사들은 질병과 싸우고, 외상과 싸웠다.

그리고 동시에 막무가내인 환자와 싸웠고, 병실을 내주지 않으려는 다른 과와 싸웠으며, 병원의 삭감 지침과 싸웠다.

얼굴에는 사명감보다 지독한 냉소만이 가득했다.

그 현실은 그 어떤 선배나 동기의 만류 섞인 외침보다도 나를 응급의학과에서 더 멀어지게 했다.

‘아, 이건 아니구나.

인턴 생활이 끝나갈 무렵 마침내 깨달았다.

내가 꿈꿨던 영웅은 이 지옥에는 없다.

아니, 애초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응급의학과를 포기했다.

하지만 의사라는 길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생명을 다루는 다른 과에 가자.

이 지옥 같은 최전선이 아니라면, 조금 더 정돈되고 예측 가능한 환경이라면 어쩌면 나는 내가 꿈꿨던 의사의 모습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그게 내가 가졌던 순진한 신념을 그나마 지켜주는 마지막 일일듯 싶었다.

물론 응급실의 사람들이 나빴던 것은 아니다.

특히 나와 가장 많이 마주쳤던 1년 차 선배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버텨내고 있었다.

한현재, 조수연 선배는 친절했다.

내가 수십 번을 실패했던 ABGA 채혈을 한현재 선배는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자기 환자를 보는 틈틈이 옆에 와서 각도는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동맥의 맥박은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를 차분하게 가르쳐주었다.

물론 실제로 시범을 보여주시진 않으셨지만.

왜 그러셨던거지?

김지훈 선배는… 그냥 늘 바빠 보였다.

언제나 스테이션 컴퓨터 앞에서 무언가를 미친 듯이 타이핑하고 있거나, 전화기를 붙들고 전화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최민준 선배는… 그냥, 조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늘 멍한 표정으로 복도를 걸어 다녔고 가끔은 자신이 방금 무슨 오더를 냈는지조차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미안, 선배.

이건 그냥 내 솔직한 감상이다.

1년 차 선배들도 다들 좋은 분들이었다.

하지만 선배들의 지친 모습은 내게 오히려 더 큰 경고처럼 다가왔다.

저게 내 1년 뒤 모습일 것이다.

나는 결코 저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 EM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응급실에서의 마지막 날 굳게 다짐했었다.

저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는 응급의학과 쪽으로는 시선도 두지 않겠다고.

그렇게 그 날.

외상 환자가 실려 왔다.

사이렌 소리도 없이, 예고도 없이.

복부에 철근이 박힌 채 피를 쏟아내며 바닥으로 쓰러진 남자.

모두가 허둥댔고, 모두의 얼굴에 절망이 서려 있었다.

혈압은 바닥을 쳤고 환자의 심장은 멎기 직전이었다.

나는 그 광경을 소생실 구석에서 뛰어다니며 바라보고 있었다.

‘거 봐. 이게 현실이야.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바로 응급실의 본모습이다.

드라마 속 영웅은 없다.

그저 압도적인 죽음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져 내리는 평범한 인간들만이 있을 뿐.

그때였다.

한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년 차 한현재 선배.

목소리, 손짓, 모든 것이 변했다.

“칼.”

그 한마디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선배들이 미쳤냐고 소리쳤다.

면허가 날아갈 거라고 절규했다.

나는 봐버렸다.

한 선배의 손이 내가 실습하며 본 그 어떤 외과의사의 손보다도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이는 것을.

베타딘을 들이붓고 멸균 포를 까는 그 모든 과정이 마치 한 편의 예술처럼 느껴졌다.

한 선배의 손에 들린 메스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꺼져가는 생명을 구원했다.

내 눈에는 오직 그 한 사람만이 보였다.

피와 죽음의 한복판에서 모든 규정과 상식을 뛰어넘어 오직 환자를 살리겠다는 단 하나의 신념만으로 칼을 든 의사.

아, 이거구나.

내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게 내가 봤던 드라마에서의 그 모습이구나.

물론 모습은 달랐다.

드라마처럼 고귀하지 않았다.

처절했다.

하지만 그 본질은 같다.

이게 응급의학과구나.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렇게 나는 마음을 고쳐잡았다.

그래.

나는 굳게 다짐했다.

응급의학과로 가자고.

저 사람처럼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저런 괴물이 될 자신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저 사람의 등 뒤에서, 저런 전쟁터의 한복판에서 도망치지 않는 의사가 되고 싶다.

나는 그날 밤 내 꺾여버린 꿈의 조각들을 다시 주워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