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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금세 끝났다. 나는 초호기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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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혼자서도 밥값은 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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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호기는 내 칭찬에 대답하듯, 들고 있던 창을 바닥에 꽂으며 가슴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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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녀석을 다시 원래의 크기로 되돌려 어깨에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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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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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중요한 사실이 다시 뇌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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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28층. 옆집 아저씨 정만호의 최고 기록은 27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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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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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대전 탑은 내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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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흥분과 함께 몰려오는 약간의 긴장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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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뎅이의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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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주인이 바뀌면 새로운 닉네임을 설정하는 창이 뜰 수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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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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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기존 랭킹 닉네임인 ‘ㅇㅇ’이 그대로 박제되어 버린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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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곤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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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가 내가 대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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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조하게 시스템 메시지가 뜨기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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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풍뎅이의 말이 맞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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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내 눈앞에 기다리던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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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28층(EXTREME) 클리어를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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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클리어 보너스가 적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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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보너스가 적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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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보던 익숙한 메시지와 보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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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충 넘기고 다음 메시지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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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가장 중요한 알림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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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전 탑의 최고 등반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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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랭킹을 기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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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이름은 층별 랭킹에 사용되는 닉네임과는 별개로 설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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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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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문장을 확인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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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뎅이의 말이 맞았다.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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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내 눈앞에 새로운 창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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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탑 랭킹에 등록할 이름을 입력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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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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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서가 깜빡이며 나의 입력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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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팔짱을 끼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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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적어 넣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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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은 당연히 안 된다. 그렇다고 내 공식 신분인 김한별을 쓸 수도 없는 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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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나라는 사실을 숨기면서도, 알 사람들은 알만한 임팩트 있는 이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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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름이 좋을까. 나는 고민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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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문득 한 가지 이름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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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망설임 없이 허공에 뜬 키보드에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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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이름을 입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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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이름으로 등록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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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망설임 없이 ‘예’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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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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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같은 시각. 철혈단 길드의 회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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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탑의 지배자이자 A급 헌터인 정만호는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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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앞에서는 보좌관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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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층의 잡몹들의 패턴은 총 세 가지로 분석됩니다. 첫 번째는 전기 레이저 패턴으로, 이때는 반드시 한발 물러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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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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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저 턱을 괸 채, 텅 빈 눈으로 프레젠테이션 화면에 떠 있는 기계 몬스터의 3D 모델링을 노려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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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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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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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붕괴 카운트다운은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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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탑의 지배자인 그에게는 탑을 공략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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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파업을 주도 중인 협회도 정말로 탑이 붕괴하길 바라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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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회조차도 정만호에게 슬슬 준비해야 하지 않겠냐며 말을 넣고 있는 상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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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등 떠밀리듯 28층 공략을 준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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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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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의 자원을 쏟아부어 다른 헌터들의 공략 데이터를 수집하고, 밤낮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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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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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는 진심으로 가기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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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나도 마법사 같은 직업이었으면 편하게 가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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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급 헌터라는 명예, 길드장이라는 직위, 탑의 지배자라는 칭호. 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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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모든 것을 위해 매번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사실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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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회의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비서가 고개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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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장님, 죄송하지만 전화가 왔습니다. 화연 길드의 정태연 길드장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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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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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씨발! 바쁘다고 해! 회의 중인 거 안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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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함에 회의실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보좌관이 하던 말을 멈추고 어색하게 자세를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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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연. 그 여자는 하루가 멀다고 전화를 걸어 탑은 언제 오를 거냐며 그를 들들 볶아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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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봐야 같은 A급이면서! 동업자를 이렇게 못살게 굴어도 되는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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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는 할 수만 있다면 법원에라도 달려가 이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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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동업자 간의 도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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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비서는 난처한 표정으로 물러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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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받으셔야 할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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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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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는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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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부어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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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비서에게서 휴대폰을 거의 빼앗다시피 받아 들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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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일은 진짜 간다고! 진짜 적당히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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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가 불만을 쏟아내려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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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것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즐거운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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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호 씨? 방금 탑 올랐더라? 축하해. 난 또 마지막 날까지 버티다 억지로 밀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결심했네? 정말이지 아주 기특해! 이대로 파업도 그만두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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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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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준비했던 모든 욕설과 분노가 머릿속에서 증발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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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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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는 어리둥절한 채로 의미 없는 소리만 내뱉었다. 정태연은 그런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용건을 마쳤으니 됐다는 듯 상냥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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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바쁠 테니 이만 끊을게. 수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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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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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가 끊겼다. 정만호는 멍하니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회의실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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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내가 뭘 잘했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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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도무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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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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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 속 다른 휴대폰에서 메신저 알림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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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급 헌터들의 공식 공지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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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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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철: 대한민국 대전 탑의 최고 등반 기록이 방금 28층으로 경신되었습니다. 정만호 님의 등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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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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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의 눈이 커졌다. 그는 메시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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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채팅방의 대화 기록을 훑었다. 온통 자신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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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 정만호 길드장님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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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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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한: 축하드립니다! 닉네임도 재치있게 바꾸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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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철: 우리 헌터 협회는 보시다시피 대한민국의 붕괴를 원하지 않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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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향한 수많은 축하 메시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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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기쁨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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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모두가 자신이 28층을 클리어했다고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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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연이 그에게 전화를 한 이유도 그것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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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자신은 분명 회의실에 있었다. 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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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탑을 깼다고? 대체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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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바로 헌터 협회 사이트에 접속, 탑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록된 닉네임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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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탑: 김수호 (5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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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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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탑: 정만호 옆집 팔찌 도둑 (28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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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팔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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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정만호의 머릿속에 한 아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며칠 전, 집이 흔들렸을 때 만났던 그 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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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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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설마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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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그 집 부모님이잖아! 젠장, 처음부터 느낌이 싸하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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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그 어린아이가 A급 헌터일 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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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그 아이의 부모가 정체 불명의 A급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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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할 때부터 이것까지 계획했던 것이겠지? 그 치밀함과 악랄함에 이가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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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끝내! 등반 취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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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회의실을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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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둥절한 간부들을 뒤로한 채 곧장 창고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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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임 없이 보관해 두었던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1회용 방어 아티팩트가 담긴 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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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당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물건이 한 상자 가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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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는 상자를 옆구리에 낀 채, 주차장으로 달려가 자신의 검은색 세단에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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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구슬려서 우리 길드로…. 아니, 최소한 동맹이라도 맺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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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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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음과 함께 정만호의 세단이 집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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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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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탑에서 돌아온 직후,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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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내가 며칠 전부터 준비해 둔 팻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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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파고 팻말을 단단히 고정시킨 뒤, 한 걸음 물러서서 나의 작품을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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팻말에는 내가 페인트로 직접 쓴 문구가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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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탑의 지배자가 거주하는 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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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구역은 어린이 보호구역이므로, 반경 200m 이내에서는 제한속도 20km/h를 유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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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과속 시 타이어가 펑크 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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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경고 문구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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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팻말을 툭툭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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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동네 어린이의 등하교 안전은 내가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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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작업을 마쳤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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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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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급정거 소리와 함께 헤드라이트 불빛이 나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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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색 고급 세단 한 대가 내 집 앞에 거칠게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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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였다. 올 거라고 생각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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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가 내게로 다가오다가, 내가 막 설치한 팻말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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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얼굴이 팻말과 나를 번갈아 오가며 경련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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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대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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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팻말을 한번 쓱 쳐다보고는 해맑게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의 순진한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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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거요? 부모님 심부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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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부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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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의 얼굴에 당혹감이 역력했다.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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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 그래. 부모님은 지금 어디 계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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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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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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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의 얼굴은 어지간히도 혼란에 빠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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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뒤에 서 있는 번쩍이는 검은색 세단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화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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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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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차를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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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가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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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치 새끼를 지키는 어미처럼 차를 온몸으로 막아서며 절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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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것만은 안 된다! 이건 내 영혼과도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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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냥 한번 태워달라고요. 드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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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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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정만호의 얼굴이 민망함으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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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마지못해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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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타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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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는 정만호의 영혼이 담긴 세단에 앉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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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묻자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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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같아서는 운전하게 해달라고 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건 무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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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키가 작아서 못할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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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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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나는 내비게이션에 익숙한 주소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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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로 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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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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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창밖 풍경을 구경하는 척하며 힐끔힐끔 그의 표정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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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는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서도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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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내 부모님, 즉 새로운 탑의 주인과 접촉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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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곧 깔끔한 신축 건물 앞에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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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타 매니지먼트’라는, 여전히 적응 안 되는 이름의 간판이 붙어 있는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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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찾아가고 했던 허름한 오피스텔은 이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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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세워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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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멈추자 나는 휴대폰을 꺼내 브로커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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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저예요. 잠깐 내려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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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초 뒤, 건물의 유리문이 열리고 익숙한 인영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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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창문을 내리고 그에게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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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커는 의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정만호의 차 뒷좌석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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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세요,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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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조수석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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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석에 앉은 정만호와 옆 자리의 브로커 사이에 어색하고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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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가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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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혹시, 보호자 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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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닙니다. 아니지,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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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커는 부인하다가 긍정하는 둥 정신이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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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매니저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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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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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의 얼굴에 실망과 혼란이 동시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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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드라이브가 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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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안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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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어색한 공기를 즐기며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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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참다못한 정만호가 먼저 끙, 하는 소리를 내며 조수석의 브로커에게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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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매니저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철혈단의 정만호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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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습니다. 대전의 주인 아니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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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아니게 됐지만 말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 아이의 부모님…. 그러니까 대표님을 꼭 한번 뵙고 싶은데, 자리를 마련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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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브로커는 잠시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곧 프로페셔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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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하지만 그건 어렵습니다. 저희 대표님께서는 당분간 외부에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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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의 얼굴에 노골적인 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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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에 다시 도착했을 때, 정만호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차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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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들고 왔던 선물 상자를 내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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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부모님께 전해드리렴. 내가 주는 선물이라고 꼭 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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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 안에는 1회용 방어 아티팩트가 가득 들어있었다. 꽤 비싼 물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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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순순히 선물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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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간절함을 더 이상 외면하기 힘들어 명함을 한 장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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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에는 ‘원스타 매니지먼트’라는 이름과 함께 브로커의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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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이쪽으로 연락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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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는 명함을 받아 들고 잠시 망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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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겠다. 오늘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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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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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차를 몰고 사라졌다. 손에 들린 묵직한 선물 상자가 꽤나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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