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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는 난장판이 된 가게를 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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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마법으로 빗질을 하는 풍경을 보는 것은 꽤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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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그가 딱 두개 남아있던 커피잔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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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익숙하게 잔을 들어 새까만 액체를 한 모금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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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입에 대어 보는 블랙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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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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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가 혀에 닿는 그 순간, 나는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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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써. 너무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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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를 마비시키는 듯한 쓴맛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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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물처럼 마시던 것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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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도저히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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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조차 완전히 어린애가 되어버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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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은 김수호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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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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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는 커피를 내리는 동안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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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밖에 없네. 네가…. 그 뉴비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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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는 믿기 힘든 현실을 받아들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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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소녀의 모습을 한 내가, 인터넷과 세상을 뒤흔든 정체불명의 랭커이자 마법사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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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전히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미세한 혼란이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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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이어가면서도 자꾸만 딴생각에 빠지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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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대로는 어색해서 못 견디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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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 나는 가벼운 스몰토킹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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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그 마법사 된다는 댓글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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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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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달고 다니는 것 같던데, 목적이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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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질문에 김수호의 눈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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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쩐지 그가 내게 굉장히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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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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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는 몇 번이나 말을 고르는 것 같더니, 이야기의 주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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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너 진짜로 흙을 30일 동안 먹은 거야? 어째서? 그냥 내 댓글 하나만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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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념글을 갈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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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 이유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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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러다 운좋게 각성하면 좋은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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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을 오르는 건? 엄청 무섭고 힘든 일이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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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딱히? 별 거 아니었어요. 제가 좀 마법 재능이 넘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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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무리 그래도. 하아…. 이걸 어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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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그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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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별로 깊게 파고들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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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덕분에 나는 마법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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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면에서는 눈앞의 이 남자가 내 은인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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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헌터라면 남에게 말 못 할 비밀 한두 개쯤은 있는 게 당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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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영 불편한 모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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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풍뎅이라는 닉네임 뒤의 그를 꽤 편하게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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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갤러리에서 나눈 대화가 몇 번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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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작 눈앞의 김수호는 엄청나게 어색해하고 불편해하는 것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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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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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내게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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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 같아도 커뮤니티 정모를 했는데 진짜 여중생이 나오면 당황스러울 것 같긴 해. 그것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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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렇지 않게 커피잔을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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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달랑거리며 상대를 관찰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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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는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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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양손으로 머그잔을 감싸 쥐고 있었지만, 커피를 마시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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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내 얼굴과 커피잔, 그리고 창밖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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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그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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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휴,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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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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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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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편하게 하세요. 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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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미안. 그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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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멋쩍게 웃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지만, 여전히 전혀 편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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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한 침묵이 다시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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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적을 깬 것은 김수호의 마른기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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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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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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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저도 모르게 기침을 터뜨린 순간, 카페 안에 바람이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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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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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의 작은 테이블이 반으로 쪼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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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두 잔의 커피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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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를 아주 다 작살내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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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단 한 방울의 커피도 내게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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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커피가 내게 쏟아지기 직전, 내 몸 주위로 얇은 모래 방벽이 자동으로 생성되며 액체를 완벽하게 막아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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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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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정신을 차리고는 얼굴이 새파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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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허둥지둥 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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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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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은 기침만 해도 테이블이 부서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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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짓궂은 농담에 김수호의 얼굴이 이번엔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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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게… 평소엔 정말 안 이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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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갤러리에 올려도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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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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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김수호 만났는데, 내가 너무 귀여워서 그런지 긴장해서 떨더니 카페 박살 내더라…. 뭐 이렇게? 사진만 한 장 찍어도 념글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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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흡.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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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김수호의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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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하게 굳어 있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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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한 미소가 아닌, 진짜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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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까지 나를 대하던 조심스러운 태도를 버리고,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친구에게 말하듯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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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그는 풍뎅이로 돌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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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근데 진짜 너무 당황스러워서 그래. 모습이 너무 생각했던 거랑 달라도 너무 달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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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어떤 모습을 상상했길래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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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나랑 비슷한 나이라고 생각했지. 너 같은 애가 탑을 오르고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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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파라 정모에 나갔더니 진짜 초등학생이 하나 나온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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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진짜 갤러리를 몇 살 때부터 한 거야? 하아…. 진짜 이게 무슨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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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가 이마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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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모습을 보며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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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마실 커피도 사라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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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협회로 가죠? 너무 오래 있기도 뭐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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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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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김수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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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란히 텅 빈 거리를 걸어 헌터 협회 건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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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의 결계가 만들어낸 비현실적인 고요함 속에서, 우리의 발소리만이 유일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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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회 건물 안 역시 텅 비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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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는 익숙하게 나를 등록 및 측정 시설이 있는 안쪽으로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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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정할 직원도 없어서, 내가 직접 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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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가 거대한 측정 장비 앞에 서서 단말기를 조작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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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에 복잡한 코드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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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등록 절차를 시작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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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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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에, 신분증이 될 만한 거는 있어? 학생증이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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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품속에서 빳빳한 카드를 꺼내 그의 앞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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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등록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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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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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증명사진 속의 내 사진과, 실제 내 얼굴을 몇 번이고 번갈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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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라고? 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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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에 담긴 노골적인 불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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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속으로 살짝 찔렸지만, 최대한 당당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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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육부진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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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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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는 오늘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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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단말기에 내 신분증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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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에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자, 곧 관련 정보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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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자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이름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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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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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 역시 안되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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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단번에 이 신분증이 가짜라는 것을 알아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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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선이 다시 날카롭게 나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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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어디서 구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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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걸로 해줘요. 원래 이름은 못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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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대답은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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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도, 설명도 없이 그저 요구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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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는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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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선이 잠시 허공을 향했다. 마치 먼 과거의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한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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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이나 이어지는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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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그가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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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아무튼 살아남는 게 우선이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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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결정을 내린 듯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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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해줄게. 하지만 착각하지는 마. 네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그냥 들어주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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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가 내 가짜 신분증을 단말기 위에 올려놓고, S급의 권한으로 시스템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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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어설픈 물건에 목숨을 맡기게 둘 수는 없어. 내가 직접,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진짜로 만들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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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몇몇 곳에 한참이나 연락을 돌리더니, 다시 주민등록증을 내게로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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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이걸 만들어 준 브로커에겐 다시는 가지 마. 어둠에 발을 들이는 건 한 번으로 족하니까…. 이제 A급 자격도 생길 테니, 더욱 갈 필요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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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커 아저씨를 버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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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건 곤란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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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가 이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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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 가지 더. 이걸로 등록하면 네 진짜 이름은 영영 사라지게 될 텐데.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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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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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내 새로운 신분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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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 이름은 김한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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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미 죽었을 누군가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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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 이름이 세상에 공개될 일은 한동안은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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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등록 절차는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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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은 것은 A급 헌터의 자격을 증명하는 공식적인 테스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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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는 나를 데리고 방 안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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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방 안에 들어서자, 그 안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온갖 종류의 측정 장비들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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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각종 스텟, 마력 총량, 스킬 출력 등 종합적인 데이터를 측정하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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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가 장비들을 하나씩 가리키며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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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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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힘을 좀 숨겨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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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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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너무 세게 하면 곤란해질 수도 있잖아요. 적당히 A급 커트라인에 맞춰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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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김수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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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럴 필요 없어. 일단 네 최대치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나도 대처를 할 수 있으니까…. 데이터는 내가 알아서 적절하게 조작해 둘 테니, 걱정 말고 전력을 발휘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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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에 나는 안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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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트는 간단한 건강검진과 신체 능력 측정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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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상태는 완전 양호. 다행이군…. 세상에, 근력 스텟이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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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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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급 전사의 평균 정도? 올스텟 보너스 때문인가 본데…. 말도 안 되네. 법사가 이 스텟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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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기대하시죠. 마력 스텟은 더 대단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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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대망의 마지막 테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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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 측정의 시간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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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수정 구슬이 박힌 거대한 기계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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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 주변으로는 복잡한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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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장난기가 발동해 씨익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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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내가 측정하면 기기 고장 나고, 펑하고 터지는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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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클리셰 가득한 농담에 김수호도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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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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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수정 구슬 위에 내 작은 손을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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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 안에 흐르는 모든 마나를 남김없이 끌어모아, 단 한순간에 기계 안으로 쏟아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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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우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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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구슬이 격렬하게 진동하며,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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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섬광이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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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이이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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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전체에서 퍼지는 날카로운 경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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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구슬 표면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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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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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수정 구슬이 산산조각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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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으나 나는 방벽 때문에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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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에서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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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내 걸작을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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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지. 이거야. 역시 이 정도는 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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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역사적인 순간을 남기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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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 갤러리에 올릴 절호의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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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진을 찍으려던 바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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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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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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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돌리자, 김수호가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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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박장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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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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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물음에 그는 겨우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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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일부러 좀 제한이 낮은 걸로 냅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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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어째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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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넌 이런 거 좋아할 것 같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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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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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얼굴에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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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멋진 주인공 놀이가 사실은 작은 연극에 불과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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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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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빨개진 얼굴을 본 김수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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