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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는 바둑판 위의 검은 돌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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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맞은편에는 흰 돌을 쥔 아이가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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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정체를 모르는 옆집 헌터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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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어제 그런 일이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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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여전히 오목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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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들은 이야기는 정만호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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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아는 사람을 도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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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도움이라는 것도 듣자 하니 게임 속의 이야기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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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애들이 한다는 로블록스인가 하는 그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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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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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알만 무심하게 만지작거리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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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걸 왜 나한테 말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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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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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하다 친구 생긴 이야기를 왜 자신에게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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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나, 아니면 부대표라는 그 사람에게 할 법한 이야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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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는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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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며 쑥스러운 듯 볼을 긁적이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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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는 문득 아이의 부모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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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한 헌터지만, 좋은 부모는 아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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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강력한 헌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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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탑을 단숨에 차지하고, 협회장마저 벌벌 떨게 만들 정도의 존재들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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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동시에, 좋은 부모는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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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애를 어떻게 키웠기에, 이제야 겨우 첫 친구가 생긴 것 같다는 말을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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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요즘 같은 세상이지만, 학교도 안 보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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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니, 이 아이가 부모와 함께 있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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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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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는 눈앞의 아이가 조금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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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나도 학교에 가본 적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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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무슨 소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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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의 생각이 거기에 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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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부모님이나 부대표님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냐는 질문은 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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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걸 묻는 것은 좋은 어른이 아니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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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이 교정 프로그램에서 봤으니 확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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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마음을 좀 열었나 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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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선물했던 마법소녀 변신 벨트가 효과가 있었던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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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잘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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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가 속으로 추측하고 있을 때에도 눈앞의 아이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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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은 혼잣말에 더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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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뭐랄까…. 기분이 되게 좋았거든요? 그냥 게임 랭킹 1등 했을 때랑은 좀 다른 느낌으로요. 꼭 친구가 생긴 것 같기도 하고…. 뭐, 진짜 친구는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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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는 조금 더 호감도를 쌓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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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그랬구나. 정말 잘했네. 친구를 도와주는 건 아주 멋진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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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이건 자신이 생각해도 끔찍한 국어책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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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런 말은 전혀 자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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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인 것은 상대가 눈치채지를 못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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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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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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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한 표정으로 다시 되묻는 것을 보고 정만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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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금쪽이 해결사 선생님의 방송을 매주 챙겨본 게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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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대로만 가면 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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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도 좀 져주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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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가 후공인 상황. 그가 검은 돌을 뒤따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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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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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바로 아이도 흰 돌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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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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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정만호의 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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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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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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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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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내 자신의 흰 돌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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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오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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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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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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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이긴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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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과장된 몸짓으로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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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내가 졌다고? 세상에, 이걸 어떻게 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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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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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똑똑한데? 이거 오목 천재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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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는 아이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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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들은 칭찬을 좋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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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이 선생님도 무조건적인 칭찬을 해주라고 하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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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이의 반응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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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싸늘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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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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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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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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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아이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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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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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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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유치원생으로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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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으응? 아니! 그럴 리가! 완전 어른이지, 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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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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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는 식은땀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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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이럴 때 금쪽이 선생님은 뭐라고 말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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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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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대 게임을 하려면 아슬아슬하게 지던가? 대체 이게 뭐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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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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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이 완전히 깨져버린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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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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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휙 돌아서서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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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거실에 홀로 남겨진 정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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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쓱함이 온몸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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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을 내쉬며 주차해 둔 자신의 차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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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역시 애는 너무 어렵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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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는 중얼거리며 액셀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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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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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호가 떠나고 집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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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침대에 드러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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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흥이 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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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과 놀아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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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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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형체가 기어 나왔다. 초호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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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아무 말 없이 거실 한쪽에 내버려 뒀던 오목판과 바둑알 통을 낑낑대며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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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내 앞에 얌전히 내려놓고,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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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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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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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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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이 오목의 규칙을 이해할 수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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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녀석이 이런 고급스러운 지적 유희를 즐길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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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전히 심심하기도 했고, 녀석의 끈질긴 시선을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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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딱 한 판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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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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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결과는 내 예상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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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처참하게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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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규칙 자체는 이해한 모양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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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호기는 완성된 나의 오목을 보고 울상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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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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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더. 이번에는 네가 먼저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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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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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방금 전 정만호가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게임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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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초호기가 다섯 번째 돌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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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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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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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정적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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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호기는 자신의 돌과 내 돌을 번갈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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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자신이 이겼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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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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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호기는 두 팔을 번쩍 들고 그 자리에서 방방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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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로도 모자라 내 주변을 뱅뱅 돌기 시작하는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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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 나름의 승리의 세리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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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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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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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 그렇게까지 좋아할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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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의 순수한 기쁨이 조금은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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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순간, 정만호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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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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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 상황에서 일부러 져주는 거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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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아저씨 눈에는 내 모습이 저 녀석처럼 보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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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노골적으로 져줘도,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할 수 있는 수준의 나이로 보인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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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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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휴, 탑이나 들어갔다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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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충분히 쉬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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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등반을 시작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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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레벨업 타이밍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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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36층(EXTREME)에 진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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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알림과 함께 바뀌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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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30 층대의 후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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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 작거나 큰 변화가 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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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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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번에도 내 예상과 다른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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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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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가득 메운 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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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화려한 깃발과 꽃가루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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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건?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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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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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을 둘러보아도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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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곳에 내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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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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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 눈에 익숙한 문양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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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펄럭이는 깃발들, 건물 외벽에 걸린 거대한 현수막, 심지어 아이들이 들고 있는 작은 손깃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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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곳에 황금빛 모래시계가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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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봐도 내 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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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가 바뀌었다고는 했지만, 이 정도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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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나타난 곳은 광장의 정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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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탁 트인 무대 같은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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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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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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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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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들 누군가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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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소음이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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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져나가는 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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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광장을 가득 채운 수천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내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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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현자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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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현자님께서 돌아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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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을 깬 것은 거대한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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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울리며, 내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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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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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처음 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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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댓글 수백 개가 달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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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으로 수만 명의 시선을 받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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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런 거 못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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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채로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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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파가 양옆으로 갈라지며 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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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얼굴들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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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왕관을 쓴 국왕과, 그 옆을 호위하는 기사단장 시모어, 그리고 한층 더 성숙해 보이는 샤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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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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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내게 달려온 것은 샤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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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에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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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시모어 역시 감격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 직위 때문인지 자세는 좀 더 조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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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아주실 줄 알았습니다. 이 얼마나 영광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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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하게 떨리는 왕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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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왕이 한참이나 어린 모습의 내게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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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왕이 함부로 고개를 숙여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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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놀라거나 제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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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이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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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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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광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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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비현실적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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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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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 때문에 손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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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건 진짜 사진 찍어놔야 할 텐데. 완전 신문 기사감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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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의 불안 속에서도, 머릿속 한편에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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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을 어떻게든 남기고 싶다는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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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경을 액자에 걸어놓고 몇 번이고 다시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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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정말로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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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과 불안, 쾌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기묘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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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나와는 정반대로, 내 옆의 초호기는 이 상황을 백 퍼센트 만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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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깃발을 들고, 가슴을 편 채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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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자신이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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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저 녀석은 나르시시즘 성향이 있는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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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휴 누굴 닮아서 저런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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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던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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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 기묘한 광경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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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은 사람들의 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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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 펄럭이는 모래시계 깃발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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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윳빛의 광점들이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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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개의 빛 덩어리가 한 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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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초호기가 들고 있던 깃발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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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깃발이 공명하듯 백색의 빛을 발하며 주변의 빛들을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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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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