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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산 부윤 장원평은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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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하들을 전부 물리고 방 안에 홀로 남은 상황이었다. 갑작스런 풍파를 겪기라도 했는지 심력 소모가 큰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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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품의 고관이다. 한 도시를 다스리는 부윤이라면 조정에 굳건한 연줄을 두세 개쯤은 가지고 있기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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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다스리는 도시에서는 웬만한 대문파도 그의 눈치를 살피며 함부로 날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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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 지방관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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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산전수전 다 겪은 그가 지친 기색을 대놓고 드러냈다. 공무로 눈코 뜰 새 없었을 시각인데도 수하들을 물리고 심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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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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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흘깃, 황태자가 보낸 전서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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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을 읽어봐도 적혀있는 내용이 바뀌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믿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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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가 어떤 사람인지 악산 부윤은 잘 알았다. 냉혹하고 칼 같은 사람이다. 부친의 패왕과도 같은 기질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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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들에게는 명군이나, 신하들에게는 폭군이다. 신임하는 환관이 비리를 저지르자 눈도 깜빡하지 않고 삼족을 멸한 일화는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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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몹시 오만하고 거침없었다. 대리청정한 기간이 십 년은 족히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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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관이 되기도 전에 후계 구도를 완전히 확립했다. 그의 형제들은 촌구석을 다스리는 친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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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발했던 황족들은 전부 군부에게 끌려가 참수당했다. 문무백관은 물론이고, 황제가 공인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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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인물이 벗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방금 전까지 조찬을 함께했던 여인을 칭하는 단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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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기를 거스르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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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손은 물론이고, 태자비에게도 무심했던 황태자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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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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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생각이 다 들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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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색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기에 목울대를 치고 오르려는 공대를 가까스로 참아냈다. 사정하여 가까스로 조찬을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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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잡아두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조찬 중에도 불편한 기색을 숨김없이 드러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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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상단이 운남으로 편히 향할 수 있도록 통행증을 뚫어주니 그제서야 호흡이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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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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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해 처신했다. 초반에 권태로운 기질을 드러내지만 않았더라면 완벽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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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는 하늘에 맡기는 것 말고는 별다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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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라도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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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진심으로 벗이라 생각하여 그리 말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황태자로부터 막중한 임무를 받은 신하라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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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남은 전쟁터와 직접적으로 맞닿아있다. 온갖 사마외도가 발호했고, 점창파는 자신들의 영역을 막아내기에도 급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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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악산 부윤의 뇌리에 일월상단의 목적지가 스쳐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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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대리국이 있던 땅으로 가는 중이라 했다. 점창산(點蒼山)이 코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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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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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검 대주들의 신상은 극비다. 정2품 총독 정도는 되어야 그들의 용모파기를 직통으로 받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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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검이 무림인과 부패한 관리들의 사신으로 군림할 수 있게 된 가장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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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도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성별조차 밝혀지지 않은 대주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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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산 부윤은 눈을 감고 가능성을 따져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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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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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대주를 벗이라 칭했을까? 차기 단주감이 아니고서야 그럴 수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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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천명검의 힘을 생각하면, 단주 한 명은 너무 적었다. 기존 단주를 원로원으로 이동하고, 새 단주를 임명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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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음혈종 장로를 상처 하나 없이 살려서 추포해오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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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 목이 잘릴 뻔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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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산 부윤은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대주들이 가졌다는 즉결처분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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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사 너머의 외모를 보지 못했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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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면 황태자비를 갈아치운다고 착각했을테니, 맘 편히 잘 수도 없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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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편보다 지금이 훨씬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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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은 눈발이 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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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잔뜩 쌓인 산길을 거니는 인파가 적지 않았다. 다들 걸음을 바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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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땅에 들어온지 한참 지났는데, 이제는 괜찮은 것 아니에요? 다리가 너무 아파요. 마을 어르신들도 한참 전에 뒤쳐졌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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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남에서 난리가 났다더니, 참말이었나보다. 피난민들이 끝도 없이 쏟아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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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창파의 도사들은 대체 무얼 하길래 사마외도들이 날뛰는 것을 방조하고 있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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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조는 무슨. 산하 문파들이 죄다 패사했다는 소문이 이미 파다해. 점창산에 틀어박혀 방어에 집중하고 있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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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멸문이라도 하는거 아닌가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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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이야기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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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바뀔 때마다 운남에 관한 소문이 흉흉해졌다. 피난민들의 수가 그를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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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사마외도로 인한 것만은 아니다. 안 그래도 땅이 척박한 운남이었다. 흉년까지 겹치자 버티지 못한 민초들이 사천으로 피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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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군이야 전쟁을 치르느라 바쁘다고 쳐도, 천명검은 대체 무얼 하고 있는건가? 손가락만 빨고 있지는 않을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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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이 장강 이남으로 향했다더군. 그쪽은 완전히 피바람이 불고 있는 모양이야. 운남은 그에 비하면 안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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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외도들도 영악해. 민초들만 건들지 않으면 황군이 나서지 않는 것을 아는 것이지. 교묘하게 점창파만 노리고 있다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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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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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자잘한 나무토막을 쥔 손목을 움직였다. 마차에서 조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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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조각칼을 움직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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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 검을 뽑는 일이 잦았으나, 어디까지나 그녀의 본은 조각이었다. 화련도 조각을 가르치려 제자로 들였던 것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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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추 감이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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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이 근처 객잔에서 저녁을 해결하러 떠난 도중에도 서연은 조각을 계속했다. 새로운 초식을 창안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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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상단이 가지고 다니던 서책들을 참고하여 비연천공을 마저 완성하는 것도 함께였다. 최소한 이번 여행이 끝나기 전까지는 심공을 완성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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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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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을 계속하다보니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각예에는 찌르기라 할만한 동작이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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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베는 동작이다. 검을 들고 펼치는 도법이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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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를 나무로 한정했을 때에는 그러했다. 범위를 암석까지 넓혀야 가까스로 찌르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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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베기, 종베기, 찌르기를 합쳐서 삼재검법이라 했다. 기초에 해당하는 것을 빼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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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하는 각예도 가르쳐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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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눈을 감은 채로 심상 속에서 유검(遊劍)을 펼쳤다. 유랑하며 만든 검이라 하여 유검이라 이름 붙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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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당소소를 구할 때 펼쳤던 검술이 유검의 첫 번째 초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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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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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들고 있던 나무조각에 부월을 올려친 듯한 궤적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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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으로 초식을 펼치면 이런 검흔이 남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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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검으로 펼치면 어떻게 될지 의문을 느꼈다. 곧바로 조각칼로 검흔을 새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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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다룬 세월보다 조각칼을 다룬 세월이 압도적으로 길었다. 기상천외한 기예가 손끝에서 자유자재로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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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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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조각을 겉면에 만개하는 꽃과 같은 검흔이 새겨졌다. 심상 속에서 나타난 녹림오호가 부법을 제대로 펼치기도 전에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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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고절하기는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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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가 짧아서 그런지 검을 사용할 때보다 위태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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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심상 속에서 검법을 보완하고자 했다. 한 손에는 검을, 다른 손에는 쥘부채를 든 채였다. 쌍검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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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쌍검은 무기를 하나만 다루는 것과는 격이 다른 난이도라 했다. 허나 서연에게 해당되는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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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하기 무섭게 두 자루 신병이기가 날개처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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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부채가 일으킨 바람이 검이 나아갈 길을 열어준다. 덕분에 검이 반 호흡 빠르게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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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 속의 녹림오호는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반으로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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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초는 파풍유영(破風遊影)이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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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새로운 초식을 창안하면, 눈을 뜨고 심상 밖으로 빠져나와 나무토막과 서책에 차례로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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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흔이 순식간에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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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의 고수들이 어찌하여 심상 수련에 열을 들이는지 알 것 같았다. 무학을 창안하는 데에 있어 이만한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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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싸워보면서 보완도 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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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아쉬운 얼굴로 나무토막을 응시했다. 흑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섯 초식을 채 견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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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운남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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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남성의 몇 배는 되는 대리석들이 널려있다고 했다. 그것으로 조각을 하면 필히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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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마차 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문이 열렸다. 음식을 잔뜩 싸들고 온 당소소가 놀란 얼굴로 서연을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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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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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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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소소의 뒤에서 따라오던 화련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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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 밖으로 나가시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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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보니 같이 먹으려고 객잔에서 음식을 여기까지 싸온 듯했다. 서연은 기특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음식들을 건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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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이렇게 많이 싸왔어? 그렇게 배가 고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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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좋아하실지 몰라서 다 준비했다고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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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소소는 웃으면서 마차 가운데에 탁자를 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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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은 가만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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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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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련이 물잔, 젓가락 등을 챙겨서 서연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동안 연습이라도 한 것인지 행동이 매우 능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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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월 어르신은 객잔에서 드신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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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차 뒤편에 탁자가 있으니 가져다 쓰라고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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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소소가 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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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주께서 대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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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다고 말씀은 드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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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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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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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소소는 예의가 바르구나. 당가주께서 아주 잘 가르치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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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소소는 무표정한 얼굴로 꾸벅이면서 음식을 마저 차렸다. 꽤 큰 탁자였는데도 음식으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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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음식을 나르는 당소소와 화련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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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어울리는구나. 사저와 사매라고 해도 믿겠어. 입문 시기를 생각하면 소소가 사매가 되겠지. 하여간 난 운이 좋구나. 맛있는 음식도 챙겨다주는 제자도 있으니 말이야. 이제 얼추 된 것 같으니 들어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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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노점상에서 당과라도 하나 챙겨오려던 화련이 자연스럽게 방향을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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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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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죽립과 면사를 벗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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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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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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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둘 앞에 놓인 잔에 물을 따라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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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련이도 소소 옆에 앉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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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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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마차 안이 향긋한 음식 냄새로 가득 찼다. 뭐라고 더 말을 하려다가, 웃음이 절로 나와서 그럴 수 없었다. 당소소와 화련의 표정을 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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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련아, 소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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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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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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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한 마디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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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사형제로 삼는 것은 어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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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당소소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뜨고, 화련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질투의 기미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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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제 밑에 누가 생긴다는 사실이 기꺼운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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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당소소를 보며 즐거이 웃었다. 여태껏 그녀가 보였던 그 어떤 표정보다도 극적인 감정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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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소소 사매가 마음에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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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련이 눈치껏 말하자, 서연이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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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이번에 당소소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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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는 어떻게 생각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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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소소는 달아오른 얼굴의 열기를 느끼며 더듬더듬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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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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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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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먹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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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 으레 할법한 정겨운 말을 덧붙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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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독이 있나 먼저 살피겠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화련 사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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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기미(氣味)라도 하려는 듯 보였는데, 긴장한 탓에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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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매, 독 없어? 이제 먹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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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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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소소는 곧장 답하지 못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음식을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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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들을 겨우 삼킨 당소소가 숨이 찬 목소리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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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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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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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해가 질 때까지 웃으며 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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