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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겠지만, 저희 상단에는 주력 상품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습니다.”
노상인은 서연에게 차를 따라주며 그런 말을 했다. 점소이가 고개를 조아리는 것을 보니, 그의 연줄이 먼 운남까지 닿아있는 듯했다.
“그래서 천하를 주유하며 온갖 물품을 사다 모으지요. 굳이 따지자면 잡상인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르신, 어떤 잡상인이 수천 리를 누비며 다니겠습니까. 자부심을 가지셔도 될 듯합니다.”
“허허.”
노상인은 탁자에 둘러앉은 이들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소개가 늦었군요. 이 늙은이는 송월(宋月)이라 합니다.”
어쩌다보니 합석하게 된 당소소와 화련도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둘다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알았다.
“사천당문의 당소소라 합니다.”
“저는 화련이에요.”
서연은 따로 제 소개를 하지 않았다. 노상인이 제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월 노인이 당소소에게 말했다.
“사실 이 늙은이가 객잔에 방문했을 때부터 당문의 금지옥엽이 계신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상인의 고질병이지요. 혹여 누추한 시선에 언짢음이 있었다면 용서하십시오.”
“천만에요, 괜찮습니다.”
여든이 훌쩍 넘어보이는 노인이 그리 말하자, 당소소도 나름의 표정관리를 했다.
“어르신께서는 이제 하남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서연의 질문에 송월 노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통 한 번 상행을 떠나면 새외까지 나갑니다. 다행히 이 늙은이가 헛살지는 않은 덕에 이곳저곳에서 도움을 많이 받지요”
곧 송월 노인이 품 속에서 낡은 지도를 꺼냈다.
“이번에는 아마, 운남에서 새로 발견되었다는 대리석 광산의 경매를 들를 생각입니다. 그 다음에는 북서쪽으로 꺾어서 남목림(南木林)까지 가겠군요. 그 이후에는 잘 모르겠습니다. 본래라면 남만이나 서역에도 한 번씩 방문했을 터인데, 국경 상황이 심상치 않은 터라 그럴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금룡상단 정도 되는 상단에만 허가증을 내주더군요.”
서연은 송월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발이 넓은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남목림이라면 서장에 위치한 고산 마을인데, 멀지 않은 곳에 주무랑마(珠穆朗玛 : 에베레스트)가 위치해 있었다. 여든이 넘는 노인이 거기까지 간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송월 노인에게서 기이한 느낌을 받은 채로 서연이 입을 열었다.
“어르신께서 아주 정정하신 모양입니다. 혹시 과거에 무공을 익히셨습니까?”
그 말에 송월 노인이 또렷한 눈빛으로 서연을 주시했다.
“익혔었지요. 사실 이 늙은이가 소싯적에는 꽤 잘 나갔습니다. 지금처럼 새외로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는 것도 전부 그때 덕을 쌓아놓은 덕분이지요. 물론 지금은 예전만 못합니다.”
송월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주름진 오른팔을 슬쩍 내밀었다. 근맥이 잘려나간 흔적이 선명했다.
“이건 어쩌다가…….”
“지금이야 황상께서 단단히 중심을 잡고 서 있어 정사마 간의 분쟁이 드물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포로를 멀쩡한 상태로 붙잡아 두는 경우가 드물었지요. 보통 단전을 폐했고, 사지근맥을 자르는 일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 늙은이야 외공을 익혀 아직 걸어다닐 수는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얼마 버티지 못했습니다.”
섬뜩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살아남은 사람이 내뿜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다행히 상단 일을 하느라 이곳 저곳을 꾸준히 돌아다닌 탓에, 다릿심만큼은 웬만한 젊은이들 못지 않습니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외공 수련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송월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미소지었다.
단전을 잃은 무림인의 십중팔구가 절망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송월 노인은 참으로 뛰어난 정신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저 마음가짐만큼은 배울 만했다.
능히 비연천공에 추가할 만했다.
예전이라면 이렇게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제 자질을 깨달은 이후로 서연은 심상의 한계를 정하지 않았다.
절세고수가 될 자질이라 했다. 한계를 정해둘 이유가 없었다. 이런 대화에서도 능히 배움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마음이 동하니 혈맥을 맥동하던 진기가 호응하듯 움직였다. 호흡 몇 번으로 세맥이 단단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연천공이 이전보다 더 완성에 가까워진 것이다.
따로 종이에 꺼내 적을 필요는 없었다. 구결을 떠올린 순간 뇌리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
문득 서연을 지켜보던 송월 노인의 몸이 얕게 떨렸다.
“왜 그러십니까?”
서연의 물음에도 송월 노인은 곧장 답하지 않았다. 그는 물을 마시고 나서야 구겨졌던 안색을 풀었다.
“사실 이 늙은이가 견문이 넓습니다. 살면서 한 명도 보기 힘들다는 절세고수를 셋이나 뵈었지요. 무당검선, 사마련주, 그리고 교주가 바로 그들입니다.”
“교주라고 하심은.”
“예, 천산(天山)에 있는 그 교주가 맞습니다.”
송월 노인은 옅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
“검선은 소탈한 사람입니다. 검선보다는 걸선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지요. 하늘을 이불 삼고, 산을 베게 삼아 천하를 주유합니다. 무당산에 기거하는 날이 손에 꼽지요. 기인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그래도 사마련주보단 낫습니다. 검선은 적어도 장문인 역할은 제대로 하기 때문이지요. 예측 불허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리는 사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은 교주인데, 직접 평가하기 두려운 자입니다. 헌데 손님에게서 새어나온 기도가 그들의 젊었을 적과 유사하여 저도 모르게 당황했습니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예전이었다면 이해하지 못했겠으나, 당가주에게 자질을 전해들은 이후였으니 납득했다. 허나 서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송월 노인이 다시금 침음을 흘렸다.
그는 다 식은 차를 마저 들이킨 다음 입을 열었다.
“손님.”
“예.”
“혹시 일행 분들과는 어떤 관계신지요?”
송월 노인의 말에 서연은 일행을 다시 소개했다.
“이 아이는 제 제자입니다. 그리고 소소와는 뜻이 맞아 동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군요. 보통 관계가 아닌 듯 하여 여쭈었는데, 이 늙은이의 짐작이 맞은 듯합니다.”
“헌데, 그건 어찌하여 물으셨는지요.”
서연의 질문에 송월 노인이 별것 아니라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의 실력이 뛰어나신 듯하여 동행을 청하려 했습니다. 허나 어린 제자를 데리고 다니시는 듯하니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여기까지 호위 없이 오신겁니까?”
송월 노인이 그건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은 상단에서 고용한 호위가 있었는데, 사천 땅으로 오는 중에 변을 당했습니다. 듣자하니 영약에 눈이 먼 사파 무리들이 발호했다고 하더군요. 천명검 패검대가 돕지 않았더라면 이곳까지 닿지 못했을 것입니다.”
암단화 사건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연륜 있는 상단주가 어찌하여 호위도 두지 않았는지 궁금했는데, 그런 내막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단단히 준비했다 쳐도 일월상단은 기껏해야 중소 상단에 불과했다. 그만한 일에 휩쓸리고도 호위만 잃은 것이 용했다.
잠시 고민하던 서연이 말했다.
“운남까지는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마침 대리(大理)로 향하던 중이었던지라.”
“혹, 손님께서도 대리석 때문에 그곳으로 가시던 중이셨습니까?”
“예.”
송월 노인은 화련과 당소소를 차례로 응시하다가 이전보다 훨씬 편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래주신다면 감사하지요. 혹시 원하시는 물품이 따로 있으십니까? 본래 돈으로 드리는 것이 관례이나, 손님께서 돈이 부족해 보이지는 않아서 말입니다. 예전에 사가셨던 재료들도 가지고 있는데, 그것으로 대신할까요?”
점토나 흑단 같은, 조각에 쓰는 재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서연도 돈보다는 그러한 재료들로 받는 것이 더 유용해 보였다.
예전에 화련을 처음 받았을때도 일월상단에서 점토를 구해다 썼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해주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것 말고 제가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 있을까요?”
“탈 것이 있으시다면 챙겨오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음식은 저희 쪽에서 챙길테니, 따로 챙겨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내일 진시(辰時)에 이 객잔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곧 송월 노인은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몇몇 상단원들이 그를 뒤따랐다.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당소소가 입을 열었다.
“……인피면구는 아닙니다. 무공을 잃었다는 말도 사실인 듯하고요. 전전 세대의 인물이라 얼굴만 보고 정체를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간이 보통 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왜요?”
화련의 질문에 당소소가 답했다.
“교주는 평가하기 두렵다면서, 정작 검선과 사마련주는 아무렇지 않게 평했습니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저는 사마련주가 아주 무서운 사내라는 것은 압니다. 옛 혈교 교주마저도 힘으로 복속시킨 인간이 사마련주 아닙니까.”
사마련의 여덟 하늘이 그렇게 생겨났다. 장강 이남이 완연한 사파의 영역으로 변한 것도 그 시점이었다.
수십 년 전 일어났던 정사대전 당시에도 사파는 이 정도로 뭉치지 못했다. 정파가 사마련을 경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다행인 점은 사마련주는 적어도 두 번째 정사대전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힘을 모으고 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어찌 되었든 정파에는 절세고수가 두 분 계시니까요.”
무당검선과 남궁세가주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들어보니 균형이 정말로 아슬아슬했다.
“그래서 수상한 분 같니?”
서연의 물음에 당소소가 미간을 좁혔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꿍꿍이가 있다기보단 그냥 비밀이 많은 사람 같습니다.”
근맥이 잘리고도 멀쩡히 돌아다니는 노인이다. 숨기고 싶은 사연이 여럿 있을법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란다.”
“동행하기로 결정하신 겁니까?”
“일단은.”
서연은 이런 것도 다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제자가 장성하여, 홀로 험난한 강호를 겪게 하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먼저 경험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서연은 송월 노인과 대화하면서도 그의 전신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깨와 눈의 사소한 떨림, 그리고 호흡 같은 것들.
서연이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을 통찰한 당가주의 조언을 따른 것이다.
―웃는 낯으로 다가오는 이들을 경계하시오. 유독 비범하게 느껴지는 인물이라면 더더욱.
―기왕이면 큰 무리에 끼어 동행하는 것이 좋소. 은공이라면 무리 전체가 살수로 돌변하여도 대응할 수 있을거요. 방심만 하지 마시오.
―무극지체라면 웬만한 독은 통하지 않을 것이오. 허나 독인만은 못하니, 항상 딸아이의 도움을 받으시오.
―전음? 지금 전음입밀의 묘리를 물은 것이 맞소? 당연히 알려는 드리겠소만, 은공의 스승이 누구인지 궁금해지는구려. 대체 어떤 작자가…….
전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었다. 아무리 서연이 무협지를 즐겨 읽었다고 한들, 경험이 일천한 것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서연은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불침번이라도 서야 할까.’
여태 객잔에 들어가서 잠을 청할때면 별 걱정 없이 잤다. 애초에 그러라고 있는 것이 객잔이기 때문이다.
허나 주의해서 나쁠 것은 없을 터였다.
서연은 침대가 두 개 있는 방을 잡고 화련과 당소소를 먼저 눕혔다.
밤을 샐 생각이었기에 의자에 걸터앉아 무엇을 조각할지 궁리했다. 화련과 당소소 둘 다 단발이었던지라 비녀를 쓸 일은 없을 터였다.
‘목검을 만들어줘야겠다.’
일 년 전에 남궁 남매에게 흑단으로 목검을 만들어줬던 일이 떠올랐다. 일월상단주에게 질 좋은 흑단을 받는 것으로 호위비를 갈음하면 될 듯했다.
“잠이 안 오니?”
뒤척이다 일어난 당소소를 보며 그리 물었다.
“자기 전에 물을 좀 마시려고 합니다.”
당소소는 눈을 비비다가 문득 고개를 창 쪽으로 돌렸고.
“꺄아악!”
답지 않게 높다란 비명을 내질렀다.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며 주저앉았고, 졸지에 곤히 잠들어 있던 화련마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대체 뭘 보고…….”
서연은 다급히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큼지막한 눈동자가 푸른 귀기를 잔뜩 흘리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혼령에 익숙한 화련마저 움찔할 정도였다.
서연은 다른 의미로 놀랐다.
‘……도대체 뭘 먹고 다니길래.’
덩치가 커진 탓에 창가에 얼굴을 반쪽 밖에 들이밀지 못했다. 그래서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방문객의 정체는 백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