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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으로 솟은 절벽은 말 그대로 까마득할 정도로 높았다. 서연은 구름마저 뚫고 올라선 봉우리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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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저 봉우리에 이름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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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정(萬孔頂)이라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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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없었으나, 거리를 좁히자 이내 깨달았다. 거대한 절벽 곳곳에 수천을 헤아릴 만한 큼지막한 구멍들이 뚫려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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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개의 구멍이 뚫린 봉우리라는 이름에 걸맞은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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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이 저절로 탄식을 내뱉었다. 구멍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기묘한 소리를 냈기 때문이었다. 그 소리만으로도 저 높은 곳에 얼마나 거친 바람이 휘몰아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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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으로는 도저히 오르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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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을 매달고 올랐다간 줄째로 바람에 휩쓸려 날아갈 지경이었다. 구멍을 딛고 오르는 방도를 떠올렸으나, 구멍 틈새로 새어 나오는 바람의 기세를 보니 차라리 구멍을 피해 가는 것이 안전 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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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구멍들은 어쩌다 생긴 것인지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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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인들이 수련하다 남긴 흔적이라는 설도 있고, 순양자(純陽子)께서 교룡을 쓰러뜨렸을때 그리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소. 허나 구전일 뿐이니, 흘려들어도 무방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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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순양자란 검선 여동빈의 도호를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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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태허진인은 양 손을 내밀어 만공정의 양 면을 가리켰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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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과거에는 종남산도 오악(五岳)에 비견될 만큼 험준했다 들었소. 그때의 만공정은 종남산의 정상이자, 천하에 그 웅장함을 견줄 곳이 없었다고 하더이다. 여선검상도 그때 만들어졌다오. 허나 순양자께서 만공정의 사방을 모두 갈라내어 지금의 형상이 되었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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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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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입을 다물었다. 일신의 힘으로 산을 잘라냈단 말인가? 그 기상이 실로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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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터무니없는 말로 치부하기엔 만공정의 잘린 면이 너무나도 반듯했다. 마치 거대한 칼을 대고 베어낸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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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얼핏 보았는데도 날카로운 예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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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종남산을 오르던 중 보았던, 완만한 언덕 구석구석에 박혀 있던 거대한 기암괴석들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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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이해하기 어려운 풍경이었으나, 태허진인의 이야기를 들으니 비로소 깨달음이 찾아왔다. 어쩌면 그 거대한 기암괴석들은 순양자가 산맥을 베어 가른 후에 남은 잔해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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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는 되어야 일문의 대종사라 할 수 있는 것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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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정의 깎아지른 한쪽 면에 손을 대고 있던 서연에게 태허진인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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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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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된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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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도 또한 만공정을 처음 마주했을 때 그리 느꼈소. 종남의 전대 장문인들 또한 그러하셨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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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 또한 동의하는 바였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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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인께서는 만공정을 어찌 오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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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제자들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경신법이 있소. 무영공공보(無影空空步)라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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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해석하니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고 허공을 밟는 듯 움직이는 경공이란다. 저 정도 되는 경신법이어야 만공정을 수월히 올라갈 수 있다는 말로도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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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남 장문인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게 이런 의미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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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무인이라면 만공정을 오르기는커녕 중간 즈음에 낙엽처럼 휩쓸려 갈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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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허진인은 걸음을 멈춘 채 서연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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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보여드리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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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허진인은 그야말로 질풍처럼 빠르게 나아갔다. 땅을 박차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는데, 보폭이 워낙 커서 한 걸음에 수십 장을 나아간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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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도 그는 뒷짐을 지고 있었는데, 멋을 부리기 위함이 아니라 경공의 기세를 극대화하여 가속하기 위해 그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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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허진인은 도약으로 최대한 높이 솟구친 다음, 절벽을 마치 지면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쉽게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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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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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모르겠으나, 대문파의 장문인에 걸맞는 실력을 가졌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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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허진인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구름을 뚫고 만공정 정상에 올라섰다. 그 거리가 오죽 멀었던지 서연의 눈에도 작은 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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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려가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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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먼 거리였음에도 태허진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렸다. 말로만 들었던 육합전성이라도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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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태허진인은 공중으로 뛰어오른 다음 그대로 수직으로 떨어졌다. 이따금 발길질을 했는데, 놀랍게도 그때마다 속도가 점차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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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감탄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로 사뿐히 착지하는 태허진인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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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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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허진인은 살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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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찬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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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빨리 올라갔다 내려왔는데 태허진인의 장포에는 흙먼지 한톨 묻어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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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찌 보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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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안목이 뛰어나다 자부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된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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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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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허진인의 미간이 약간 좁혀지려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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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가다듬던 서연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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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태껏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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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공공보를 견식한 덕분에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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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정신을 극한으로 집중하며, 몸속에서 꿈틀거리는 진기를 발끝에 모았다. 주변의 자연지기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모여들더니 그녀의 발 주위 세 장 반경에 파릇한 새싹을 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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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눈을 감고 있었기에 그 엄청난 변화를 보지 못했다. 이미 그 짧은 순간에 완전히 몰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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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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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밀집되는 자연지기를 목도한 태허진인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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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허진인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눈꺼풀을 들어올린 서연이 걸음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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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을 끊을 때마다 진기도 같이 터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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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맨 땅에 도달했다. 한 걸음에 무려 세 장을 이동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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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서연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보다 더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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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치켜들자 만공정의 웅장한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때, 서연은 기이한 경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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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가 일순간 뒤집히더니, 수백 장도 넘는 거대한 교룡의 환영을 마주했다. 교룡은 무지막지한 속도로 만공정을 휘감듯 솟구쳐 올랐다. 그 섬뜩한 발톱에 닿을 때마다 바위가 찢겨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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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룡은 한 사내를 맹렬히 쫓고 있었다. 사내는 뒷짐을 지고 있었는데, 그 존재감이 거대한 교룡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특이한 것은 강한 역광 때문에 사내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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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기이하고 변화무쌍한 보법으로 교룡의 맹렬한 공격을 모두 피했다. 교룡이 발톱을 휘두르고 꼬리를 휘감으며 절벽을 부술 듯 덤벼들었으나, 사내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이를 모두 비껴냈다. 사내가 발을 딛을 때마다 만공정에는 큼지막하고 깊은 발자국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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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가라앉았다. 사내가 마지막 걸음을 딛고 교룡의 목을 베어내는 순간이었다. 환영 속에서 교룡의 거대한 몸체가 폭포수처럼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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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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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깨달음이 섬광처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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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정은 순양자, 즉 검선 여동빈이 등선하기 전 종남을 위해 남긴 거대한 유산이나 다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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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만한 절벽이 내당에 있나 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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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남의 제일 절학이 바로 이곳 만공정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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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출난 오성으로 그 모든 것을 기억했다. 순양자가 만공정의 어디를 어떻게 딛고 나아갔는지, 그 발자취와 보법의 오묘함이 그녀의 뇌리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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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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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에서 진기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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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조심스럽게 첫 걸음을 내디뎠다. 육신이 마치 깃털처럼 떠올랐다. 순양자가 그랬듯 뒷짐을 지고 자세를 취하자, 몸의 균형이 놀랍도록 안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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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의 시야에는 환영 속 순양자가 내딛던 발자취가 선명하게 보였다. 서연은 그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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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걸음은 더뎠지만, 두 번째, 세 번째 걸음을 내딛을수록 그녀의 움직임은 점차 빨라지고 유려해졌다. 거친 바람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으나, 서연은 어느새 바람과 함께 나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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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허진인은 놀란 얼굴로 서연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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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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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진 얼굴에서 경탄이 피어올랐다. 만공정의 본의를 그제서야 깨우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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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동안 만공정을 곁에 두고 살아왔으나, 여태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허나 이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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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허진인의 주름진 얼굴이 더없을 경탄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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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도화와 같은 기운이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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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선자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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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생각했다. 구멍의 깊이가 곧 일보의 강약을 결정했다. 얼핏 보면 패도적인 보법이라고 오해할 수 있었으나, 실상은 정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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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나풀거리는 잎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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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풍화에 흔적이 스러지지 않도록 순양자가 후대를 위해 배려했다고 봐야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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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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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이 날개라도 돋친 것처럼 가벼워졌다. 서연은 저도 모르게 환하게 웃었다. 가파른 절벽을 딛고 서 있었는데도 즐겁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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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기암을 붙잡은 채로 멈춰 서서 옅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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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은 없었다. 다만 더없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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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재가 맞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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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얹혀 있던 커다란 돌멩이 하나가 뚝 떨어져나간 듯했다. 묘한 해방감마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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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을 하는 것만큼이나 즐거웠다. 생각대로 몸이 움직여서 그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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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에 일생을 바치는 무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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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한 적이 처음이었다. 심경의 변화가 스스로도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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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보법만 익혀도 즐겁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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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의 암향표(暗香飄), 제갈세가의 천기미리보(天機迷離步), 무당의 제운종(梯雲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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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를 오시한다는 보신경들은 또 어떠한 묘리를 품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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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공에는 의념이 담긴다고 했다. 순양자의 보법도 그러했다. 물러섬이 없었다. 무엇이 앞을 가로막든 끝없이 나아가고자 하는 기상이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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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히 나아가는 종남과 참으로 어울리는 보법이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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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그렇게 백 보를 더 나아갔다. 내려올 때에는 순양자의 보법을 역순으로 밟아 잎새처럼 사뿐히 착지했다. 도화와 같은 머리칼이 우아하게 나풀거렸는데, 그 모습이 가히 선녀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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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올라가지는 못했다. 구멍의 개수가 곧 나아가야 할 보법의 수였다. 더 나아가기에는 연습이 필요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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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단순히 올라가고자 했다면 언제든 올라갈 수 있었다. 이제는 그럴 자신이 있었다. 허나 그런 방식으로 올라가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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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호흡을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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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레 호법을 서게 된 태허진인이 조용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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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자께서는 종남의 은인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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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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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존재조차 몰랐던 절세 무공을 복원해냈다. 경지에 오른 장문제자들은 이제 만공정을 오르고 또 오르는 것만으로도 순양자의 보법을 익히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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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이 눈꺼풀을 들어올렸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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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자, 이름을 지어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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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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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자가 아니면 누가 이 무공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겠소. 순양자께서 이름을 정해두지 않으셨으니, 선자가 정해야 마땅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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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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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뭐라고 해야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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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나풀거리는 잎새처럼 가볍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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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신선과도 같은 기품이 절로 풍겨나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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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보다 빠르며, 또 우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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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제 이름을 넣고 싶다는 욕심도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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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법을 펼쳤을 때 느꼈던 심정 또한 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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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감상이 담긴 무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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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연화비영보(蓮華飛影步)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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