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2-novel-agent/content/references/novelpia/363368/92.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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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아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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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가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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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능력은 너무나도 강력했고 또 위험했다.
 
적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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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군마저도 그녀의 힘의 여파에 휘말려, 다치거나 혹은 죽을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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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동료들은 그런 그녀를 피했다.
 
따라서 그녀 또한, 그들을 밀어냈다.
 
혼자인 것이 익숙했고 또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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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쪽이 이번에 우리 길드로 오게 된 신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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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재완 팀장의 목소리에 훈련장의 모든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진세아는 그 소란의 중심에 서 있는 한 남자를 아무런 감정 없는 눈으로 훑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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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유선우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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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우.
 
이방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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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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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편없이 약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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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벅저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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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아는 으레 있는 신입 소개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그대로 몸을 돌려 휴게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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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에서, 다른 길드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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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 또 저러네….”
 
“선우 씨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요. 원래 세아 헌터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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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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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우는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뒤돌아가는 진세아의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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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아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에, 당혹감이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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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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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개를 깊이 숙여 진세아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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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을 대놓고 무시한 사람에게 고개를 숙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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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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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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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침묵 끝에 진세아의 입술 사이로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녀 또한 인사를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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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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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광경을 지켜보던 길드원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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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였을 것이다.
 
유선우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그녀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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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우과 진세아는… 아니, 우리는 같은 팀이 되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그가 자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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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유일한 동료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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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곁은 이상할 정도로 편안했다.
 
어떤 순간에서도 자신을 S급 헌터 진세아로 대하지 않았다.
 
친한 동료, 진세아로서 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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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기대도, 두려움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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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경계가 점점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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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유선우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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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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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진세아의 첫 번째 임무가 시작되었다.
 
B급 게이트. 평범한 고블린 소굴이었다.
 
진세아에게는 산책과도 다를 바 없는, 쉬운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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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는 단 한순간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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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우가 다치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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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 상부에서도 테스트해보기 위해 일부러 쉬운 미션을 준 것이다.
 
과연, 진세아가 팀원을 가질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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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여기서 유선우에게 상처라도 입힌다면….
 
그녀는 또다시 혼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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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모든 신경은 오직 그의 안위에만 쏠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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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선우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괜찮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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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따라 진세아의 번개도 그녀의 말을 잘 들었다.
 
진세아는 신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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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의 전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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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대로 팀을 이룰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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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구구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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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가장 깊숙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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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서부터 거대한 차원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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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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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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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안에서 기어 나온 것은 고블린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키메라.
 
S급 헌터 파티가 전력을 다해야만 겨우 상대할 수 있는, 재해급 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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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의 입에서 검붉은 브레스가 일직선으로 뿜어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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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아를 향해서.
 
즉시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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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번개는 가장 중요한 순간, 그녀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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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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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아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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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좀, 살만해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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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예상했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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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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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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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눈앞에 번개가 내리쳤다.
 
진세아의 번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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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우였다.
 
그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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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광처럼 빠르게 달려온 유선우는 그녀에게 향하는 공격을 빗겨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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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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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가 그 공격을 온전히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는 힘없이 튕겨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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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의 벽에 강하게, 처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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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아는 미친 듯이 그에게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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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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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우는 웃고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부러진 팔다리가 꺾인 채로.
 
그는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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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따라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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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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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아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부터 단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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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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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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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 그가 보여주었던 그 속도라면.
 
그는 자신을 버리고 혼자서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다.
 
반드시 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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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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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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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도, 그녀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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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아는 피를 쏟아내는 그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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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날 깨달았다.
 
자신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려줄 수 있는 존재가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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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빨랐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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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면 이럴 일도 없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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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약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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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내가 약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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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주받은 힘이 가장 중요한 순간에 또다시 나를 배신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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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우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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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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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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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에 먹혀 반쪽짜리에 불과했던 뇌후(雷后)가,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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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그녀가 S급으로 각성하던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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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후(雷后)의 히든 어빌리티가 개방됩니다.]
 
[어빌리티: 신뇌합일(神雷合一)]
 
[이제, 번개가 당신이고 당신이 곧 번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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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문장을 마지막으로 진세아의 온몸을 푸른 뇌전이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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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바라보던 유선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리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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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서 있는 여성이, 얼마나 강해진 건지 예상조차 되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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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우는 남은 숨을 끌어모아,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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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지켜줄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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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그 작은 속삭임에 진세아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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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답했다.
 
​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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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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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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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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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지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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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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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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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뜨려고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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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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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가 흐릿했다.
 
초점이 맞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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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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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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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의 낯선 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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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붉은 공간의 중심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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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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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속옷만 입고 있었다.
 
속옷이라기보다는 몸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는 검은 천 조각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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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등 뒤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나비 모양의 마나 날개가, 지금은 어둠 속에서 기이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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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났어, 선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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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다가왔다.
 
부드러운 손길로 식은땀에 젖어있는 이마를 쓸어주며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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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꿈… 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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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시…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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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쉰 목소리에 그녀의 상태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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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시은]
 
[메인 스탠스]
 
[당신을 완벽하게 조교하여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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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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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응. 괜찮아. 약효가 좀 세서 그래. 금방 익숙해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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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상황을 이해했다.
 
그녀에게 납치당했다.
 
커피에는 그녀의 능력이 담긴 약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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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자고… 이런 짓을 벌인 거야.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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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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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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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주 해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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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뒷감당을 왜 해?”
 
“어차피, 나중에는 네가 좋아서 한 일로 되어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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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눈에는 단 한 줌의 죄책감도 서려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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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는 아무도 모르는 지하실이야. 정말, 아무도, 못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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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몰랐다.
 
백시은이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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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기분 좋은 거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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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런 내 얼굴을 가까이에서 빤히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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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응…그런데 이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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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손가락이 내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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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숨이 가빠져야 할 시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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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일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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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내 모습을 귀엽다는 듯이 지켜본 백시은은 조용히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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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야~ 곧 알게 될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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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며, 다시 침대로 돌아가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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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간은 더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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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이 점점 가빠졌다.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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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효가 강하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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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어져갔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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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거기까지였다.
 
약은 내 몸을 잠식했지만, 내 의식을 잠식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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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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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에 백시은은 손톱을 깨물며 나를 불안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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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혹시 고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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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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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데… 분명 엄청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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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흐릿해져 가는 시야 속에서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할 뿐이었다.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끌어올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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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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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작 약의 효과에 취할 만큼 나약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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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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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여자로서 매력이 없는 걸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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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지막 말에 백시은의 미소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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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내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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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냥 바로 하지 뭐. 어디까지 그렇게 굴 수 있는지 한 번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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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시은은 웃고 있었다.
 
그러나 아까의 여유는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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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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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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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르르… 하고 울리는 희미하지만, 익숙한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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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언젠가 느껴본 적이 있는… 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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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정체를 깨닫자마자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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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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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내가 감당할 수 있냐고 물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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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어차피 전부 네가 좋아서 하게 된 일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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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감당할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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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르르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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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하늘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 전체가 진동하는 듯한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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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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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시은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지하실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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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안 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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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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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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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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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시은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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