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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거실의 불을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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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털어내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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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에서는 창밖의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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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를 켜고 협회에서 보낸 메일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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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왕진 길드는 해태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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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회에서는 일정을 정리해서 바로 알려주기로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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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이나 금요일은 설유월을 만나러 가야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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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다음 주가 될 가능성이 높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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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이면 일정이 도착해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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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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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메일은 도착해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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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위로, 다음 주 나의 일정이 담긴 표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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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오전 9:00 - 해태 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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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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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은, 예상과는 다르게 왕진은 바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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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부터 시작해서, 다음 주 월요일에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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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번 주는 왕진과 동시에 설유월의 적응을 도우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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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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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방문하지 않은 설유월의 하루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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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오늘은 협회의 교육을 받고, 또 협회의 적응 시설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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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어떤지 정도는 체크하는 게 좋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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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랜만에 어빌리티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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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유월에게 핀을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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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유월] [PIN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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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하루 종일 너무나도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했습니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조금 피곤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의원님이 직접 알려주셨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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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스탠스: 의원님의 방문 날짜는 목요일? 금요일?… 목요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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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의 상태를 조용히 읽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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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설유월은 오늘 하루 꽤나 많은 것을 경험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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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녀에게 직접 알려주고는 싶지만… 내게 의존하게 되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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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이서령이라는 거대한 기둥에 의지해왔던 그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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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둥이 사라진 지금, 설유월은 필사적으로 다음 기둥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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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틈이 생기면 분명 내게도 쉽게 의존하려는 성향을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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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어느 정도 그런 느낌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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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상이 내가 되어서는 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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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설유월은 두 발로 서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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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거리감을 적당히 조절하는 게 좋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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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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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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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요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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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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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진은 수요일과 금요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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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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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컴퓨터를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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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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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아의 펜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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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의 모든 불이 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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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거대한 통유리창 너머로 쏟아져 들어오는 서울의 야경만이 그녀의 실루엣을 희미하게 비출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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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창문을 통해 한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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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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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그를 위해 직접 골라준 가장 안전하고 또 가장 완벽한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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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행히 늦지 않은 시간에, 집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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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에 불이 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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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랜시간이 지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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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불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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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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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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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똑같은 귀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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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를 하고, 컴퓨터를 잠시 켰다가 잠자리에 들기까지의 루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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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까지도 거의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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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선우는 오늘 그 여자와 저녁 식사를 한 후 다른 곳에 들르지도 다른 누군가를 들이지도 않고, 곧장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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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그가 자신의 집에, 다른 여자를 들이는 법이 없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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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확인은 필요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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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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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아가 우려했던 것이 이런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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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통제가 닿지 않는 영역이 생겨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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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가 길드 안에 있다면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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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다가오는 모든 불순한 손길들을 그녀가 전부, 쳐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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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비호 아래 그는 완벽하게 안전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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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선우가 밖으로 나간 그 순간부터 제약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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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 내부에서 외부로 뻗어 나가는 위협뿐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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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외부에서 그에게로 향하는 수많은 손길들까지 그녀는 막아낼 수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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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선우가 만났던 백시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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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이 위험하고, 목적은 뻔한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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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백시은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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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아는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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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더 속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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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아는 유선우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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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함? 다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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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하나 말로 표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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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진세아는 유선우를 만나기 전까지 삶의 모든 순간이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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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녀는 단 한 번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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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녀는 선우와의 관계를 아주 착실하게 쌓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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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와 이방인. 그딴 건 상관없다. 우리는 천천히,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연인의 모습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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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랜시간이 걸리겠지만, 분명 결국 그의 옆에는 그녀가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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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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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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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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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머릿속에 또 다른 하나의 장면이 불쑥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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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그의 상담소에서 마주쳤던 S급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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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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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선우의 의자에 앉아있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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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급하게 뛰는 심장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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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결정적으로, 실수인 척 위장하며 옷을 훔쳐 달아나던 행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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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시은은 차라리 상대하기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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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진세아를 두려워했으니까. 어떻게든 피하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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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하얀 토끼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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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한 표정 뒤에 욕망을 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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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물러서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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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훨씬 더 까다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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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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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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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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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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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그녀의 스마트폰이 작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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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화면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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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녀의 얼굴 위로 화사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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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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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서 온 메세지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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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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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 이번 주 수요일이래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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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는 수요일 오전 9시 해태라고 적힌, 공식 일정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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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아는 미소를 지었다.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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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누워 메세지를 보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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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생각해 준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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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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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망설임 없이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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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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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기 너머로 나른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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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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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아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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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절대 들키지 않을 연기를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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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귓가로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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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진세아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창밖의 야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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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목소리는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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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시은에 대한 분노도, 루나에 대한 경계심도, 그 모든 날카로운 감정들이 그의 목소리 하나에 스르르 녹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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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아는 소파 위로 몸을 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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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베개 위로 뜨거워진 뺨을 부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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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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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의 대화가 이어지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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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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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아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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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아주 깊고 평온한 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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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나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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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 너머의 목소리는, 그렇게 진세아의 집 안에 조용히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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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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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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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우트 팀장, 위재완의 사무실은 아침부터 불이 켜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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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흘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의자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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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아주 바쁘게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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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근도 어제부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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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음 주에 있을 유선우의 왕진 신청 명단을, 텅 빈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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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우의 왕진이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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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길드를 나간다는 폭탄선언 이후, 미친 듯이 분노했던 윗선의 압박도 마침내 잦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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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상담 신청서를 취합하고 한 명, 한 명, 명단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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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부터 이제 막 길드에 들어온 C급 신입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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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을 원하는 이들의 이름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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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에게 있어 유선우라는 이름은 그 정도의 파급력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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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기계처럼 타자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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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샘과 외근으로 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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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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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신청자의 이름을 명단에 추가하고, 전송 버튼을 누르려고 할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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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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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방의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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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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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재완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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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미건조하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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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팀장님. 잠시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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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위재완의 미간이 살짝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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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시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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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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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피곤함 속에서도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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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끼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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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열리고 백시은이 평소와 같은 해맑은 미소와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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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 두 잔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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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우신 것 같아서요. 이거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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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시은은 한 잔을 위재완의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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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연스럽게 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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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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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재완은 기분 좋게 커피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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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시은은 삭막한 길드에 비타민 같은 존재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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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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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는 그저 안부를 묻기 위해 온 것이 아닌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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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할 말이 있는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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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재완은 그것,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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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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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재완은 그녀가 건넨 커피를 아무런 의심 없이 입으로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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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고 달콤한 액체가, 밤샘으로 지쳐있던 몸을 치유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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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게 아니고요… 저도 오늘 진행하는 상담, 신청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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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선우 왕진 오는 거? 알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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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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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재완은 입에서 커피잔을 떼며, 그대로 허공에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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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천천히 찻잔을 책상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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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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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백시은을 다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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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여전히 해맑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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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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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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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 밖으로 내보내 주신 거, 감사하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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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과 동시에, 위재완의 머릿속이 점점…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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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기회가 생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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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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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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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했다. 혀가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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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기분이… 이상할 정도로 좋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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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모든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고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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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좋아지실 거예요. 제가 마법을 부렸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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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재완은 점점, 안갯속으로 침잠해가는 의식 속에서 비로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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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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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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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제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온몸의 감각이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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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텅 빈 눈으로, 눈앞의 여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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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여전히 천사와도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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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주무시고 일어나시면 전부 다, 괜찮아져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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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는 지금 깨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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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도 분명, 좋아하게 될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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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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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선우를 보호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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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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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그를 지켜주겠다는 명분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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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 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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