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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들은 것은, 그녀의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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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유월이 처해 있는 진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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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령은 그녀의 친어머니가 아니었고, 설유월은 그녀의 수양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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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사실이었지만, 나는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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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담담히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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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에는, 연구 논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특정한 대상이나 현상을 깊이 파고들어, 그 본질을 분석하고 기록한 문서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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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가 이해하기 쉽도록, 중원의 용어로 설명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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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중원의 용어로 한다면… 관찰지(觀察誌) 정도가 비슷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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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설유월이 작게나마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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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연구가 있었습니다. 친자를 키우는 부모와, 양자를 키우는 부모. 그 두 부모가 각자의 자식에게 느끼는 사랑의 크기에, 과연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지에 대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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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설유월의 눈동자가 불안에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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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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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눈을 천천히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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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놀랍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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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이를 향한 사랑에, 그 어떤 유의미한 차이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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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연구결과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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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한 아이와 출산한 아이 간의 사랑에 대한 유의미한 차이는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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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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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보편적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데에 있어 가치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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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유월의 텅 비어있던 눈동자의 흔들림이 아까보다 더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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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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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녀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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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유월 씨는 가치를 증명해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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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동공이 대답을 찾지 못한 채 속절없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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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식이, 부모에게 사랑받기 위해 무언가를 증명해야만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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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내면에 있는 생각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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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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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유월은 머릿속의 상식이 부정당하는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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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유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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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스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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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자식도 아닌 자신을 거두어 키워주신 어머니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치를 증명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비효율적인 요소가 관여한다는 것 자체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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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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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유월씨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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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도망칠 구석이 없게끔 그녀를 완벽하게 몰아넣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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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흘릴 정도여도 괜찮습니다. 마치 딸을 사랑하지만 엄한 아빠가 딸을 교육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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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비켜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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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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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은, 슬픈 이모티콘 하나를 남기고 조용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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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 씨.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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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똑같았다. 입력된 정보를 뱉듯이 즉시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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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맹주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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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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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제 그 대답은, 정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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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세계에는 무림맹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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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조금 더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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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유월 씨는 이제 어떤 목표를 가져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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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유일했던 길과, 목표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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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인지하고 있지 않았던 사실을 마주하자, 설유월의 표정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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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텅 빈 호수 같은 눈동자에, 마지막 돌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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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씨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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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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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품었던 작은 꿈이어도 좋고, 앞으로 새롭게 하고 싶은 일이어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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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도 모르게, 손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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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을 가로지른 내 손이 차갑게 식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그녀의 손 위로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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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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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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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작은 손을 천천히 감싸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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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동적인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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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를 잃어 위태롭게 무너져 내리는 그녀를 붙잡아 주어야 한다는, 상담사로서의 본능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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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길에, 설유월의 텅 비었던 눈동자가 맞닿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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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주 느리게 다시 나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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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ฅ(՞៸៸> 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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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그렇듯,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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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의 가장 중요한 단어를, 다시 한번 그녀에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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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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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유월 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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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의 생각도 기대도 아닌, 오직 유월 씨 스스로. 이제부터 자유롭게 생각해 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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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적 의존의 방식이 아니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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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또 다른 의존의 대상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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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아주 작은 발판이 필요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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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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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씨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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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발판이 되어주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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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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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님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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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유월은 푹신한 침구 위에 인형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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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서는 그가 남기고 간 마지막 말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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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에는, 무림맹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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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유월 씨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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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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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알고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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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자신이 목표로 삼을 무림맹도, 천마신교도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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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그녀의 삶 전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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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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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꼼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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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손가락이 천천히 맞은편 손등을 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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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인지하지 못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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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그 접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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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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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늘 언제나 남성과의 모든 접촉을 분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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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외간 남성의 접촉을 허용한 것 자체가 이번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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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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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희란이나 여타 다른 여성 무인들의 손길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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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자신의 손을 감쌌을 때의, 단단하고 커다란 감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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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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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의원은, 마음만 먹으면 손가락 하나로 제압할 수 있을 만큼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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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인 자신의 기준으로 보면 한없이 연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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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의 단단한 손길이 자신의 손을 감쌌을 때, 그녀의 몸은 그 어떤 반항도 못하고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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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힘의 문제가 아니었다. 뭐랄까··· 몸에 각인되어 있는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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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가 남기고 간 희미한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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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온기가 차가운 방 안에서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이 이상하게도 신경이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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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유월은, 그것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애 처음으로 무언가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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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그녀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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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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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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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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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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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자신을 위해 직접 구워준 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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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은 그것을 봉투에 담아 두었다. 언제든 먹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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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아직은, 온기가 조금이라도 남아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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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유월은 침대에서 거의 굴러떨어지다시피 다급하게 거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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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식탁 위에 놓인, 하얀 종이봉투를 떨리는 손으로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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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봉투 바깥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데었다. 손끝에, 종이 너머 둥근 과자의 감촉이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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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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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대했던 온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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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잡힌 봉투는 방 안의 공기처럼, 손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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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차가운 봉투를 든 채 텅 빈 거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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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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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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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기가 머물렀던 손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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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월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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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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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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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상담은 꽤나 괜찮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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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유월의 배경을 확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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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내면을 확인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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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스스로 새로운 목표를 생각하게끔 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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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것은 내가 그녀에게 내준 숙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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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내일은 휴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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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동안 부디 그녀 스스로 잘 생각하기를 바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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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에는 걱정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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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녀가 일반적인 치료가 통하지 않는 중증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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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치료를 위해 의존의 대상 전이를 해야 하는 건가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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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그 방법까지는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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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 많으셨습니다. 월요일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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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배웅하는 팀장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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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퇴근하기는 좀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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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행선지는 나의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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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소를 너무 오랫동안 비워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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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엘리스에게 맡겼던 열쇠도 회수해야 하고, 정리도 좀 할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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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간으로 돌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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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상담소 문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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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스에게 일러둔 대로, 발판 밑에 손을 넣자 차가운 열쇠 꾸러미가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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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끼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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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자마자, 코를 간지럽히는 이질적인 향기가 나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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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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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라일락 향 방향제를 뿌려놓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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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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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기를 시키려 했는지 창문이 살짝 열려 있었지만, 그 향은 쉬이 가시지 않은 채 방 안 공기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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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업무용 책상 위 올라가 있는 작은 화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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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김새를 보아하니 라벤더 화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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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작은 화분 앞에 섰다. 흙은, 방금 물을 준 것처럼 촉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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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흙 위로 삐죽 솟아 나온 작은 나무 막대 하나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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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에는, 돌돌 말린 작은 쪽지가 묶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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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막대를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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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에는 종이가 빙빙 둘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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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심스럽게 쪽지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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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안에는 동글동글하고, 정성스러운 글씨가 오밀조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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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케이크 너무 잘 먹었어요 ㅠㅠ 감사의 의미로 작은 화분 하나 놓고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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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참고로 저는 루나입니다!! 엘리스가 바빠서 제가 왔어요. ₍ᐢ ›_‹ 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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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모티콘 설마 토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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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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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긴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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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가 남기고 간 쪽지를, 서랍 안에 소중히 넣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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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의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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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다는 증거니까. 언젠가 진짜 모습을 모두에게 보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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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모두 좋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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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자를 끌어 자리에 앉았다. 이틀 만에 돌아온 내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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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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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딘가 허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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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의자 등받이에 걸어두는 내 하얀 가운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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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 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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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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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너무 정신없이 바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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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도 쪽잠밖에 못 잤고 신경 쓸 것이 많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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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두고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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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해놓고 까먹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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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피곤해서 그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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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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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진 가운 따위는 잊어버린 채 컴퓨터 화면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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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더미처럼 쌓인 논문과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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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는 그렇게 한참을 열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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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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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창밖은 이미 해가 진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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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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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갈까,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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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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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고요한 상담실의 문을 조용히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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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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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상담소는 쉬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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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방문객이 오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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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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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상담소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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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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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여는 순간, 난초의 은은한 향이 코에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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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바로 앞, 그곳에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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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의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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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색 비단 장포가 어두운 조명 아래, 그녀의 몸의 곡선을 따라 은은하게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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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꽂은 비녀가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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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와는 다르게, 설유월과 키는 비슷하다. 내 가슴팍에 살짝 못 미치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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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천맹주, 이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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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언제나처럼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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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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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야심한 시각에 찾아와… 의원님께 대화를 청하는 무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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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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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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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한, 바라던 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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