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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자리가 정리되고 도연은 잠시 정리할 자료가 있다며 사라졌고, 나는 도진과 둘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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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잠깐 베란다에서 바람이나 쐴까요. 마실 거 하나씩 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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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거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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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를 연 도진은 안을 살펴보더니, 이것저것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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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혹시 맥주 마실래요? 누나가 과일맥주를 좋아해서 꽤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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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인마, 나 아직 미성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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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흠,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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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본 이유는 짐작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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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 전 몸뚱이가 워낙에 음주가무를 즐기며 사고를 치고 다닌 데다, 도진이 녀석은 그 소문도 알고 있으니 권해본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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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 역시 술을 즐기는 편이긴 했지만, 굳이 안 마셔도 되는 상황에 마실 생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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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콜라나 하나 꺼내줘라. 요즘 잘 나오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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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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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콜라 두 개를 꺼내 들어서는 앞장서는 도진. 드르륵 하며 베란다 문이 열리고, 차분한 분위기의 주택들의 전경이 펼쳐졌다. 솔솔 기분 좋은 바람마저 불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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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동네라 그런지 고즈넉하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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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쵸, 저도 아직 적응이 안 돼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13평짜리 반지하 집에 살았는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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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갑자기 자기 가족이 수십억 원을 떡하니 가져올 거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겠나. 아마 나 같아도 적응이 안 됐을 거다. 그렇게 바람을 쐬며 음료를 홀짝이는데, 도진이 질문을 던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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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전부터 항상 궁금한 게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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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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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왜 그렇게 세종기 우승을 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단순히 '목표는 크게 잡아야지' 같은 느낌은 절대 아닌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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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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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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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기 우승 못 하면 죽는 병 걸렸다~ 따위의 말을 해봤자 농담으로 생각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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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이제 죽을 확률은 거의 없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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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과 소원권 획득의 또 다른 조건인 '1라운더 지명.' 이건 이미 이룬 거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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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 의견을 쓱 하고 둘러보면,늦어도 1라운더 중하위권 선에서는 무조건 뽑힐 것 같다는 의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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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 끝에 투음절맥도 극복하고, 양맥도 뚫어서 태양신맥도 복구시키고, 강호고를 둘이나 녹다운시킨 끝에 1라운더급으로 급부상했다. 전생에서도 이 정도로 치열하게 보냈던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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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적당히 만족하고 사리면서 즐겜해도 되겠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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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해보고 싶다, 세종기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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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개인의 일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얽혀 들어왔고, 처음에는 그들을 단순히 생존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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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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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나와 얽힌 사람들 하나하나의 존재감이 너무나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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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보내며, 갈 수 있는 곳까지 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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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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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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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이 던진 질문 덕에 그동안 막연했던 생각들이 정리됐다. 하지만 이러한 진심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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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 뜨겁게 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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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본심 대신, 적당히 둘러댈 만한 걸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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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걸어볼 만한 목표잖냐, 세종기 정도 되면 말야. 난 올해가 마지막 기회라서 더 간절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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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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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의외라는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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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라, 형한테 그 단어를 듣게 될 줄은 몰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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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 어울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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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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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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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 있냐, 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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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헙,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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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락이 걸리자 얼굴이 새파래져서는 탭을 치는 녀석. 낯 가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농담도 곧잘 하는 녀석. 내년에 내가 없을 때 부주장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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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나 역시 궁금한 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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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도 있다. 궁금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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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지는 모르겠지만, 형이라면 뭐든 물어봐도 상관없어요. 편하게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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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뭐라고 말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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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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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주제든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반응의 도진.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입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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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은 지금, 안 계신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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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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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 번도 뵌 적이 없어서 말야. 가족사진도 안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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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물음에 말을 잃는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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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보면 대뜸 패드립 박는 미친놈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나도 없는 건 매한가지라서 면역이다. 아무튼 이건 한 번쯤 짚고 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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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도연 누나가 말한 적이 있지. 도진이가 정말 힘들게 자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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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넓은 집에서 양친 모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데에는 뭔가 사정이 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역시, 내 짐작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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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형한테는 말 한 적이 없었네요. 일단 어머니는 불치병으로 돌아가셨어요. 그게 아마 7년 전쯤일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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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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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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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머뭇거리는 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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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망설인 듯싶지만, 이내 입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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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구 협회 도학훈 총재, 혹시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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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를 수가 없지, 아무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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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후에는 가끔씩 신문에서 보이는 정도지만, 원작 속에서는 엄청난 광폭 행보로 유명했던 총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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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폭 전력이 있는 선수는 봐주는 것 없이 싸그리 날려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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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파로 고교 톱급 유망주들 중 몇몇이 지명 자체가 취소되었고, 팀 내 학폭 선수들이 여럿 중징계를 받으며 여러 팀의 전력층이 펑펑 터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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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원작에서도 임팩트가 컸던 사건이라 기억하고 있다. 이름 자체가 꽤 특이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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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저희 아버지예요, 이제는 사실상 남남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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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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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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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귀가 착착 맞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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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시기가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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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이 원작에서 자살했을 시점과 총재가 미쳐 날뛰기 시작한 시점을 맞춰보면 때가 딱 들어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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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자세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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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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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과 도진의 아버지인 도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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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국 리그 속 어느 팀의 백업 야수로 활동하며 화목한 가정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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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난아기였을 때라 도진은 그 시절을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당시 어렸던 도연의 눈에는 팀에서 궅은 일을 도맡아 하는 아버지가 가장 멋있어 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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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최고…! 나도 아빠 같은 멋진 야구선수랑 결혼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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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이는 나중에 결혼하기 쉽겠는데? 아빠보다 멋진 선수는 많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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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는 아빠가 최고야…! 젤루 멋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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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기쁘구나. 아버지도 도연이가 최고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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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느 날부터 가정에 불화의 씨앗이 피기 시작하고, 그건 극단적인 형태로까지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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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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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떻게 당신이 나한테 손찌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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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깊어진 부부 싸움의 끝에, 가정의 버팀목이던 도학훈은 아내에게 손찌검을 한 뒤 집을 나갔고 머지않아 다른 여자와 재혼을 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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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덩그러니 남겨진 남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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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치병에 걸려 나날이 야위어져 가는 어머니. 그러나 아버지는 치료비와 생활비 등을 일절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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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괴물, 괴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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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익, 삑, 삐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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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엄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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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부터 남매의 고난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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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가 쪽은 푼돈 수준의 지원만 할 뿐이고, 아버지 쪽은 어머니의 죽음에도 문상 한 번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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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은 중학교 3학년이라는 어린 나이부터, 아르바이트를 몇 개씩이나 뛰며 겨우 남매가 살아갈 돈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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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20살이 되던 해, 도학훈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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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아, 이 아비를 용서해주지 않으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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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도연은 매몰차게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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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힘든 건 매한가지지만, 가장 힘들 때 가족을 내팽개치고 떠난 사람을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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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렇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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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없이 처진 어깨로 돌아서는 도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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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황을 몰래 지켜보던 도진은 누나 몰래 집 밖을 나서선, 그의 뒤를 몰래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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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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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눈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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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흑, 큽, 끄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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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벤치에 앉아 오열하는 도학훈의 뒷모습. 그것은 어머니가 늘상 외치던 괴물의 뭔가가 아닌, 그저 한 평범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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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조금 들긴 했어요. 물론 그렇다고 해도, 누나가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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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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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꽤나 가정사가 복잡하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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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뭔가가 있다는 생각에는 내심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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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내다 버린 아들이 학폭으로 자살했다고 그렇게 쥐잡듯이 선수들을 잡을 리는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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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총재쯤 되면 잃을 것도 많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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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일어나지도 않을 일이라 말할 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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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도진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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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이 많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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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누나한테 업혀 가기만 한 걸요. 대단한 건 누나 쪽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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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 푸드점 알바, 전단지 알바, 고깃집 알바를 동시에 하면서, 반 친구가 버린 참고서로 공부해 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덧붙이는 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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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대단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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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단순히 똑똑하다를 넘어서, 사람 자체가 단단하다는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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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네, 도연 누나가 그런 이야기는 안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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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들춰서 이야기하고 다닐 만큼 아름다운 기억은 아니니까요, 아무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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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콜라를 후루룩 마시고는 쓰레기통에 집어넣는 도진. 손을 탈탈 턴 녀석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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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일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누나랑 결혼하게 될 사람은 땡잡은 거 아닐까 싶어요. 그 외모에 생활력도 강하니 내조도 잘 할 테고, 머리도 좋은데다 막대한 재산까지. 이 정도면 1등 신붓감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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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을 지긋이 보면서 말하는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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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보니 확실히 남자 입장에서는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는 매력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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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 그 정도면 탐을 안 낼 남자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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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눈을 번쩍이는 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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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바로 물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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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입후보할 생각 없어요? 형만 생각이 있다면야 제가 잘 이야기해줄 수도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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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다 임마, 나 같은 골빈 놈이랑 어울리시기엔 너무 아깝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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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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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아무 감정도 안 생긴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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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간판을 보고 달려드는 여자가 많았던 과거에 대입해봐도, 도도연 정도면 손가락에 꼽을 만큼 예쁜 편이다. 거기에 엄청난 능력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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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너무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 거기에 4살 차이라는 점까지 더해지니, 일종의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게 느껴진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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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딱 지금 같은 관계가 마음 편하다. 필요할 때 서로 돕고, 도움을 받는 그런 관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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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도도연에 대한 생각을 얼추 정리하는데, 도진이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던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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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다 형. 저희 집에 꽤 재밌는 시설이 하나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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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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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희 집 옥상에 노천탕을 만들어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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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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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깨끗한 물에다가 고급 재료들을 섞어서 최적의 온천 조합을 재현했어요. 저도 몇 번 써봤는데, 피로 회복에는 직빵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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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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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나는 뜨끈한 물에 몸 담그는 걸 좋아한다. 다만 집이랑 학교에 시설이 없어서 못 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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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이 게임, 온천 관련 보정도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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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물에 들어가 몸을 담그면 피로 해소가 빨라지는 보정이 더해질 때가 있다. 도진의 말대로라면, 아마 저 노천탕에도 그 효과가 있을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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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권에는 제대로 된 곳이 없어서 반 포기했는데 이게 왠 떡이냐. 이건 못 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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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오늘 선발투수기도 했고, 많이 피곤할 텐데 바로 가서 이용해봐요. 물은 뎁혀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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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이, 나 지금 바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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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들뜨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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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 마신 콜라 캔을 구긴 뒤 쓰레기통에 던지고는, 바로 베란다 문을 드르륵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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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혹시나 싶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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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노천탕에 아무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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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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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뜸을 들이는 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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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이내 흐릿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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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당연히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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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마 안 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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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뭔가 알아챘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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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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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여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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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노천탕 시설이 완비되어 있다. 일본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테마인데, 대나무 기둥으로 외벽을 감싸고, 화강암 석재들이 탕 주변을 오밀조밀 감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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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깨나 들었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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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수천 정도는 들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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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도연이 돈을 많이 벌기는 한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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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하,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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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의 중간쯤에 가서 몸을 풍덩 담갔다. 극락이 따로 없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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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상급 노천탕에 몸을 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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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해소가 20% 빨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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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예상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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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중상급 노천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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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급 노천탕은 일본 같은 자연 온천이 나는 곳에서나 사용이 가능한 점을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이 정도면 감지덕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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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자주 놀러 와야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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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희희낙락하는데, 무언가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먼저 온 선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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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도연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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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와서 몸을 담그고 있던 도연과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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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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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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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수건 한 장 걸친 채 탕에 몸을 담근 우리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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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제야 상황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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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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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묵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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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들짝 놀라며 거리를 벌리는 우리 둘. 아니 미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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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서, 성묵아? 네가 왜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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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새빨간 얼굴로 말을 더듬는 도연. 나 역시 혼란스럽긴 매한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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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읍, 도진이가 가보라고 했어요. 아무도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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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이가…,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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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짚이는 게 있는 듯한 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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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단 이 자리를 빠르게 벗어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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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불찰입니다. 미리 확인해봤어야 하는데…, 빨리 나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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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려고 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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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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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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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이 갑자기 내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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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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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묵아, 잠깐 단둘이 이야기 좀 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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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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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잠깐이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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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말에 슬쩍 뒤를 돌아보고는, 순간 숨이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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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듯 한층 상기되어 발그레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 그리고 수건 한장으로 가려지지 않는 폭력적인 몸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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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위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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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너무나도 자극적인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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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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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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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안에 감도는 찌릿한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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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피칭으로 정기를 다 쓴 것 같았던 하반신에서 신호가 왔다. 마치 ‘오, 이건 못 참지…!!’라고 말하기라도 하듯이. 조금만 자극을 받아도 벌떡 일어날 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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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일 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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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대로 여기에 있게 되면, 저번 올리비아 집에서 벌어진 그 참사를 다시 맞이하게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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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후배의 누나를 보고 커진 걸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니. 상상도 하기 싫은 끔찍한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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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일단은 거절하고 자리를 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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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묵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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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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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념에 빠져있던 나를 현실로 다시 끌고 오는 그녀의 목소리. 꽤나 간절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청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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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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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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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저렇게 말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나는 단호하게 딱 잘라 거절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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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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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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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국 내 본능에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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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란 참으로 슬픈 동물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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