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py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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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KiB
최근 야구부에서 활약하며 주변의 시선이 바뀐 것을 느끼냐고 묻는다면, 확실히 느끼고 있다고 답할 수 있다.
복도를 걷는데,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남학생 무리.
“저기 너, 야구부 금성묵 맞지?”
“어 맞는데.”
“경기 잘 봤다. 진짜 잘하더라.”
“아아, 땡큐.”
그렇게 일행 전부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지나가는데, 웬 쭈뼛쭈뼛한 모범생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 금성묵 선배님, 혹시 괜찮으시면 싸인 좀 부탁해도 될지….”
“당연히 되지, 펜 있어?”
그렇게 싸인을 몇 장 해주고 지나가는데, 이번엔 또 어느 여학생이 캔 음료를 건네온다.
“이, 이거 드세요!”
그리고는 후다닥 도망치는 여학생. 금성묵에 빙의한 후, 처음 겪어보는 해프닝이다.
‘설마 나, 여학생들한테도 인기가…?’
여자 팬 싫어하는 스포츠맨 없다고, 왠지 기쁘다. 나름 자신감을 얻어선 여학생 무리 쪽으로 몇 번인가 시선을 향해봤다.
“…히익!”
“꺗…!!”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앳된 비명을 지르는 여학생들. 누가 봐도 겁에 질린 표정이다.
‘음, 아무래도 착각인가 보다.’
자기 객관화를 마친 나는 기존의 교실이 아닌 다른 교실로 향했다. 오늘부터 영어 수업은 수준별로 분반이 되어 진행되기 때문.
‘서, 성묵이 너가 A클래스라고…!? 진심?’
내가 A클래스에 배정받으니, C클래스에 배정된 류지 녀석이 까무러치게 놀랐다. 나름 공부를 좀 하는 학교답게 그 커트라인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입장에선, A등급이 아닌 게 더 문제다.
‘…내가 영어 과외비에 박은 돈이 몇천인데.’
메이저 리그 진출한답시고 몇 년 전부터 꾸준히 현지인 교사를 초빙해 영어 과외를 받았던 나다. 진출 후에는 1년밖에 못 뛰긴 했지만, 재기를 노린답시고 미국 트레이닝 센터에 몇 년 지냈기에 실전 영어 경험도 꽤 됐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학생들이 꽤 놀란 반응이다. 대체로 ‘쟤가 왜 여기 있지?’ 하는 그런 반응이다.
“어, 금성묵이다!”
“뭐야, 진짜네?”
야구부 매니저인 신혜지와 주전 유격수 최아담. 소꿉친구인 둘이 날 보더니 반가워한다. 저 둘도 영어를 꽤 잘했던 모양.
“너흰 오늘도 붙어있네. 사실 사귀는 거 아니냐?”
“뭣……!?”
내 말에 흠칫 놀라더니 격노하는 둘. 대체로 최아담 쪽이 난리다.
“아씨, 금성묵 너 임마. 선은 넘지 말자?”
“우웩, 최잼민이랑 사귀다니. 무리무리.”
“나도 사양이다. 이 호박아…!!”
운만 살짝 띄워줬더니 알아서 투닥대는 둘. 수업만 아니었어도 팝콘이라도 가져왔을 텐데 참 아쉬울 따름이다. 곧 수업 종이 울리며 선생이 출석을 불렀다.
“강현철.”
“네.”
“금성묵.”
“옙.”
그렇게 내 이름이 불리고, 한창 출석을 부르는데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올리비아 램지.”
“……….”
조용한 교실.
선생은 한 번 더 확인했다.
“뭐야, 올리비아 학생 없어?”
“네 선생님, 오늘 출석 안 했어요.”
조리과 학생의 증언에 다음 학생으로 넘어가는 선생. 최아담이 다리를 쭉 뻗으며 아쉽다는 듯 말했다.
“뭐야, 나도 실물 한 번 보나 했는데.”
“내가 직접 보니까, 너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던데?”
“뒤진다 진짜, 사진 보니까 너보다 백배는 더 예쁘던… 끄헉!!”
배구부 스파이커 출신인 신혜지에게 등짝을 얻어맞은 최아담이 그대로 책상에 엎어졌다. 여전히 사이좋은 둘은 그렇다 치고, 학교까지 빼먹은 올리비아에 대해 걱정이 들었다.
‘답장이 오늘도 안 왔었지.’
뭔 일이 아닌 건가 싶은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노아를 찾아갔다.
“아하, 올리비아 언니가 연락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래, 오늘 출석도 안 했던데 혹시 무슨 일인지 알고 있어?”
최근에 그녀랑 친해진 노아라면 뭔가 알고 있을까 싶었지만, 그녀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뇨,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러냐, 후우. 그럼 어쩔 수 없-.”
“성묵 오빠가 직접 가보시는 건 어때요?”
“……?”
갑자기 뜬금없는 제안을 던지는 노아.
“어디를 가보란 건데?”
“당연히 올리비아 언니네 집이죠…!!”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솔루션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남자가 어딜 들어가냐.”
“성묵 오빠는 올리비아 언니의 몇 안 되는 친구잖아요?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방문하는 거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 거예요!”
“그런가…?”
여자 혼자 사는 집에 가본 적이 없는 나다. 그래서 노아의 말에 쉽게 수긍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집 주소를 알아야 방문할 거 아니냐. 지금 연락도 안 되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고 있거든요…!!”
“……??”
아니 얘 뭐야.
대체 언제 집 주소까지 알아냈대.
“헤헷…! 집에 좋은 식재료가 남아서 택배로 보내드린 적이 있거든요. 그때 알게 됐어요.”
“그런 거였나.”
나름 납득이 가는 이유다.
아무튼 그동안 올리비아에게 신세 진 게 많은 만큼, 한번 직접 가보기로 가닥을 잡았다.
“내가 한 번 가볼게. 주소는 이따가 보내줘.”
“네, 제가 톡으로 보내드릴게요…!!”
그렇게 나는 노아와 대화를 마치고 발걸음을 돌렸다.
“후후, 좋은 시간 보내시길….”
뭔가 그녀가 미심쩍은 미소를 지은 것 같지만, 아마 기분 탓이겠지.
“하아….”
올리비아는 침대에 누워있다.
그것도 교복을 입은 채 말이다.
학교를 가야 한다는 생각에 어찌저찌 입기는 했지만, 몸을 도무지 일으킬 수가 없었다.
“…어지러워.”
도도연, 노아와 삼자대면을 한 그날부터 무리하게 성묵의 도시락을 연습하던 올리비아는 결국 심하게 감기 몸살이 나고 말았다.
3차전인 무상고 전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도시락을 싸고 경기장에 가려 했지만, 결국에 일어나지 못했다.
“으읏….”
어느덧 시간은 5시.
학교 수업이 전부 끝날 시간이다.
겨우 몸을 일으켜 비척비척 일어난 그녀. 어지럼증에 그동안 읽지 못했던 핸드폰을 들어보니, 학교에서 연락이 몇 개 와있었다.
“선생님이랑 성묵 씨…, 둘이구나.”
새삼 좁은 인간관계를 체감하는 그녀. 우선 걱정을 끼친 것 같아 성묵의 문자에 답장하려는데, 그 때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지…?”
올리비아의 집 주소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방송을 보고 오는 스토커가 있을까 봐 그동안 철저하게 숨겼던 그녀다.
그녀는 인터폰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서, 성묵 씨…!?”
예상치도 못한 남사친의 등장에 깜짝 놀란 그녀. 우선은 현관으로 나가 문을 벌컥 열어주었다.
“올리비아, 집에 있었구나.”
“성묵씨, 우리 집은 어떻게….”
“노아가 알려줬어, 한 번 가보라더라.”
“아, 타카히나 양이….”
얼마 전 택배를 받은 걸 기억한 그녀. 이게 이렇게 연결될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방문한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성묵이란 건 그나마 안심되는 일이었다.
“열이 장난 아니네. 언제부터 이랬어?”
“…어제 아침부터요.”
“그래서 연락도 안 되고 경기장도 못 온 건가….”
머릿속에 퍼즐이 맞춰진 성묵. 그는 지금 올리비아의 상태를 쓱 보더니, 그녀가 휴식이 더 필요함을 눈치챘다.
“일단 좀 누워있어. 내가 죽이라도 좀 만들어 줄 테니까.”
“아, 네….”
지금 일어난 것도 억지로 기운을 쥐어짜낸 것에 불과했기에, 성묵의 말을 따라 방의 침대로 돌아가 기절하듯 쓰러진 그녀.
성묵은 냉장고를 뒤적이며 머리를 긁적였다.
"…재료가 뭐 하나 고급 아닌 게 없네."
확실히 월클 셰프의 딸은 다른 걸까. 최고급 파인 다이닝에서 볼법한 요리 재료들이 잔뜩 냉장고에 들어있었다. 쓰기 부담스럽긴 하지만, 일단은 뭐라도 먹여야 한다는 생각에 성묵은 이것저것 냉장고에서 꺼냈다.
"닭고기 없고, 오리가 있네…?"
"아니 흰쌀이 왜 없냐. 이건 뭐야, 리조또 용 쌀?"
나중에 올리비아가 말하길, 성묵의 도시락 용 재료들은 다른 곳에 빼두었다고 하는데 지금 당장 성묵의 눈앞에 보이는 건 죄다 양식 재료들 뿐이었다.우선은 얼추 죽 만드는데 쓸 재료들을 전부 빼낸 성묵은 냄비에 재료를 쏳아넣고는 보글보글 끓였다.
"이야, 재룟값만 해도 얼마냐.”
고급 재료가 잔뜩 들어간 초호화 죽을 완성한 성묵. 그 위에 트러플 오일까지 뚝뚝 떨어트려 조리를 완료했다. 그릇을 하나 꺼내어 죽을 옮겨 담은 그는 올리비아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야, 올리비아?”
대답이 없다.
아무래도 잠든 모양.
우선 그릇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 뒤, 이불을 쓱 덮어다 주려는데.
“………!?”
성묵을 갑자기 확 끌어안는 올리비아.
그녀의 돌발행동에 성묵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야, 올리비아…!?”
"……우웅."
“자, 잠깐. 나 숨 막히는데 놔줄래.”
“…싫어.”
"…!?"
“싫어, 안 떨어질래….”
“………!!!”
대체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올리비아 같은 미녀가 이렇게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며 몸을 비벼대면 건장한 남성인 성묵 입장에서는 견디기가 쉽지 않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는 자신에게 안긴 올리비아의 팔을 떼어놓았다.
“…우으으.”
“후, 힘들다 힘들어….”
겨우 그녀를 떼어놓은 성묵.
지금 그는 한가지 확신하는 것이 있다.
‘이 방에 더 있다간 위험해….’
팔팔 끓는 사춘기 소년, 그것도 남성 호르몬 상위 0.1%의 신체에 빙의한 성묵이다. 이 이상 자극을 받았다가는 무슨 일을 저지를지 스스로도 감당이 안 된다.
심호흡하며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한 성묵은, 서랍에서 포스트잇을 꺼내어 쪽지를 슥슥 남긴 그는 그대로 그녀의 집을 떠났다.
[올리비아, 죽 끓여놨으니까 먹고 푹 쉬어. 다음에 보자.]
-금성묵
그렇게 약 20분 정도 지났을까.
올리비아는 성묵이 끓인 죽의 트러플 오일 때문에 잠에서 깼다.
“죽…?”
고향과 멀리 떨어진 이역만리 땅에서 홀로 지내는 그녀에게 이런 걸 해줄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는데, 탁자 위의 포스트잇을 읽고는 조금 전의 일이 떠올랐다.
“아, 성묵 씨가 우리 집에….”
뜨문뜨문 기억이 떠오른 그녀.
우선 성묵이 해놓은 죽에 시선이 갔다. 뭔가를 챙겨 먹을 힘이 없었던 만큼, 반갑기 그지없는 음식이었다.
“처음이네, 가족 이외의 인물이 나만을 위해 요리를 해준 건….”
올리비아는 오묘한 기분을 느끼며 식은 죽을 한입 떠먹었다.
“…맛없어.”
한국식 죽 레시피에 양식 재료를 1대1 대응으로 때려 박아서 만든 성묵 스타일의 죽은 맛이 없었다. 의도한 바는 알겠지만, 재료들이 매칭이 안 되는 바람에 따로 놀았다.
그런데 왜일까.
피식-
그녀는 웃음이 나왔다.
다뤄본 적 없는 재료에 둘러싸인 성묵이 당황하며 만들었을 게 뻔히 보여서 그랬던 것일까. 그녀는 연거푸 성묵이 끓여준 죽을 입에 넣었다.
"…따뜻해."
분명히 다 식은 죽이다.
하지만 온전히 그녀만을 위해 끓인 이 죽에서는 묘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번개가 치듯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누군가를 위해 요리한다는 것의 의미.
지금까지 그녀는 얼굴도 모르는 불특정 다수를 위하여, 음식 자체의 퀄리티만을 높이는 걸 중시해왔다.
그게 정답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성묵이 끓여준 이 죽.
맛도 없는 데다 식어버린 죽이지만, 그녀를 위해 열심히 끓였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다른 요소들을 싹 덮어버릴 힘이 있었다.
단 한명을 위해 정성껏 마음을 담아 만든 요리. 맛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그 감정적이기 그지없는 개념이, 요리를 다른 차원의 것으로 바꿔버릴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얼마 전 느꼈던 감정.
앞으로도 성묵의 옆에서, 쭉 요리를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 감정. 그 정체 역시 깨닫게 되었다.
“나, 성묵 씨를 좋아하는구나.”
머리에 다시 열이 오른다.
난생처음 느낀 연심에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설상가상으로, 성묵이 올리비아의 집에서 떠나기 직전 그녀가 무얼 했는지까지 떠올랐다.
“아…!?”
성묵을 꽉 끌어안고는, 어린아이처럼 어리광 부렸다. 본래 몸 상태가 안 좋을 때 극도로 약해지는 그녀지만, 하필 그 모습을 성묵에게 보여줬다는 게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성묵씨 얼굴을 어떻게 봐….”
그녀의 이마에서 푸쉬쉬 연기가 올라왔다. 휴식 덕분에 호전됐던 몸의 열은, 언제 식었냐는 듯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푸헷취…!"
올리비아의 봄 감기는, 꽤나 길어질 모양이다.
어기적, 어기적-
나는 걷는 중이다.
그것도 아주 이상한 자세로 말이다.
[태양신맥에 의해 강화될 스텟을 골라주십시오.]
[태양신맥에 의해 강화될 스텟을 골라주십시오.]
…
..
.
“미치겠네 진짜.”
올리비아에게 받은 자극이 너무 강했다. 태양신맥의 발동 알람이 계속 머릿속에 울린다.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다.
지나가던 한 남자 꼬마가 내 걷는 모습을 보고 궁금했는지, 엄마에게 질문을 던진다.
“엄마, 저 형 왜 저렇게 걸어?”
“지지야 지지…!”
아이를 데리고 쌩 가버리는 아이 엄마. 음, 내가 부모였어도 백주대낮에 벌떡 선 미친놈이 길가에 어슬렁 대면 당장 도망칠 거다.
[태양신맥에 의해 강화될 스텟을…]
"…시끄러!!"
이거 큰일 났다.
한동안은 수그러들지 않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