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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거지 그리츠(Gritz) (5) - 떠들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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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주님을 뵙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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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의 당돌한 요청에, 집사는 지극히 사무적으로 대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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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군께서는 현재 업무로 바쁘십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저나 하인들에게 말씀해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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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당신들만으로는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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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경청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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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일단 듣고 결정하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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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는 잠시 집사를 지긋이 바라보고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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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를 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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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연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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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물론, 제가 어엿한 무녀로서 수호신님을 모시게 된 일을 축하하는 연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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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덤함을 가장하던 집사의 얼굴에, 미미한 곤혹스러움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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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서 말없이 대기 중이던 다른 하인들 역시 반응은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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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 대놓고 떠들지는 못할지라도, 시민들이 무녀를 반쯤 산 제물로 여기고 있다는 건 카닐리안 쪽에서도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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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에서 키워진 가축이 자기 도축일을 기념하며 축제를 열자고 하면, 그야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어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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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걸 대놓고 물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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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카닐리안 가문의 공식 입장상, 무녀 직위는 무척이나 명예롭고 영광된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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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그레이스는 뻔뻔한 태도로 주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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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이 영지의 모든 사람들은 수호신님과 저희 무녀들 덕분에 먹고 사는 거잖아요?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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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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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걸 축복하며 다들 기뻐하는 행사쯤은 있는 게 당연한 거죠. 오히려 여태까지 아무도 이런 걸 제안하지 않았다는 게 더 이상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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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는 한동안 망설이는 듯했지만, 결국 본인 선에서 처리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걸 인정했는지, 결정을 위로 떠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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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가주님께 여쭙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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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빨리 대답해 줘요. 행사의 주역이 되려면, 저도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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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기이한 시선 따윈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이, 사뭇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로 자기 방에 향하는 그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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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막상 방 안에 들어와 주변 시선을 피할 수 있게 되자, 그녀는 침대에 축 늘어져 “으어어”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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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팔로 이마를 덮은 채, 천장을 올려다보며 그레이스는 이전 그리츠와 함께 나눈 대화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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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으로 연회를 제안하라고요? 혹시, 여태까지 달라붙은 게 그렇게 짜증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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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풀이로 시키는 거 아니야, 이 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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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풀이가 아니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상한 일을 시키는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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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축제니 연회니 하면서 허튼 짓거리를 시켜야 놈들의 시선과 인력이 다른 곳으로 쏠릴 것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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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사람 몇몇 초대해서 벌이는 소규모 파티만해도 음식이며 집 안 정리며 신경 쓸 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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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영지의 지배자가 주최하는, 한 지역의 수호신을 모시는 연회는 대체 얼마나 많은 인력과 재물, 그리고 기력을 소모하게 만들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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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이래저래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고, 그만큼 자신이 뒤에서 일을 벌이기도 쉽다는 게 그리츠의 설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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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설명을 들은 뒤에도 그레이스의 반응은 영 신통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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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알겠는데, 그렇게 힘든 일이면 카닐리안에서 그냥 무시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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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원에 이런저런 후원을 해주거나, 품위 유지비라며 돈 몇 푼 던져주는 것과는 이야기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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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이 그레이스의 이런저런 억지를 들어주는 건 괜히 뭐든지 억압하려고 했다가 의식을 망치는 것보다 싸게 먹히기 때문이지, 그레이스를 진지하게 무녀로서 존중하고 대우하기 때문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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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녀가 가문의 자원을 대량으로 써먹자고 말한다면, 저들이 그걸 진지하게 들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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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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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그레이스의 염려와 다르게, 그리츠는 시원스레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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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닐리안 가문은 그레이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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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들어주는 것이 이득이라 여길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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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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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연회가 실제로 열리고, 네가 거기에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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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년이 드디어 미쳐버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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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정답이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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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선 아니라고 말해주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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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툴대는 그녀를 가볍게 무시한 채, 그리츠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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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동시에 무녀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가 진짜인지 아닌지 의심하는 녀석들도 나올 거다. 이 땅의 지배자 놈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말로 명예로운 자리가 아닐까, 하고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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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설마. 사람들이 얼마나 눈치가 빠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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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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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생각하기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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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 이 멍청아. 눈치가 빠르니까 오히려 믿는 거야. 정확히는, 믿고 싶어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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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츠가 들어 있는 오크통이 좌우로 들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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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에게는 어쩐지 그 동작이 퉷, 하고 침을 뱉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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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여기 인간들이 네년을 대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잖냐. 너를 희생양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자기들이 그 수혜를 보는 입장이니까 그런 거야. 고맙다고 말하자니 조롱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배척하는 것도 이상하지. 무녀 자리를 대놓고 거부해서 흉년이 오게 만든 후보조차 신벌이 무서워서 못 건드렸는데, 하물며 무녀 일을 받아들이고 있는 너는 오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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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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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에서 중요한 건 얼마나 그럴듯한지가 아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그 내용을 원하는 가지. 다소 의심스럽고, 신빙성이 떨어진들 뭐 어떠냐? 카닐리안에서 주장하듯이 무녀 자리가 특별하고 축복받은 자리라면, 자기들은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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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는 입을 뻐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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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처럼 적당히 맞장구를 치면서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째 쉽게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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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녀를 대신하듯이, 그리츠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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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무녀를 껄끄럽게 여기면, 그 감정은 수호신이나 카닐리안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공포는 통제의 한 수단이지만, 자발적인 호응을 끌어낼 수는 없지. 거기에 모든 무녀가 너처럼 순순히 저들의 유도대로 따르진 않을 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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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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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는 애매하게 긍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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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그레이스의 선대 무녀만 해도, 공포와 비탄에 잠긴 나머지 식음을 전폐하다가, 거의 산송장에 가까운 몰골로 수호신에게 바쳐졌다는 풍문을 들은 적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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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비해 이러니저러니 해도 하인들을 상대로 틱틱 대는 정도가 전부인 그레이스는 카닐리안 입장에선 모범생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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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제안을 받아들이면 드러나지 않은 부정적인 여론도 반전할 수 있고, 추후 무녀들의 관리도 쉬워지겠지. 가주라는 놈이 뭐가 이득인지도 판단 못하는 머저리가 아닌 이상은 분명히 호응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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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츠 씨는 대체 정체가 뭐예요? 평범한 거지치고는 아는 게 너무 많으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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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유식함에 의심을 품기보다 네 녀석의 무식함을 되돌아보기나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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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해도 진짜 기분 나쁘게 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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뺨을 부풀리며 삐진 티를 내는 것도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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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는 이내 중얼거리듯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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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한다고 해서 뭐가 바뀔까요? 아니, 어쩌면 뭔가 더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진 않을까요? 혹시 저 때문에 제 지인들이 피해를 보진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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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그녀를 둘러싼 환경은 더욱 나빠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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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애초에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리츠를 믿고 도박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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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뭘 믿고 그에게 자신의 인생을 건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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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레이스는 그리츠가 부디 단언해 주기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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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자기만 믿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그렇게 말해주기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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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야 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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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정체불명의 걸인은 그레이스의 기대에 응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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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소문은 정말로 소문이었을 뿐일지도 모르지. 너를 기다리는 건 잔혹한 산 제물의 운명이 아니라 천상인지 뭔지 하는 곳에서의 영생일지도 모른다. 괜히 위험부담을 감수해 봐야 네 인생만 피곤해질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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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츠의 목소리는 상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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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 연이어 독설을 퍼붓던 이의 목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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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순순히,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긴다면 너에게는 명예가 남을 거다. 가족을 위해, 도시를 위해, 영지를 위해 문자 그대로 몸을 바쳐 헌신한 성녀. 살아남을 방법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폐를 끼쳐선 안 된다며 그 방법을 마다한 성인. 이 얼마나 그럴듯한 일이냐? 죽는 그 순간까지 ‘나는 남을 위해 살았다’라고 뿌듯함을 품고 죽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그럴듯한 호상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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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레이스는 그것이 그리츠가 드러낼 수 있는 가장 격렬한 모멸이라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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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속에 감춰진 그의 눈빛에, 일말의 온기조차 담겨 있지 않을 거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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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곳에 있는 나는 개처럼 단순하다. 먹이를 주고 호의를 베푼 이에게 꼬리를 흔들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악의를 향한 이에게 이빨을 세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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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그것을 우둔함이라 말하겠지. 허나, 반대로 묻고 싶군. 그렇다면 어떠한 삶이 현명한 삶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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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을 먹이 사이에 숨겼다고 독이 없는 것처럼 구는 것이 현명함이냐? 몽둥이에 금박을 입혔다고 그것이 몽둥이가 아니라고 하는 게 현명함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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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의 이유를 남에게서 찾지 마라. 네 안의 망설임과 고통을 남을 위해서라고 포장하지 마라. 네가 무엇을 원하는 지, 네가 무엇을 싫어하는지. 단지 그것만을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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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묻지. 어떻게 하고 싶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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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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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일이 새삼스레 다시 떠올라, 그레이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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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거기서 울음이 터져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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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속내가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수치심이었을까, 아니면 반쯤 체념하고 있던 차에 쑥 하고 들어온 희망에 감격한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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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는 어느 쪽이 정답인지 그레이스 본인도 잘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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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그레이스가 그리츠의 작전을 받아들였고, 이젠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다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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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과 함께 허우적거리기를 얼마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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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가주로부터 승낙의 답변이 돌아온 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레이스는 겨우 혼란스러웠던 감정을 정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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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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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정말 되든 안 되든 해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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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님께서 연회를 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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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님이 수호신님께 가는 날을 축하하는 연회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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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소문이 퍼졌을 때, 도시의 시민들은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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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나 어지간히 주변 돌아가는 일에 귀를 닫고 사는 이들이 아니고서야, 무녀에 관한 사정을 모르지는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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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부정적인 의견들은 카닐리안 쪽에서 본격적으로 돈과 인력을 투자하면 투자할수록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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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길 거리도 적은 시대.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는 기회라는 건 그 자체로 인생에 몇 번 없는 낙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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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와 그 나름대로 교우가 있는 이들이야 어찌 됐든, 길 가다 한두 번 그녀와 스쳐 지나가는 게 전부였던 이들은 재빨리 이 흐름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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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들은 허겁지겁 축제를 대비해 술과 음식을 준비했고, 다른 이들은 미리미리 일감을 끝내 쉴 틈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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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 전체가 왁자지껄해졌고, 개중에서도 가장 바쁜 건 축제를 주관하는 카닐리안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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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길, 고작 일주일 만에 준비를 끝내라니 이게 말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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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자 관리한 거 누구야? 곡식은 묵은 것부터 빼야지, 새로 수확한 걸 먼저 빼면 어떻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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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청소하고, 천막도 빨리빨리 설치해! 손비는 놈들은 전부 뛰어가! 몸 쓰는 건 사람 고용해서 한다 쳐도 관리는 우리가 해야 할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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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의 제안을 들은 가주는 이번 축제가 단발로 끝나는 게 아니라 주기적으로 카닐리안의 지배력을 공고히 할 행사로 자리 잡길 원했고, 그런 가주의 의욕과 기대는 고스란히 아랫사람들의 부담과 절규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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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정신없이 혼잡해하는 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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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여기에 있던 오크통 어디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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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다 합쳐서 9개. 맞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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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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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서류 봐, 9개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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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길, 착각했나 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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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골판지 상자, 아니 오크통의 잠입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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