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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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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거지 그리츠(Gritz) (5) - 떠들썩한

“가주님을 뵙고 싶어요.”

그레이스의 당돌한 요청에, 집사는 지극히 사무적으로 대응했다.

“주군께서는 현재 업무로 바쁘십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저나 하인들에게 말씀해주시지요.”

“어차피 당신들만으로는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에요.”

“삼가 경청하겠습니다.”

결정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일단 듣고 결정하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레이스는 잠시 집사를 지긋이 바라보고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연회를 열고 싶어요.”

“…어떤 연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야 물론, 제가 어엿한 무녀로서 수호신님을 모시게 된 일을 축하하는 연회죠.”

무덤덤함을 가장하던 집사의 얼굴에, 미미한 곤혹스러움이 떠올랐다.

주변에서 말없이 대기 중이던 다른 하인들 역시 반응은 비슷했다.

공식적으로 대놓고 떠들지는 못할지라도, 시민들이 무녀를 반쯤 산 제물로 여기고 있다는 건 카닐리안 쪽에서도 잘 알고 있다.

목장에서 키워진 가축이 자기 도축일을 기념하며 축제를 열자고 하면, 그야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어지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걸 대놓고 물을 수는 없다.

적어도 카닐리안 가문의 공식 입장상, 무녀 직위는 무척이나 명예롭고 영광된 일이니까.

고로, 그레이스는 뻔뻔한 태도로 주장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이 영지의 모든 사람들은 수호신님과 저희 무녀들 덕분에 먹고 사는 거잖아요? 아니에요?”

“…그렇긴 하지요.”

“그러면 그걸 축복하며 다들 기뻐하는 행사쯤은 있는 게 당연한 거죠. 오히려 여태까지 아무도 이런 걸 제안하지 않았다는 게 더 이상하네요.”

집사는 한동안 망설이는 듯했지만, 결국 본인 선에서 처리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걸 인정했는지, 결정을 위로 떠넘겼다.

“알겠습니다. 가주님께 여쭙도록 하겠습니다.”

“가능한 빨리 대답해 줘요. 행사의 주역이 되려면, 저도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을 테니까.”

주변의 기이한 시선 따윈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이, 사뭇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로 자기 방에 향하는 그레이스.

허나 막상 방 안에 들어와 주변 시선을 피할 수 있게 되자, 그녀는 침대에 축 늘어져 “으어어”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오른팔로 이마를 덮은 채, 천장을 올려다보며 그레이스는 이전 그리츠와 함께 나눈 대화를 생각했다.


“…내 입으로 연회를 제안하라고요? 혹시, 여태까지 달라붙은 게 그렇게 짜증 났어요?”

“화풀이로 시키는 거 아니야, 이 년아.”

“화풀이가 아니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상한 일을 시키는 건데요.”

“그야 축제니 연회니 하면서 허튼 짓거리를 시켜야 놈들의 시선과 인력이 다른 곳으로 쏠릴 것 아니냐.”

집에 사람 몇몇 초대해서 벌이는 소규모 파티만해도 음식이며 집 안 정리며 신경 쓸 게 많다.

하물며 영지의 지배자가 주최하는, 한 지역의 수호신을 모시는 연회는 대체 얼마나 많은 인력과 재물, 그리고 기력을 소모하게 만들겠는가?

당연히 이래저래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고, 그만큼 자신이 뒤에서 일을 벌이기도 쉽다는 게 그리츠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설명을 들은 뒤에도 그레이스의 반응은 영 신통치 않았다.

“말은 알겠는데, 그렇게 힘든 일이면 카닐리안에서 그냥 무시할 거예요.”

고아원에 이런저런 후원을 해주거나, 품위 유지비라며 돈 몇 푼 던져주는 것과는 이야기가 다르다.

저들이 그레이스의 이런저런 억지를 들어주는 건 괜히 뭐든지 억압하려고 했다가 의식을 망치는 것보다 싸게 먹히기 때문이지, 그레이스를 진지하게 무녀로서 존중하고 대우하기 때문이 아니니까.

그런 그녀가 가문의 자원을 대량으로 써먹자고 말한다면, 저들이 그걸 진지하게 들어줄까?

“들어줄 거다.”

허나 그레이스의 염려와 다르게, 그리츠는 시원스레 단언했다.

카닐리안 가문은 그레이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정확히는, 들어주는 것이 이득이라 여길 것이라고.

“어째서요?”

“만약 연회가 실제로 열리고, 네가 거기에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냐?”

“저년이 드디어 미쳐버렸구나?”

“그것도 정답이긴 하지.”

“여기선 아니라고 말해주라고요.”

툴툴대는 그녀를 가볍게 무시한 채, 그리츠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무녀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가 진짜인지 아닌지 의심하는 녀석들도 나올 거다. 이 땅의 지배자 놈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말로 명예로운 자리가 아닐까, 하고 말이지.”

“에이, 설마. 사람들이 얼마나 눈치가 빠른데요.”

그레이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아니지, 이 멍청아. 눈치가 빠르니까 오히려 믿는 거야. 정확히는, 믿고 싶어 하겠지.”

그리츠가 들어 있는 오크통이 좌우로 들썩였다.

그레이스에게는 어쩐지 그 동작이 퉷, 하고 침을 뱉는 것처럼 느껴졌다.

“애초에 여기 인간들이 네년을 대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잖냐. 너를 희생양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자기들이 그 수혜를 보는 입장이니까 그런 거야. 고맙다고 말하자니 조롱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배척하는 것도 이상하지. 무녀 자리를 대놓고 거부해서 흉년이 오게 만든 후보조차 신벌이 무서워서 못 건드렸는데, 하물며 무녀 일을 받아들이고 있는 너는 오죽할까.”

“…….”

“소문에서 중요한 건 얼마나 그럴듯한지가 아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그 내용을 원하는 가지. 다소 의심스럽고, 신빙성이 떨어진들 뭐 어떠냐? 카닐리안에서 주장하듯이 무녀 자리가 특별하고 축복받은 자리라면, 자기들은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데.”

그레이스는 입을 뻐끔거렸다.

평소처럼 적당히 맞장구를 치면서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째 쉽게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그런 그녀를 대신하듯이, 그리츠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람들이 무녀를 껄끄럽게 여기면, 그 감정은 수호신이나 카닐리안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공포는 통제의 한 수단이지만, 자발적인 호응을 끌어낼 수는 없지. 거기에 모든 무녀가 너처럼 순순히 저들의 유도대로 따르진 않을 거 아니냐?”

“그건 뭐….”

그레이스는 애매하게 긍정했다.

당장 그레이스의 선대 무녀만 해도, 공포와 비탄에 잠긴 나머지 식음을 전폐하다가, 거의 산송장에 가까운 몰골로 수호신에게 바쳐졌다는 풍문을 들은 적이 있으니까.

그에 비해 이러니저러니 해도 하인들을 상대로 틱틱 대는 정도가 전부인 그레이스는 카닐리안 입장에선 모범생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네 제안을 받아들이면 드러나지 않은 부정적인 여론도 반전할 수 있고, 추후 무녀들의 관리도 쉬워지겠지. 가주라는 놈이 뭐가 이득인지도 판단 못하는 머저리가 아닌 이상은 분명히 호응할 거다.”

“그리츠 씨는 대체 정체가 뭐예요? 평범한 거지치고는 아는 게 너무 많으신 것 같은데.”

“남의 유식함에 의심을 품기보다 네 녀석의 무식함을 되돌아보기나 해라.”

“말을 해도 진짜 기분 나쁘게 하시네.”

뺨을 부풀리며 삐진 티를 내는 것도 잠시.

그레이스는 이내 중얼거리듯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이런 걸 한다고 해서 뭐가 바뀔까요? 아니, 어쩌면 뭔가 더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진 않을까요? 혹시 저 때문에 제 지인들이 피해를 보진 않을까요?”

만약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그녀를 둘러싼 환경은 더욱 나빠질 것이다.

아니, 애초에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리츠를 믿고 도박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대체 뭘 믿고 그에게 자신의 인생을 건단 말인가?

그러니까, 그레이스는 그리츠가 부디 단언해 주기를 원했다.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자기만 믿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그렇게 말해주기를 원했다.

“그거야 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지.”

하지만, 이 정체불명의 걸인은 그레이스의 기대에 응해주지 않았다.

“어쩌면 소문은 정말로 소문이었을 뿐일지도 모르지. 너를 기다리는 건 잔혹한 산 제물의 운명이 아니라 천상인지 뭔지 하는 곳에서의 영생일지도 모른다. 괜히 위험부담을 감수해 봐야 네 인생만 피곤해질 수도 있어.”

그리츠의 목소리는 상냥했다.

여태까지 연이어 독설을 퍼붓던 이의 목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이대로 순순히,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긴다면 너에게는 명예가 남을 거다. 가족을 위해, 도시를 위해, 영지를 위해 문자 그대로 몸을 바쳐 헌신한 성녀. 살아남을 방법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폐를 끼쳐선 안 된다며 그 방법을 마다한 성인. 이 얼마나 그럴듯한 일이냐? 죽는 그 순간까지 ‘나는 남을 위해 살았다’라고 뿌듯함을 품고 죽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그럴듯한 호상이냐?”

그리고, 그레이스는 그것이 그리츠가 드러낼 수 있는 가장 격렬한 모멸이라는 걸 깨달았다.

통 속에 감춰진 그의 눈빛에, 일말의 온기조차 담겨 있지 않을 거라는 것도.

“지금 이곳에 있는 나는 개처럼 단순하다. 먹이를 주고 호의를 베푼 이에게 꼬리를 흔들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악의를 향한 이에게 이빨을 세우지.”

“누군가는 그것을 우둔함이라 말하겠지. 허나, 반대로 묻고 싶군. 그렇다면 어떠한 삶이 현명한 삶이냐?”

“독을 먹이 사이에 숨겼다고 독이 없는 것처럼 구는 것이 현명함이냐? 몽둥이에 금박을 입혔다고 그것이 몽둥이가 아니라고 하는 게 현명함이냐?”

“행동의 이유를 남에게서 찾지 마라. 네 안의 망설임과 고통을 남을 위해서라고 포장하지 마라. 네가 무엇을 원하는 지, 네가 무엇을 싫어하는지. 단지 그것만을 생각해.”

“마지막으로 묻지. 어떻게 하고 싶냐?”


“으으으….”

그때의 일이 새삼스레 다시 떠올라, 그레이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왜 하필 거기서 울음이 터져서는….”

본인의 속내가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수치심이었을까, 아니면 반쯤 체념하고 있던 차에 쑥 하고 들어온 희망에 감격한 탓일까.

이제 와서는 어느 쪽이 정답인지 그레이스 본인도 잘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건 그레이스가 그리츠의 작전을 받아들였고, 이젠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다는 것뿐.

방 안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과 함께 허우적거리기를 얼마쯤.

마침내 가주로부터 승낙의 답변이 돌아온 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레이스는 겨우 혼란스러웠던 감정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래.

이젠 정말 되든 안 되든 해볼 수밖에 없었다.


“영주님께서 연회를 연다고?”

“무녀님이 수호신님께 가는 날을 축하하는 연회라는데?”

처음 소문이 퍼졌을 때, 도시의 시민들은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나 어지간히 주변 돌아가는 일에 귀를 닫고 사는 이들이 아니고서야, 무녀에 관한 사정을 모르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부정적인 의견들은 카닐리안 쪽에서 본격적으로 돈과 인력을 투자하면 투자할수록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즐길 거리도 적은 시대.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는 기회라는 건 그 자체로 인생에 몇 번 없는 낙이었으니.

그레이스와 그 나름대로 교우가 있는 이들이야 어찌 됐든, 길 가다 한두 번 그녀와 스쳐 지나가는 게 전부였던 이들은 재빨리 이 흐름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상인들은 허겁지겁 축제를 대비해 술과 음식을 준비했고, 다른 이들은 미리미리 일감을 끝내 쉴 틈을 만들어냈다.

영지 전체가 왁자지껄해졌고, 개중에서도 가장 바쁜 건 축제를 주관하는 카닐리안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제길, 고작 일주일 만에 준비를 끝내라니 이게 말이 돼!?”

“물자 관리한 거 누구야? 곡식은 묵은 것부터 빼야지, 새로 수확한 걸 먼저 빼면 어떻게 해!”

“광장 청소하고, 천막도 빨리빨리 설치해! 손비는 놈들은 전부 뛰어가! 몸 쓰는 건 사람 고용해서 한다 쳐도 관리는 우리가 해야 할 거 아니야!!”

그레이스의 제안을 들은 가주는 이번 축제가 단발로 끝나는 게 아니라 주기적으로 카닐리안의 지배력을 공고히 할 행사로 자리 잡길 원했고, 그런 가주의 의욕과 기대는 고스란히 아랫사람들의 부담과 절규로 이어졌다.

모두가 정신없이 혼잡해하는 와중.

“어라? 여기에 있던 오크통 어디 갔어?”

“응? 다 합쳐서 9개. 맞잖아?”

“10개 아니었나?”

“여기 서류 봐, 9개 맞아.”

“제길, 착각했나 보군.”

이상한 골판지 상자, 아니 오크통의 잠입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