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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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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거지 그리츠(Gritz) (4) - 모노로그
저희가 살아가는 이곳을, 바깥사람들은 벨라리아(Velaria)라고 부른다고 해요.
신비로운 베일에 감춰진 땅.
마치 면사에 감춰진 여인의 얼굴처럼, 외부인으로서는 그 내부를 들여다볼 수도, 속내를 알 수도 없다면서.
사방이 산맥과 강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盆地).
외부와 이어지는 통행로라고는 마차 하나 오가기 힘든 험난한 산길뿐.
이렇게 말하면 뭔가 굉장히 살기 힘든 곳 같지만, 막상 이곳 주민들은 그렇게 힘들어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아요.
아니, 오히려 바깥에 비하면 꽤 풍요롭죠.
저는 다른 곳으로 가본 적이 없으니 직접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할아버지 할머니들 이야기에 따르면 그래요.
이 땅은 축복을 받고 있다.
물이 풍부하고, 땅은 비옥하고, 농사를 지으면 평범한 땅의 몇 배나 되는 수확을 거둘 수 있다.
그 외에도 여러 자원이 풍족해서, 구태여 외부와 교류할 필요 없이 이 안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곳이라고.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보고 있는 게 저희 같은 고아나 당신 같은 거지라고 말했죠.
정말로 가난한 땅, 정말로 가난한 영지에서는 고아원이니 거지니 하는 건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고.
팔다리가 멀쩡하면 당연히 노동력으로서 일을 해야 하고, 그러다 몸 어딘가가 망가져서 움직일 수 없게 되면 버려져 죽을 뿐이라고.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여유가 없는 사회에서는 누군가에게 베푸는 이도, 그 베풂을 통해 살아남는 이도 있을 수 없다고.
그래요.
이 땅은 축복받은 땅이에요.
보다 정확히는 ‘수호신님’에게 축복을 받은 땅이죠.
수호신님은 본래 저 아득한 하늘에 계신 분이었는데, 어느 날 지상을 내려다보다가 이곳에서 궁핍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셨대요.
빼빼 마르고 눈에 빛이 없는 그들을 불쌍하게 여긴 수호신님은 지상에 내려와 이 땅에 축복을 내렸고, 본래 마르고 척박했던 이 땅은 수호신님의 능력으로 기름져졌어요.
농사는 하기만 하면 풍작이 나왔고, 나무에선 과일이 무성하게 열렸으며, 사람들은 이전처럼 배를 곯을 일이 없어졌죠.
수호신님은 이곳에 살던 어느 처녀와 혼인하셨고, 그들의 후손은 수호신님을 모시는 사제이자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고 해요.
지금은 카닐리안이라 불리는 가문이 바로 그거죠.
카닐리안은 영주 가문 아니냐고요?
음, 일단은 그렇다고 듣긴 했어요.
이곳 벨라리아는 바깥에 있는 보다 큰 나라의 일부에 불과하고, 그곳의 왕님이 카닐리안 가문의 주군이라고.
그런데 별 의미는 없어요.
아까 말했다시피 이 땅은 고립되어 있으니까요.
외부에서 이래라저래라 명령해 봐야, 카닐리안에서 무시하면 그냥 그걸로 끝이에요.
말 한 마리가 어찌어찌 지나가는 게 한계고, 마차가 오가는 건 꿈꾸기도 힘들 험난한 산길로 군대를 보내서 침공할 게 아니라면요.
그러니까 바깥의 임금님도 그냥 적당히 지배권을 인정받는 정도로 만족하고, 카닐리안도 그냥 형식상으로 신하를 자칭하는 걸로 장단을 맞추고, 딱 그 정도로 타협하는 거라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들은 것 치고는 굉장히 자세히 아는 것 같다고요?
그야 뭐 대표로 예시를 들었을 뿐, 한두 분에게 이 모든 걸 들은 건 아니니까요.
어릴 때부터 여기저기 돌아다니거나 수다 떠는 걸 좋아해서, 온갖 곳에 있는 온갖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졸랐어요.
산길 타고 넘어온 행상인이라든가, 바깥의 험난한 세상살이에 지쳐 넘어온 유랑자라든가, 베일에 감춰진 신비한 영지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모험가도 있었죠.
아, 왕님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이야기인데, 사실 이 벨라리아는 계속 주인이 바뀌었다고 하네요.
바깥에 있는 나라가 망하고 바뀌면 거기서 충성 요구를 하고, 그때마다 적당히 호응해 줬다나 뭐라나.
가장 최근에 망한 건 마왕인지 뭔지 하는 녀석 때문에 여러 나라가 박살 났을 때라고 하는데, 그리츠 씨는 마왕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나요?
술 잘 마시고 코가 빨갛던 모험가 아저씨 이야기에 따르면 몸집이 성채보다 더 커다란 드래곤으로, 입에서는 독기를 내뿜었다고 하던데.
에? 아니라고요?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 모습? 하아, 속았네.
…음, 뭔가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버렸네요. 그리츠 씨가 영주 어쩌고 하는 질문을 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주세요.
아무튼, 이 땅이 풍요로운 건 전부 수호신님의 축복 덕분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수호신님께 감사를 표하고, 그분의 수발을 들기 위해 ‘무녀’라는 이들이 선출되죠.
무녀는 대략 10년 정도의 시간 동안 수호신님의 곁에서 봉사하고, 그 보상으로 하늘에 있는 수호신님의 저택에서 영원한 삶을 얻는다고 해요.
그리고 그렇게 본래 있던 무녀가 하늘로 가면, 대기 중이던 ‘다음 무녀’가 그 자리를 대체하죠. 그게 계속 반복되는 거예요.
…알아요, 어딘지 모르게 수상쩍은 이야기라는 거.
하늘로 올라간다든가, 영원한 삶이라든가, 말은 그럴듯해도 남은 사람들이 그걸 확인할 방법은 없잖아요.
의심 많은 사람들은 무녀를 그냥 산 제물 같은 거로 생각하고, 신심이 깊은 이들은 그런 건 불경하다고 말하죠.
아쉽게도 뒷쪽 목소리가 더 커요.
왜냐하면 이 땅의 지배자인 카닐리안이 수호신님의 후손이니까.
저처럼 어지간히 정신 나간 녀석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영주님 욕을 대놓고 하겠어요? 음? 이상하네, 여기가 태클이 들어와야 하는 부분인데.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따로 지적할 게 뭐 있냐고요? 너무해.
아무튼… 과거에도 저처럼 의심을 품은 이들이 전혀 없던 건 아니었어요.
개중 한 명은 죽기 싫다면서 아예 무녀가 되기를 거부했죠.
사람들은 그런 무녀 후보의 행동을 안쓰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카닐리안 가문의 눈치를 살폈대요.
그들이 혹시 크게 분노하며 괜히 무녀 후보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까지 벌을 내리면 어쩌나 싶어서.
그런데 어째서인지, 카닐리안은 무녀 후보에게 아무런 벌도 내리지 않았어요.
중요한 것은 무녀의 의지이니, 무녀 본인이 거절한다면 어쩔 수 없다면서.
무녀 일을 피할 수 있게된 후보는 기뻐하며 카닐리안에게 감사를 표했고, 그렇게 모든 게 술술 풀리는 듯했어요.
그러니까, 바로 그다음 해부터 기록적인 흉작이 이어지기 까진 그랬죠.
강은 마르고, 땅은 갈라지고, 나무마저 생기를 잃었어요.
그거 아세요? 여기 벨라리아는 같은 크기의 다른 영지와 비교하면 사람들이 엄청 많은 편이래요.
농사가 늘 잘되니 그만큼 인구수도 풍족하다고 했죠.
그런데, 그건 달리 말하자면 먹을 입이 많다는 뜻이에요.
바깥과의 교류도 거의 없으니, 어디 다른 곳에서 도움을 받을 수도 없어요.
사람들은 이게 다 무녀 후보 때문이라고 말했어요.
수호신님을 모시는 일을 거부해서, 분노한 그분이 이 땅에 내리던 축복을 거두어버린 거라고.
지금이라도 당장 수호신님께 찾아가 제 역할을 다하라고.
뭐, 당시 일을 직접 겪은 할아버지 말로는 큰 목소리를 낸 건 한 줌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그냥 침묵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 상황에서는 그 침묵이야말로 은근한 동의나 마찬가지였죠.
그래도, 무녀 후보는 버텼다고 해요.
결국 자기보고 너희들 대신 죽으라고 하는 거 아니냐고, 무녀 자리가 그렇게 영광된 거라면 너희가 대신하라면서, 자기를 욕하던 이들에게 반발했죠.
사람들은 분노하면서도 무녀 후보에게 직접 손을 대진 못했어요. 자칫 신벌이 내리기라도 하면 어쩌겠어요?
그래서 말이죠.
그녀의 오빠가 대신 매달렸어요.
무녀의 집 근처에 있던 커다란 나무에, 목을 메고 죽은 오빠의 시체가 대롱대롱, 마치 무녀 후보에게 보라는 것처럼 매달려 있었죠.
사건은 자살이라는 걸로 처리됐어요.
오빠의 머리 부분에 둔기로 얻어맞은 흔적이 있다든가, 목을 맨 밧줄의 형태가 자살치고는 이상하다든가,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도시의 사람들이 자살이라고 결정했으니까, 그건 자살이 되었답니다.
여동생의 잘못을 보고 부끄러워서, 사람들에게 차마 면목이 없어서, 그래서 죽은 거라고.
무녀 후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어요.
어쩌면 버티지 않은 걸지도 몰라요. 그 이상 버틴다면 남은 가족들도 ‘못난 가족을 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게’ 될 테니까.
그녀가 자기 역할을 받아들여 도시에서 모습을 감춘 뒤, 땅은 서서히 풍요로움을 되찾았어요.
뭐 그런다고 망한 농사가 곧바로 돌아오진 않았지만, 비축분이라든가 산속을 헤맨다든가 하면서 어찌어찌 다음 해까지 버틸 정도는 됐죠.
그래서 사람들은 알게 되었죠.
아,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그 이야기는, 단순히 지어낸 게 아니었구나.
수호신님은 정말로 계시고, 이 땅은 그로 인해 풍요롭구나.
그리고, 무녀로 선정된 이가 제 역할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커다란 재앙이 찾아오겠구나, 하고.
십 년에 걸쳐 한 명.
딱 한 명만 희생하면, 이 땅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풍요롭게 생활할 수 있어요.
무녀로 선택된 입장에선 그야말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죠.
그래서, 저도 거부하지 않기로 했어요.
아니, 이왕이면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죠.
하지만, 그렇잖아요.
제가 싫다고 떼를 써도, 무섭다며 벌벌 떨어도, 그저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할 뿐이에요.
그런다고 고아원의 원장님이, 다른 아이들이 저를 도울 방법은 없어요.
아니, 도우려고 해서도 안 돼요.
도시 사람들은 제가 무녀 역할을 받아들이고 있는 동안은 죄책감과 껄끄러움 그 사이쯤에 있는 태도로 저나 제 지인들을 존중해주지만, 제가 역할을 다하려고 하지 않는 순간 곧바로 공격적으로 바뀔 테니까요.
설령 그렇게 변하는 이들이 백 명 중 단 하나에 불과하더라도, 힘없는 약자에게는 항거할 수 없는 폭력일 테니까요.
그래서 웃었어요.
나는 괜찮다고, 좋은 걸 먹고, 좋은 걸 입고, 돈도 많이 받아서 펑펑 쓰고 다닌다고, 앞으로도 몇 년 잠깐 고생하다가 그 뒤엔 영생인지 뭔지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그렇게 보여주려고 했죠.
그런데… 그게 잘 안되네요.
고아원으로 돌아가서 아무리 밝게 행동하고 즐거운 듯이 웃어도, 저를 보는 이들의 눈동자 한구석에서 아련함이 사라지질 않아요.
저를 잘 모르는 사람들, 저와 그리 가깝지 않은 사람들은 너무도 간단히 속여넘길 수 있는데, 정작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은 이들은 항상 제 눈치를 살펴요.
그래서 카닐리안 저택으로 돌아가면 늘 고민에 잠기죠.
내 연기가 서툴렀나, 거기서는 이렇게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 첫날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뭐 이런 고민들요.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다 보면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도 떠오르고, 그런 생각들은 아무리 없애려고 해도 사라지지를 않아요.
꼭 물에 빠트린 사과처럼, 손을 써서 수면 아래로 눌러도, 눌러도, 다시금 위로 떠오르는 거죠.
그런 건 힘으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어요. 그냥 다른 걸 보며 못 본 척하는 게 최고죠.
그래서, 그러니까, 그리츠 씨, 당신을 쫓는 일이 즐거웠어요.
마음껏 바보 같은 일을 할 수 있어서.
골치 아프고 생각하기 싫은 것들을 잊어버릴 수 있어서.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날 무렵이네요.
할 이야기가 더 이상 없어서 그런 거냐고요? 하하, 뭐 그런 것도 없잖아 있긴 하지만, 그보단 근본적인 문제에요.
무녀가 수호신님 앞에서 잘못된 행동을 해 그분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기 위한, 무녀로서의 품위와 예절을 배우는 교육 기간.
그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기간이 끝나고 나면, 저는 이제 무녀로서 책무를 다하게 되겠죠.
…음! 괜찮네요, 이거.
사실은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고 떠나려고 했는데, 털어놓으니까 의외로 제법 후련해요.
그리츠 씨처럼 이상하고, 무례하고, 상식으로는 잴 수 없는 사람이 상대라서 털어놓을 수 있었을지도.
그러면,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뭐라고요?
멍청하고 갑갑한 데다가 눈치도 더럽게 없는 년? 우와, 말이 심하시네!
뭐 특별히 거창한 위로를 바란 건 아니었어도, 그래도 욕을 퍼붓는 건 조금, 으음?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해보면 안다고요?
아니, 그게 그리 쉬운 게 아닌데 말이죠.
……진심이에요?
***
“그래 이 미련한 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