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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거지 그리츠(Gritz) (4) - 모노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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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살아가는 이곳을, 바깥사람들은 벨라리아(Velaria)라고 부른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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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운 베일에 감춰진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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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면사에 감춰진 여인의 얼굴처럼, 외부인으로서는 그 내부를 들여다볼 수도, 속내를 알 수도 없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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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산맥과 강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盆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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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와 이어지는 통행로라고는 마차 하나 오가기 힘든 험난한 산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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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면 뭔가 굉장히 살기 힘든 곳 같지만, 막상 이곳 주민들은 그렇게 힘들어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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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오히려 바깥에 비하면 꽤 풍요롭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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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다른 곳으로 가본 적이 없으니 직접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할아버지 할머니들 이야기에 따르면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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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은 축복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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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풍부하고, 땅은 비옥하고, 농사를 지으면 평범한 땅의 몇 배나 되는 수확을 거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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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여러 자원이 풍족해서, 구태여 외부와 교류할 필요 없이 이 안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곳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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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혜택을 가장 많이 보고 있는 게 저희 같은 고아나 당신 같은 거지라고 말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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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가난한 땅, 정말로 가난한 영지에서는 고아원이니 거지니 하는 건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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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다리가 멀쩡하면 당연히 노동력으로서 일을 해야 하고, 그러다 몸 어딘가가 망가져서 움직일 수 없게 되면 버려져 죽을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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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여유가 없는 사회에서는 누군가에게 베푸는 이도, 그 베풂을 통해 살아남는 이도 있을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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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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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은 축복받은 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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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정확히는 ‘수호신님’에게 축복을 받은 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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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신님은 본래 저 아득한 하늘에 계신 분이었는데, 어느 날 지상을 내려다보다가 이곳에서 궁핍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셨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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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빼 마르고 눈에 빛이 없는 그들을 불쌍하게 여긴 수호신님은 지상에 내려와 이 땅에 축복을 내렸고, 본래 마르고 척박했던 이 땅은 수호신님의 능력으로 기름져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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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는 하기만 하면 풍작이 나왔고, 나무에선 과일이 무성하게 열렸으며, 사람들은 이전처럼 배를 곯을 일이 없어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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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신님은 이곳에 살던 어느 처녀와 혼인하셨고, 그들의 후손은 수호신님을 모시는 사제이자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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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카닐리안이라 불리는 가문이 바로 그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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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닐리안은 영주 가문 아니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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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일단은 그렇다고 듣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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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벨라리아는 바깥에 있는 보다 큰 나라의 일부에 불과하고, 그곳의 왕님이 카닐리안 가문의 주군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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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별 의미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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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말했다시피 이 땅은 고립되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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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에서 이래라저래라 명령해 봐야, 카닐리안에서 무시하면 그냥 그걸로 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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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리가 어찌어찌 지나가는 게 한계고, 마차가 오가는 건 꿈꾸기도 힘들 험난한 산길로 군대를 보내서 침공할 게 아니라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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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바깥의 임금님도 그냥 적당히 지배권을 인정받는 정도로 만족하고, 카닐리안도 그냥 형식상으로 신하를 자칭하는 걸로 장단을 맞추고, 딱 그 정도로 타협하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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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들은 것 치고는 굉장히 자세히 아는 것 같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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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뭐 대표로 예시를 들었을 뿐, 한두 분에게 이 모든 걸 들은 건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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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여기저기 돌아다니거나 수다 떠는 걸 좋아해서, 온갖 곳에 있는 온갖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졸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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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 타고 넘어온 행상인이라든가, 바깥의 험난한 세상살이에 지쳐 넘어온 유랑자라든가, 베일에 감춰진 신비한 영지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모험가도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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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왕님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이야기인데, 사실 이 벨라리아는 계속 주인이 바뀌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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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 있는 나라가 망하고 바뀌면 거기서 충성 요구를 하고, 그때마다 적당히 호응해 줬다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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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에 망한 건 마왕인지 뭔지 하는 녀석 때문에 여러 나라가 박살 났을 때라고 하는데, 그리츠 씨는 마왕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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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잘 마시고 코가 빨갛던 모험가 아저씨 이야기에 따르면 몸집이 성채보다 더 커다란 드래곤으로, 입에서는 독기를 내뿜었다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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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아니라고요?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 모습? 하아, 속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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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뭔가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버렸네요. 그리츠 씨가 영주 어쩌고 하는 질문을 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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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 땅이 풍요로운 건 전부 수호신님의 축복 덕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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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런 수호신님께 감사를 표하고, 그분의 수발을 들기 위해 ‘무녀’라는 이들이 선출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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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는 대략 10년 정도의 시간 동안 수호신님의 곁에서 봉사하고, 그 보상으로 하늘에 있는 수호신님의 저택에서 영원한 삶을 얻는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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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렇게 본래 있던 무녀가 하늘로 가면, 대기 중이던 ‘다음 무녀’가 그 자리를 대체하죠. 그게 계속 반복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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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요, 어딘지 모르게 수상쩍은 이야기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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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올라간다든가, 영원한 삶이라든가, 말은 그럴듯해도 남은 사람들이 그걸 확인할 방법은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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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 많은 사람들은 무녀를 그냥 산 제물 같은 거로 생각하고, 신심이 깊은 이들은 그런 건 불경하다고 말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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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뒷쪽 목소리가 더 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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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이 땅의 지배자인 카닐리안이 수호신님의 후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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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처럼 어지간히 정신 나간 녀석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영주님 욕을 대놓고 하겠어요? 음? 이상하네, 여기가 태클이 들어와야 하는 부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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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따로 지적할 게 뭐 있냐고요? 너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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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과거에도 저처럼 의심을 품은 이들이 전혀 없던 건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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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중 한 명은 죽기 싫다면서 아예 무녀가 되기를 거부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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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런 무녀 후보의 행동을 안쓰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카닐리안 가문의 눈치를 살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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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혹시 크게 분노하며 괜히 무녀 후보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까지 벌을 내리면 어쩌나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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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째서인지, 카닐리안은 무녀 후보에게 아무런 벌도 내리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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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무녀의 의지이니, 무녀 본인이 거절한다면 어쩔 수 없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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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 일을 피할 수 있게된 후보는 기뻐하며 카닐리안에게 감사를 표했고, 그렇게 모든 게 술술 풀리는 듯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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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바로 그다음 해부터 기록적인 흉작이 이어지기 까진 그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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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 마르고, 땅은 갈라지고, 나무마저 생기를 잃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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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아세요? 여기 벨라리아는 같은 크기의 다른 영지와 비교하면 사람들이 엄청 많은 편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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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가 늘 잘되니 그만큼 인구수도 풍족하다고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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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건 달리 말하자면 먹을 입이 많다는 뜻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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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과의 교류도 거의 없으니, 어디 다른 곳에서 도움을 받을 수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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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게 다 무녀 후보 때문이라고 말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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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신님을 모시는 일을 거부해서, 분노한 그분이 이 땅에 내리던 축복을 거두어버린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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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도 당장 수호신님께 찾아가 제 역할을 다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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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당시 일을 직접 겪은 할아버지 말로는 큰 목소리를 낸 건 한 줌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그냥 침묵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 상황에서는 그 침묵이야말로 은근한 동의나 마찬가지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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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무녀 후보는 버텼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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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자기보고 너희들 대신 죽으라고 하는 거 아니냐고, 무녀 자리가 그렇게 영광된 거라면 너희가 대신하라면서, 자기를 욕하던 이들에게 반발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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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분노하면서도 무녀 후보에게 직접 손을 대진 못했어요. 자칫 신벌이 내리기라도 하면 어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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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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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오빠가 대신 매달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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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의 집 근처에 있던 커다란 나무에, 목을 메고 죽은 오빠의 시체가 대롱대롱, 마치 무녀 후보에게 보라는 것처럼 매달려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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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자살이라는 걸로 처리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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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의 머리 부분에 둔기로 얻어맞은 흔적이 있다든가, 목을 맨 밧줄의 형태가 자살치고는 이상하다든가,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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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사람들이 자살이라고 결정했으니까, 그건 자살이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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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의 잘못을 보고 부끄러워서, 사람들에게 차마 면목이 없어서, 그래서 죽은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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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 후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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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버티지 않은 걸지도 몰라요. 그 이상 버틴다면 남은 가족들도 ‘못난 가족을 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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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자기 역할을 받아들여 도시에서 모습을 감춘 뒤, 땅은 서서히 풍요로움을 되찾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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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런다고 망한 농사가 곧바로 돌아오진 않았지만, 비축분이라든가 산속을 헤맨다든가 하면서 어찌어찌 다음 해까지 버틸 정도는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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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사람들은 알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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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그 이야기는, 단순히 지어낸 게 아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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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신님은 정말로 계시고, 이 땅은 그로 인해 풍요롭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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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녀로 선정된 이가 제 역할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커다란 재앙이 찾아오겠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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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에 걸쳐 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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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명만 희생하면, 이 땅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풍요롭게 생활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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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로 선택된 입장에선 그야말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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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도 거부하지 않기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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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왕이면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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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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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싫다고 떼를 써도, 무섭다며 벌벌 떨어도, 그저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할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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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다고 고아원의 원장님이, 다른 아이들이 저를 도울 방법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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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도우려고 해서도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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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사람들은 제가 무녀 역할을 받아들이고 있는 동안은 죄책감과 껄끄러움 그 사이쯤에 있는 태도로 저나 제 지인들을 존중해주지만, 제가 역할을 다하려고 하지 않는 순간 곧바로 공격적으로 바뀔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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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그렇게 변하는 이들이 백 명 중 단 하나에 불과하더라도, 힘없는 약자에게는 항거할 수 없는 폭력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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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웃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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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괜찮다고, 좋은 걸 먹고, 좋은 걸 입고, 돈도 많이 받아서 펑펑 쓰고 다닌다고, 앞으로도 몇 년 잠깐 고생하다가 그 뒤엔 영생인지 뭔지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그렇게 보여주려고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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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게 잘 안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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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원으로 돌아가서 아무리 밝게 행동하고 즐거운 듯이 웃어도, 저를 보는 이들의 눈동자 한구석에서 아련함이 사라지질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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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잘 모르는 사람들, 저와 그리 가깝지 않은 사람들은 너무도 간단히 속여넘길 수 있는데, 정작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은 이들은 항상 제 눈치를 살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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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카닐리안 저택으로 돌아가면 늘 고민에 잠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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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연기가 서툴렀나, 거기서는 이렇게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 첫날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뭐 이런 고민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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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다 보면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도 떠오르고, 그런 생각들은 아무리 없애려고 해도 사라지지를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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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물에 빠트린 사과처럼, 손을 써서 수면 아래로 눌러도, 눌러도, 다시금 위로 떠오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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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힘으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어요. 그냥 다른 걸 보며 못 본 척하는 게 최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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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러니까, 그리츠 씨, 당신을 쫓는 일이 즐거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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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껏 바보 같은 일을 할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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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치 아프고 생각하기 싫은 것들을 잊어버릴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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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날 무렵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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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이야기가 더 이상 없어서 그런 거냐고요? 하하, 뭐 그런 것도 없잖아 있긴 하지만, 그보단 근본적인 문제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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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가 수호신님 앞에서 잘못된 행동을 해 그분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기 위한, 무녀로서의 품위와 예절을 배우는 교육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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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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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이 끝나고 나면, 저는 이제 무녀로서 책무를 다하게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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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괜찮네요,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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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고 떠나려고 했는데, 털어놓으니까 의외로 제법 후련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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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츠 씨처럼 이상하고, 무례하고, 상식으로는 잴 수 없는 사람이 상대라서 털어놓을 수 있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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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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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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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하고 갑갑한 데다가 눈치도 더럽게 없는 년? 우와, 말이 심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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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특별히 거창한 위로를 바란 건 아니었어도, 그래도 욕을 퍼붓는 건 조금, 으음? 그게 무슨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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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면 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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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게 그리 쉬운 게 아닌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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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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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 미련한 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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