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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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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거지 그리츠(Gritz) - 괴짜
“오늘, 저는 자유에요.”
회색 머리가 인상적인 소녀 그레이스(Grace)는, 매우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태도로 단언했다.
그런 그레이스의 말에, 카닐리안(Carnelian) 가문의 집사는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조아렸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무녀님.”
차분한 말투와 표정, 우아하면서도 절제된 몸놀림.
대영주이자 대지주. 이 땅의 실질적인 군주나 다름없는 카닐리안의 품격과 위세를 보여주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레이스는 그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시중 들 사람이 필요하다면서 다른 사람들을 잔뜩 붙이는 것도, 호위를 위해서라면서 뒤에서 몰래몰래 따라와도 안 돼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건 가주께서 저에게 약속하신 보상이에요. 그러니까, 절대, 절대로 제 휴일을 침해하지 말아 주세요. 알겠죠?”
“알고 있습니다. 걱정하시는 것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집요한 확인에 짜증이 날 법도 하건만, 당황하거나 성가셔하는 기색조차 없이 단언하는 집사.
그를 지긋이 노려보던 그레이스는, 이내 싱긋 웃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면, 다녀오겠습니다! 와! 자유다!”
그녀의 얼굴에는 무척이나 산뜻한 미소가 걸려 있었는데, 여기서 조금만 더 하면 그대로 콧노래라도 부를 것 같은 모습이었다.
카르디안 저택은 도시와는 상당히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다.
통치자의 거처가 백성들이 북적거리며 사는 곳과 가까운 곳에 있으면 그 위엄에 흠이 간다는 이유였다.
말이나 마차 없이 이동하기에는 살짝 부담스러운 거리였지만, 그레이스는 개의치 않았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험한 산길도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니며 약초나 과일 따위를 채집하던 그녀였다.
본의 아닌 저택 생활로 예전보다 살짝 몸이 무뎌지긴 했으나, 이 정도 도보 이동쯤이야 딱히 난관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모양새 그 자체는 지극히 우아하고 차분한, 허나 그 속도만큼은 어지간한 뜀박질만큼이나 빠르게 이동하기를 수십 분.
활기와 소란으로 가득 찬 도시에 그녀가 발을 들이자, 지나가던 행인 중 일부의 시선이 그레이스를 향했다.
그들의 반응은 세세한 차이는 있을지언정 큰 틀에서는 동일했다.
우선은 그레이스의 얼굴을 보며 호의, 호기심, 호색 등의 시선을 향한다.
그 후 그레이스의 복식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하거나 묘하게 안색이 나빠져 재빨리 시선을 돌린다.
보아선 안 되는 것을 보았다는 듯이, 혹은 함부로 엮이는 걸 피하고 싶다는 듯이.
“…음, 일단 빵집부터 갈까!”
마치 연극 무대의 배우처럼 묘하게 경쾌하고 또박또박 혼잣말을 한 뒤, 그레이스는 익숙한 듯이 도시를 나아갔다.
“어서 오세요! 지금 막 구운 빵입니다! 식기 전에 먹는 게 가장 맛있어요!”
후덕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연신 호객 행위를 한다.
그녀의 가게 앞 매대에는 수십 개가 넘는 빵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서서히 퍼져 나오는 향이 무척이나 고소했다.
만약 다른 도시의 여행객이 이 모습을 보았더라면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귀족들의 식탁에나 오를 법한 고급스러운 빵들이 길거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팔리고 있었으니까.
허나 거리의 시민들은 그 모습이 익숙한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빵을 구매했고, 마침내 그레이스의 차례가 왔다.
“자자, 무슨 빵을 찾으… 아.”
그레이스의 얼굴을 본 빵집 주인의 얼굴이 순간 당혹으로 굳는다.
그리고 이내 본인이 그런 반응을 나타냈다는 것에 놀란 듯이, 다급히 표정을 정돈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어, 어서 오십시오, 무녀님.”
“에이, 무녀님은 무슨. 그냥 예전처럼 그레이스라고 해주세요.”
그레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빵집 주인의 반응 같은 건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빵집 주인은 잠시 망설이는 기색이었지만, 그레이스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빵을 고르는 모습을 보고는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그래, 그레이스. 고르기 어려우면 추천해 줄까?”
“대충 열 개쯤 부탁드려요! 나머지 열 개는 제가 고를 테니까.”
“네가 예전부터 먹성 좋은 거야 알고 있다만, 그렇게 식탐을 부렸다간 언덕에서 데굴데굴 구르게 될걸?”
“혼자 먹는 거 아니거든요! 동생들 가져다줄 거예요. 그러니까 좋은 걸로 골라주셔야 해요?”
“걔들이 맛을 알기나 해? 어차피 허겁지겁 입에 욱여넣을 게 뻔하구먼.”
“아! 진실로 때리기 금지!”
그레이스와 빵집 주인 사이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흐른다.
그 왁자지껄한 모습에, 그레이스를 보며 묘하게 긴장하고 있던 사람들도 시선을 누그러트렸다.
커다란 바구니와 거기에 담긴 빵을 품에 한가득 안은 채, 그레이스는 도시의 서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윽고 그녀가 도착한 곳은 도시와 숲 사이에 있는 경계 지역이었는데, 그곳에는 서로 다른 외관의 두 건물이 나란히 서 있었다.
한쪽은 매우 낡고 허름하여 머지않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고, 다른 한쪽은 아직 건설 도중인 것으로 보였으나 사용된 자재나 짜임새가 도시 중심부의 어지간한 저택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았다.
새로 건축 중인 건물을 보는 그레이스의 입가에는 미소가 담겨 있었지만, 그 눈빛에는 희미하게 아련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어? 레이 언니!”
“와아! 누나다!”
어린아이 특유의 높은 목소리와 두다다하고 경쾌한 뜀박질 소리.
자기를 향해 빠르게 접근하는 아이들의 기척을 느낀 그레이스는 익살스러운 빛으로 표정을 덧씌우며 고아원의 동생들을 맞이했다.
“다들 잘 있었어? 원장님 말은 잘 들었고?”
“누나, 근데 그거 뭐야? 빵이야?”
“우리 줄 거지? 그렇지?”
질문은 사뿐히 무시한 채 제 용건들만 말하는 동생들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그레이스는 말했다.
“빵이지. 근데 말 잘 듣는 애들만 먹을 수 있는 빵이야.”
“잘 들었어!”
“우리 착해!”
“그래, 그래, 장하다. 하지만 마음대로 먹으면 혼날 테니까 일단 들어가자.”
“응!”
아이들은 혹여 늦게 움직이면 빵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쏜살같이 움직였다.
두 건물 중 낡고 헤진 쪽으로 그레이스가 발을 들이자, 그 짧은 새에 소식이 전해졌는지 건물 안 여기저기에 퍼져 있던 아이들이 단숨에 모여들었다.
대략 십여 명 정도 되는 아이들은 그 연령대에 따라 그레이스를 향한 반응이 달랐는데, 비교적 어린 나이일수록 그레이스를 보며 순수하게 즐거워하고 있었고, 반대로 나이가 많은 이들은 무척이나 복잡한 기색이었다.
개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소녀를 향해, 그레이스는 익살스레 말했다.
“지젤, 언니 팔 빠질 것 같은데 안 도와주고 보고만 있을 거야?”
“…이리로 주세요.”
그레이스에게서 빵 바구니를 받아 든 지젤은, 이내 아이들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선반 위에 그것을 올려두었다.
“일 나간 사람들 다 돌아오면 그때 다 같이 먹을 거니까 기다려.”
일방적인 선언에 아이들 몇몇이 볼멘소리를 냈지만, 지젤이 눈초리를 험하게 하자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나이 차 나는 어른보다 몇 살 차이 안 나는 형이나 언니가 더 무서운 시기였다.
지젤은 그대로 또래 아이들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냈고, 그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사라지자, 자리에는 지젤과 그레이스만이 남겨졌다.
그 일사불란한 통제력을 보고, 그레이스가 휘파람을 불며 감탄했다.
“지젤, 내가 니 언니라서 정말 다행이야. 동생이었으면 숨도 못 쉬고 살았을 거 같네.”
“저도 다행이네요. 언니가 동생이었으면 사고 치는 거 뒷바라지하느라고 머리가 아팠을 거 같으니까요.”
“말이 너무 심하네! 흑흑.”
상처받았어, 라며 우는 시늉을 하는 그레이스를, 지젤은 씁쓸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뭐 하러 저런 걸 사 오신 거예요. 그럴 돈이 있으면 본인한테나 쓰시지.”
“저런 거 없어도 충분히 잘 먹고 다니니까 걱정 마. 자 봐, 몸매랑 피붓결 좋아진 거 안 보여? 가끔 나도 거울 보고 놀란다니까? 아니, 이 미소녀는 누구지?! 하고.”
“저희도 이제 잘 먹어요. 옷도 좋은 거 입고. 집은 아직 낡았지만, 그것도 공사 끝나고 나면 옮길 테고.”
“미소녀 발언은 깔끔하게 무시하는 거야? 지적해 주지 않으면 무안하잖니.”
“…….”
그레이스는 계속해서 분위기를 띄우려는 듯 농담을 반복했지만, 지젤의 얼굴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그런 동생을 향해, 그레이스는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얘는 귀가 얇아서 문제라니까. 도시에 도는 소문은 다 헛소문이야. 산제물이 어쩌고 하는 얘기가 사실이었으면, 지금 내가 여기 이렇게 혼자 털레털레 올 수 있었겠어? 감시가 다닥다닥 붙었겠지.”
“반년 전에 왔을 때는 그랬던 것 같은데.”
“옛날 일은 옛날 일일 뿐이란다.”
“…정말요?”
“그래, 다 질투하는 거라니까? 자기들은 이 자리에 못 앉으니까 괜히 나쁜 소문 퍼트리고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 휘둘리지 마. 다른 애들한테도 그렇게 전해주고.”
그레이스의 거듭된 설득에, 처음에는 미심쩍어하는 기색이었던 지젤 역시 서서히 ‘그런가?’하는 생각이 그 얼굴에 드러났다.
이거라면 어떻게든 속여 넘길 수 있을 것 같다며, 그레이스는 내심으로 안도했다.
그러니까, 대략 3초 정도는 그럴 수 있었다.
벌컥!
요란하게 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성큼성큼 두 명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하여 모습을 드러낸 것은, 희끗희끗 바랜 머리색이 인상적인 초로의 여인.
이 고아원의 원장이자, 그레이스에게는 어머니나 마찬가지인 그녀는 그레이스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내 그레이스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성큼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흐느낌.
단순히 오랜만에 돌아온 딸을 대하는 거라기엔 너무나 서글프고, 죄책감으로 가득 찬 그 울음에 조금은 설득되는 듯했던 지젤의 얼굴이 다시금 ‘그러면 그렇지’라는 식으로 썩어들어갔다.
심지어 원장이 돌입하며 문이란 문은 죄다 활짝 오픈하고 돌진해 왔던 탓에, 그 너머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던 아이들마저 하나둘씩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흑, 흐으윽.”
“으아아아앙.”
슬픔이란 지독한 전염병과 닮아 있었다.
사정을 아는 아이들은 묵묵히 눈시울을 붉혔고, 모르는 아이들은 그냥 주변에서 우니까 거기에 휩쓸려 울었다.
이윽고 울음바다가 되어버린 고아원에서, 그레이스는 홀로 탄식했다.
인생이란 참으로 쉽지 않은 것이었다.
***
“하아아아아.”
서서히 해가 저물기 시작할 무렵.
길거리를 거닐던 그레이스는 무심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지간해서는 활기차고 명랑한 태도를 잃어버리지 않는 그녀였지만, 모처럼의 귀갓길이 즐거운 추억 쌓기는커녕 집단 통곡의 장으로 변해버린 참사 앞에서는 차마 푸념을 금하기 어려웠다.
오죽했으면 고아원에 계속 머물기가 부담스러워 도망치듯이 빠져나왔겠는가.
“…어디로 가지.”
그레이스는 고민에 빠졌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고아원에서 한계까지 늦장을 부리려던 본래 계획은 폐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도시 어딘가에서 적당히 시간을 보내기에는 허가 없이 갈아입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이 의상이 문제고, 그렇다고 아직 시간이 충분히 남았는데 어영부영 카닐리안 저택으로 돌아가는 건 그것대로 싫다.
결국 이도 저도 못한 채, 그저 사람 눈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걷고 또 걷기를 얼마쯤이었을까.
문득, 그레이스의 시야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오크통?
흔히 참나무(Oak)를 재료로 사용하여 만드는, 커다란 나무 술통.
사실 오크통 그 자체는 그렇게까지 드문 물건도, 이상한 물건도 아니었다.
굳이 주조장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럭저럭 생활 여건이 나쁘지 않은 가정이라면 창고에 하나둘쯤 가지고 있는 녀석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오크통이 실내가 아닌 실외에서 그것도 혼자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어딜 어떻게 봐도 너무나 수상하지 않은가.
대체 저게 뭔가 싶어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덜컥, 하고 오크통이 그 움직임을 멈추었다.
‘언덕에 걸렸구나.
이 도시의 골목길은 그렇게 평탄하지도, 깔끔하지도 않다.
곳곳에 경사나 계단 비슷한 단차가 있었고, 각종 쓰레기 따위가 바닥에 널려 있는 일도 흔했다.
애초에 오크통이 혼자서 어디로든 굴러갈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는 뜻.
혹시 저 오크통 안에 무슨 짐승 같은 게 들어가 있어서 통을 굴린 거라면, 이제 슬슬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품고 그레이스가 오크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정말로 그 안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다만 그것은 고양이나 개 같은 짐승이 아니라, 웬 사람의 팔과 나무 지팡이였다.
“…어?”
그레이스의 당혹을 아는지 모르는 지, 정체불명의 괴인은 여기저기 벽이나 지면을 툭툭 두드리며 주변 환경을 확인하는 듯하더니, 이내 지팡이를 땅에 힘껏 꽂아 오크통 그 자체를 들어 올렸다.
가느다란 지팡이 하나를 다리 삼아, 커다란 오크통이 공중으로 솟구친 기이하기 짝이 없는 광경.
그레이스가 입을 벌린 채 굳어 있는 사이에 오크통은 앞을 가로막던 언덕을 재주 좋게 뛰어넘었고, 이내 다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자, 잠깐!”
잠시 얼어붙어 있던 그레이스는, 수수께끼의 오크통이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걸 보고는 다급히 그 뒤를 쫓았다.
저 기괴한 존재의 정체를 확인하지 않으면, 오늘 밤은 궁금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잘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