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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하인 세드릭(Cedric) (6) - 노력의 방향
세드릭은 클라우디아를 바라보았다.
한없이 표독하면서도 희미한 비웃음이 어린 얼굴은, 마치 네가 해결할 수 있으면 해결해 보라는 듯이 도발적이다.
허나 또 한편으로는, 제발 어떻게든 도와달라는 듯이 애절하기도 하다.
상반된 모습이었지만, 사실 그리 이상한 건 아니었다. 원래 감정이란 복합적인 거니까.
‘흐음.’
그리고 그건 세드릭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품은 감정 역시 꽤 복합적이었기 때문이다.
귀족의 감성으로 판단했을 때, 클라우디아의 말은 어리광에 가깝다.
애초에 그녀가 귀족 영애로서 많은 것들을 누려올 수 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녀의 성이 레드벨이기 때문이다.
사치스러운 먹거리도, 평민은 평생 손도 대보지 못할 고급스러운 의복도, 아늑하고 편안한 잠자리까지도, 모두 가문에서 그녀에게 선물한 것들.
그런 혜택은 전부 누려왔으면서, 레드벨 가문의 영애로서 마땅히 져야 할 ‘의무’는 마다하겠다니. 이런 철없는 소리가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받아들이자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부모가 아이에게 막대한 돈을 들여 사교육을 시켜 놓고, ‘넌 내 돈 때문에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내가 원하는 직업을 가져야 해’라고 주장하는 건 정당한 일인가?
아이의 의사 같은 건 물어본 적도 없이 자기 뜻대로 여러 가지를 쥐여준 다음, 그게 빚이라도 되는 것처럼 값을 치르라고 하는 건 올바른 태도인가?
세드릭의 근원은 황태자.
즉 어마어마하게 ‘높으신 분’이지만, 그에게 황태자로서의 기억은 꿈속의 일처럼 아련할 뿐이다.
고로, 세드릭은 이렇게 대답했다.
“흐음, 그것참. 후작님께서도 너무하시군요.”
“……!”
클라우디아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설마 레드벨의 영지에서, 레드벨 후작을 대놓고 비난하는 하인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도 몰래 좌우로 휙휙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피는 클라우디아의 모습에, 오히려 세드릭이 웃음을 보였다.
“뭘 그렇게 겁내 하십니까. 여태까지 불평이란 불평은 다 하셨으면서.”
“내, 내가 하는 거랑 니가 말하는 거랑 같아!?”
“어차피 제 주인은 아가씨지 후작님이 아닌데 무슨 상관입니까?”
“…….”
진심으로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이 말하는 세드릭의 모습에, 클라우디아는 무심코 숨을 삼켰다.
클라우디아가 본격적으로 패악질을 부리기 전, 그녀의 주변에는 많은 하인들이 있었다.
고민하는 클라우디아를 향해 도울 수 있는 건 뭐든지 돕겠다, 부디 고민을 털어놓아 보라며 걱정하던 그들은, 막상 클라우디아가 본심을 털어놓으면 하나같이 난감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후작님의 말뜻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 겁니다, 아가씨.
-혼인이라는 건 꼭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부디 긍정적으로 생각하시지요.
-아가씨. 철없는 소리를 하셔선 안 됩니다. 딸로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어떻게든 클라우디아를 달래려 하거나, 허울뿐인 위로의 말을 건네거나, 심지어는 갑작스레 정색하며 태도를 바꾸기까지.
그제야 클라우디아는 깨달았다.
평소 그토록 그녀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던 하인들은, 사실은 그녀가 아닌 그녀의 아버지의 사람일 뿐이었다는 걸.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레드벨이라는 거대한 세력의 주인인 후작과 그의 후광 아래에서 살아갈 뿐인 계집아이. 어느 쪽을 우선해야 할지는 너무나 자명한 일이니까.
허나, 지금 눈앞의 하인은 이렇게 말했다.
자기에게는 그런 후작보다, 클라우디아 쪽이 더 중요하다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는 클라우디아.
그런 그녀를 내버려둔 채, 세드릭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가씨가 왜 이렇게 비뚤어지신 건지는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썩 좋은 선택이라고는 못 하겠군요.”
“…뭐야, 너도 나보고 그냥 아버지 말을 얌전히 따르라 이거야?”
“목적의 문제가 아니라, 수단의 문제입니다. 툭 터놓고 말해서, 지금 아가씨가 하고 계신 건 후작님의 계획에 아무런 영향도 못 끼칩니다.”
“뭐?”
클라우디아는 눈을 껌뻑였다.
그녀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만약 후작님께서 새로 부인을 맞이하시려고 한다고 가정하죠. 후작님께서 평민들을 취미 삼아 두들겨 패는 취미가 있다고 알려진다면, 과연 후작님과 결혼하려고 달려드는 가문이 없겠습니까?”
“그건.”
클라우디아는 말을 머뭇거렸다.
대답을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 대답이 어떤 의미인지를 희미하게나마 깨달았기에.
“아마 후작님께 그런 악평이 있든 없든, 그분과 선을 이으려는 가문은 차고 넘칠 겁니다. 평민 좀 두들겨 팬다? 하인들을 함부로 대한다? 그게 뭐 어떻습니까. 상대는 왕국의 2인자로 거론되는 핵심 중의 핵심 가문인데.”
세드릭의 얼굴과 말투는 평소보다 차분해져 있었고, 그 입가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물론 후작님과 혼인해야 할 당사자는 싫어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런 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상대측 가문의 수장이 ‘이 혼인은 가문에 이익이 된다’라고 판단하면 억지로라도 혼인은 성사할 텐데요. 이건 아가씨도 똑같습니다.”
레드벨 가문과 이어지길 원하는 가문은, 클라우디아의 사소한 흠결 따윈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그들에게 중요한 건 클라우디아가 아니라, 레드벨과 이어졌다는 사실 그 자체니까.
“아가씨의 목적이 후작님에게 ‘쯧, 더 비싸게 팔 수 있었는데 아깝군’하고 혀를 차게 만드는 거라면 지금 하시는 걸로도 충분합니다. 허나, 혼인 그 자체를 피하려 하시는 거라면 지금 하시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다고 후작님이 아가씨를 안 써먹을 리도 없으니까요.”
클라우디아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세드릭에게는 그럭저럭 포장해서 말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클라우디아의 행패는 거기까지 철저한 계산에 따른 행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레드벨 후작에게 ‘내가 이렇게 화가 나 있다’ ‘나는 이렇게 불만을 느끼고 있다’라고 시위하기 위한 행동에 가까웠다.
사실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일을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희미하게 눈치채면서도 외면하고 있던 사실을 정면으로 들이밀어지자, 클라우디아는 발작하듯이 짜증을 냈다.
“그러면,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잘해도, 못해도 의미가 없다면, 대체 어떻게 하라고!!”
세드릭이 대답했다.
“그야 간단하지요. 그냥 잘하거나 못하는 게 의미가 없다면, ‘아주 잘하거나’ ‘아주 못하면’ 됩니다.”
언뜻 말장난 같은 소리.
그러나 이미 앞서 들은 게 있어서인지, 클라우디아는 물기가 어린 눈으로 세드릭을 응시했다.
“계속해 봐.”
“아주 못하는 건 쉽지요. 레드벨이라는 가문의 이름으로도 감당이 안 될만한 사고를 치시면 됩니다.”
“그게 뭔데?”
“으음, 얼굴을 강판으로 갈아버리면 아무리 그래도 혼삿길이 막히지 않겠습니까?”
“히끅.”
클라우디아는 반사적으로 딸꾹질을 하며 세드릭과 거리를 벌렸다.
차라리 일부러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겁을 주듯 말했으면 모를까, 무슨 저녁 메뉴 말하듯이 저런 내용을 이야기하니 두 배는 더 소름이 돋았다.
“다, 다른 거! 다른 사고는!”
“머리카락을 밀어버린 뒤에 약물 같은 걸 사용해서 다시 자라지 못하게 하는 방법도 있겠군요! 어떻게든 아프지 않은 약을 찾아보겠습니다.”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다,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하는 계열로는 없어?”
“음. 그렇지만 왕국의 귀족들, 툭 터놓고 말해서 인성이 쓰레기 아닙니까? 아가씨가 거리 한복판에 뛰쳐나가 평민들 목으로 참수 대회를 연다고 해도 여기 귀족들이면 ‘어우, 좀 야만적이네요.’하고 말 것 같습니다!”
클라우디아는 침묵했다.
그녀가 생각해도 그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세드릭이 말을 이었다.
“뭐, 이렇듯 ‘아주 못하는’ 건 쉽지만 대신 부작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아가씨의 몸에 영구적인 상처가 남거나, 혹은 평판이 ‘망나니’나 ‘독한 년’에서 ‘상종 못 할 쓰레기’까지 수직으로 하락해 버리겠지요.”
“너 지금 은근히 지금의 내가 ‘망나니’나 ‘독한 년’이라고 말하지 않았어?”
“말했습니다만, 그게 문제라도?”
“…….”
클라우디아는 입을 벙긋벙긋하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네가 나 개처럼 무시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뭘 새삼스레.”
세드릭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아주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아가씨, 저는 아가씨를 개처럼 무시한 적이 없습니다.”
“하, 말만 그렇게 하면 뭐해? 평소 언행에서 드러나는데.”
“개와 비교하면 개한테 실례니까요.”
“야 이 새끼야!!”
기어코 귀족 영애의 입에서 술집 모험가 같은 쌍소리가 나오게 한 세드릭은, 클라우디아가 던진 찻잔과 케이크 접시를 여유롭게 받아낸 뒤 말을 이었다.
“아가씨의 처지가 다소 동정할 여지가 있다는 건 사실입니다. 후작님이 너무하신 것도 사실이고요. 허나, 그저 그것만으로 넘어가기에는 아가씨는 주변에 지나칠 정도로 폐를 끼치셨습니다. 그건 인정하셔야 합니다.”
클라우디아는 눈을 찌푸렸지만, 세드릭의 말을 끊어내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아주 잘하는’ 방법은 매우 어려운 길이 될 겁니다. 아가씨가 그동안 자발적으로 깎아 먹은 실적과 평판을, 마이너스부터 다시 쌓아 올려야 할 테니까요.”
“그렇게 하면, 내 상황이 달라져? 어쨌든 팔려나가는 건 똑같은 거 아니야?”
“그건 적당히 잘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아가씨의 실적과 평판이 일정 수준 이상을 돌파하면, 후작님께서는 고민에 빠지실 테니까요.”
“무슨 고민?”
“정말로 팔아넘기는 게 이득일지, 아니면 그냥 가지고 있는 게 이득일지를 고민하신단 뜻입니다.”
레드벨 후작은 매정한 인간이다.
그에게 딸의 인간적인 행복 같은 건 중요하지 않고, 그저 자기에게 유용한지 유용하지 않은지만을 따질 뿐.
허나 그런 레드벨 후작이기에, 오히려 감정이 아닌 결과로 설득하기가 쉽다.
“하인들의 지지를 얻으십시오. 영민들의 지지를 얻으십시오. 모두가 아가씨의 능력을 인정하게 만드십시오. 후작님이 다른 가문에 아가씨를 넘기는 걸 아깝다고 느낄 정도로요.”
“그게, 말이 돼?”
“가능합니다.”
세드릭의 태도는 단호했다.
클라우디아 본인조차 믿지 못하는 그녀의 가능성을, 그는 너무나도 진지하게 확신하고 있었다.
“빼어난 외모, 풍족한 자산, 특수한 종복, 잠재력이 높은 영지. 아가씨께서는 이미 필요한 준비물을 전부 갖추고 계십니다. 부족한 건 두 가지뿐이죠.”
“부족한 게, 뭔데?”
“해내겠다는 의지. 그리고 저에 대한 믿음입니다.”
대답을 기다리듯이, 세드릭이 그녀를 응시했다.
클라우디아는 망설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허무맹랑하게만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어차피 제 주인은 아가씨지 후작님이 아닌데 무슨 상관입니까?」
그 아무렇지도 않은, 딱히 거창하게 주장할 것도 없다는 듯한 그 무심한 태도가, 너무나 가슴에 와닿았으니까.
“─좋아. 해볼게. 하면 되잖아.”
그녀의 대답에, 세드릭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좋습니다. 아가씨. 이 세드릭, 아가씨가 훌륭한 군주의 재목이 되도록 남은 기간 동안 성심성의껏 봉사하도록 하지요.”
클라우디아는 무심코 침을 삼켰다.
평소에는 그저 종잡을 수 없는 괴인처럼 느껴지던 그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쩐지 이야기 속에 나오는 기사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특유의 방방 뛰는 듯한 말투와 주인을 마구 무시하는 태도가 문제였지, 그의 동작 그 자체는 언제나 우아함 그 자체였다.
지금까지는 클라우디아 본인이 주인으로서 부족한 모습을 보였기에 그 역시 거친 태도를 유지했겠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클라우디아가 제대로 된 모습을 보인다면, 그 역시 그에 맞는 대우를 해줄 터.
클라우디아의 눈이 몽롱하게 풀렸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우아하게 홍차를 즐기는 자신과 그 곁을 지키는 세드릭의 모습을 떠올린 것이다.
나쁘지 않다.
실로 나쁘지 않다고, 그녀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면, 처음에는 뭘 하면 돼?”
클라우디아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세드릭이 대답했다.
“일단 저택에 있는 하인들 전부에게 고개 숙여 사죄부터 하도록 하지요. 미리 말해두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라든가 ‘미안하다고 했으니 됐지?’ 같은 태도는 금물입니다.”
“…….”
“아가씨?”
“아,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