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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사서 에른스트(Ernst) (17) - 전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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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 양, 요즘 뭐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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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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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습소의 여학생이 걸어온 말에, 에리스는 눈을 껌뻑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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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보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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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예전에는 겨울처럼 날이 선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꼭 봄바람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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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얼굴이 겨울 같았다니 어쩌니 하는 말을 보통 정면에서 대놓고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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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그걸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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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그녀였다면 이게 혹시 돌려 까는 건 아닐까 싶어 이래저래 의심했겠지만, 지금의 그녀는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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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에게는 아무런 악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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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머리가 꽃밭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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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건 그것대로 이 나라가 평화롭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에리스는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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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특별히 좋은 일 하나가 있었다기보다는, 그냥 이것저것 여러 가지가 순조롭게 풀려서 그런 걸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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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거의 무언가에 쫓기다시피 하며 나날을 보내던 에리스였지만, 최근에는 그런 것도 많이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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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한 학습과 자기 단련은 여전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취미 생활을 즐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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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의욕이나 정신력이란 소모품에 가깝습니다. 꾸준히 한 목표에만 몰두하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건 수면 부족으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억지로 일을 계속하는 거나 마찬가지죠. 효율이 나쁩니다. 거기에 휴식 중에 새로운 영감을 떠올릴 수도 있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건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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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과할 정도로 열변을 토하는 모 사서의 말을 받아들인 결과였지만, 우습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어처구니가 없다고 해야 할지, 실제로 에리스의 실력은 전보다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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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도 델피나리스의 제자 중에서 상위권에 손꼽혔지만, 지금은 정말 스승이 아니면 누구든 이길 수 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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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여학생은 에리스의 말을 조금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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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하기야 이제 좀 있으면 목표로 하시던 천공 학원에 가시는 거니까요. 굉장히 무시무시하면서도 낭만이 넘치는 곳이라는데, 저도 한 번쯤 구경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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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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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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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사실을 재차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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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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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리스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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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그렇죠. 얼마 안 있으면 떠나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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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는 알드리지 강습소의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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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는 본래 예정대로 천공 학원에 들어가게 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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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습소에서의 하루하루를 시간 낭비쯤으로 여기고 있던 과거의 에리스에게는 실로 바라고 바라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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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의 에리스는 졸업을 그리 기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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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 학원은 여러모로 특별하고도 기이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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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학생이 되고 나면 학원 바깥으로 빠져나올 기회는 극히 한정되고, 대부분의 시간을 학원 내에서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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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당연하게도, 지금처럼 도서관을 오가는 생활 같은 건 할 수 없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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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는 테이블 위의 차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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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안에 감도는 차의 맛이, 어쩐지 평소 이상으로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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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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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드리지 변두리에 있는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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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는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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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손님이 찾아온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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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충 3~40대 정도로 보이는 외모의 여인을 향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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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십시오, 손님. 찾으시는 책이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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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사무적인, 붙임성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표정과 높낮이가 부족한 평탄한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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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접객업에는 어울리지 않는 금발 사서의 모습에, 중년의 여인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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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자아이가 좋아할 것 같은 책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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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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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몸을 일으켜 책장에서 몇 권의 책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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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살피는 것처럼 그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여인은, 이내 묘한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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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글자를 해석하려고 하다가, 이내 그 작업에 실패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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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거나 말거나, 에른스트는 차분한 움직임으로 카운터 위에 책 몇 권을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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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 정도는 연애와 관계된 것이었고, 나머지 반은 다양한 장르의 책이 뒤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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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그 책의 제목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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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세상은 넓은 것 같군요. 나이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데, 경지를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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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구실일 뿐, 사실은 너를 살펴보고 있었다고 실토하는 거나 다름없는 발언이었지만, 에른스트는 동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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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그의 태도에, 여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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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대마법사 델피나리스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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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답니다. 그런데 개중 한 명이 최근 갑작스레 모습을 감추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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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크 그림룬의 갑작스러운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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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버지인 백작조차 마리크를 제대로 찾으려 하지 않았지만, 델피나리스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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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마리크의 인품과 인성이 기대 이하라고 해도, 그 능력이 에리스보다 못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해도, 일단 제자로 받아들인 이상, 품에서 떠나보낼 때까지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델피나리스의 성품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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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를 찾기 위해 이런저런 수단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도중 묘한 기운을 찾아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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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이외의 존재가 악마를 감지하는 것은, 일종의 숨은그림찾기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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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걸 인식한 상태로 보는 게 아니라면, 그저 평범한 그림으로 인식하고 스쳐 지나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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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이것은 숨은그림찾기라고 알려주거나, 우연히 그림의 위화감을 찾아내거나, 아니면 무언가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주의 깊게 살펴보던 사람이 그림을 보고 이것이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고 깨닫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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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나리스는 마지막에 속하는 경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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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크가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인 그의 방에서 여러 종류의 탐색 주문을 시험하던 델피나리스는 평소라면 인지하지 못했을 악마의 기운을 찾아냈고, 그 흔적이 알드리지로 향했다는 걸 알아내고 기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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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에게 무언가 큰 일이 생길지도, 아니 어쩌면 이미 생긴 뒤일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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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기운이 바로 이곳으로 이어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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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제자가 자주 드나드는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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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흔적이 남은 건물. 그 안에 있는 심상찮은 실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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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수상쩍은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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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나리스는 기품 있는 얼굴 속, 매서운 눈빛을 숨긴 채 에른스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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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정체는 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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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질문에, 에른스트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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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서관의 사서입니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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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의 떨림도, 거리낌도 없는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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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를 앞두고도 초연하기 짝이 없는 태도를 유지하면서, 정작 본인은 그저 사서일 뿐이라고 대답하는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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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당장 수상하다며 주문을 퍼부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델피나리스는 추가로 질문을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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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에리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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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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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답 역시 재빠르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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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고민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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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답에 어딘지 모르게 낙담한 듯한 대마법사가 새롭게 입을 여는 것보다 먼저, 에른스트는 무덤덤하게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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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함께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누는 독서 친구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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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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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꽤 알찬 반응을 보여주셔서 보고 있으면 제법 즐거운 친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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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는지, 델피나리스는 조금 멍한 눈으로 에른스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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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내, 나지막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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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그런가요. 그렇지요, 마법만이 전부가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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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나리스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기세가 다시금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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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품에서 금화 몇 개를 꺼내 접수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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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이용료치고는 조금 과한 금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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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하는 것 같은 행동을 해서 미안합니다. 늙은이가 또 주책을 부릴 뻔했군요. 적당한 선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참 쉽지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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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잖은 말의 안쪽에는, 어딘지 모를 씁쓸함이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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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는 달리 빈번히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거나, 한발 늦어버리곤 하는 본인을 향한 자조와 낙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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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에른스트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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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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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아해하는 대마법사를 향해, 사서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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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의 제자들은 필시 그 마음 씀씀이를 이해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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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이상하게 당신에게 들으면 뭔가 보답받은 기분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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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신기한 일이라고 말하며, 대마법사는 도서관을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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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얼마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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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델피나리스와 교체라도 하듯이, 에리스가 도서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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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권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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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스승이 이곳에 들다는 걸 알지 못하는 그녀는 평소처럼 읽은 책을 반납한 뒤 다음 책을 요구했고, 에른스트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책을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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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럭, 펄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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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정적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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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열 타이밍을 기다리듯, 에리스가 슬쩍슬쩍 눈치를 보고 있을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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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에른스트가 카운터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에리스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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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는 저도 몰래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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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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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왜,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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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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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가 내민 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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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하며 책을 받아든 에리스는, 이내 눈을 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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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평범한 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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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마도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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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하나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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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었다니. 마도서가 무슨 일기장도 아니고… 아니, 됐어요. 당신 정도의 마법사라면 뭔들 못 하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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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는 의문 어린 표정으로 에른스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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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을 재촉하는 듯한 그 모습에, 에른스트가 무뚝뚝하게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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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효과는 하나입니다. 다양한 종류의 책을 등록하고, 그 책의 내용을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게 하는 것. 말하자면 그 책 자체가 휴대용 도서관이라 할 수 있겠군요. 일단 이곳에 있던 책은 전부 등록해 놨으니, 설령 원본이 사라진다고 해도 당신의 책에 있는 정보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사용법을 설명해 드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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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됐어요. 그 정도는 대충 알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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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는 책의 표지에 손을 올린 뒤, ‘문학’이라는 카테고리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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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꺼풀 아래로 보이는 수백을 넘는 책 중 하나를 강하게 의식하자, 책의 표지는 물론이고, 그 형태나 페이지 수까지도 함께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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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기막힌 것은, 이게 단순한 책뿐만 아니라 마도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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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계열의 마도서가 아무렇지도 않게 손에 들린 걸 보고, 에리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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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설마 등록만 하면 원본이 지닌 마력까지 그대로 복사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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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등록과 재현은 손님과 그 마도서, 『돌으셨나요의 서』에 담긴 마력으로 이루어지니, 양측 합계보다 수준이 낮은 마도서라면 그렇습니다. 그보다 수준이 높은 마도서를 등록하기 위해서는 손님의 기량이 더 높아져야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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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그 망할 이름부터 바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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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엔 이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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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꾸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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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알겠습니다. 뭐 그 부분은 책 주인에게 맡기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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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는 한숨을 푹 내쉰 뒤, 에른스트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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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건 뭐죠? 책의 정체를 묻는 게 아니라, 저에게 이걸 주는 의도를 묻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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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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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별 선물입니다. 이곳을 떠날 손님에게, 이곳을 떠날 제가 건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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