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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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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사서 에른스트(Ernst) (17) - 전별의 책

“에리스 양, 요즘 뭐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어느 날.

강습소의 여학생이 걸어온 말에, 에리스는 눈을 껌뻑였다.

“그래 보이나요?”

“네. 예전에는 겨울처럼 날이 선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꼭 봄바람 같아요!”

…사람 얼굴이 겨울 같았다니 어쩌니 하는 말을 보통 정면에서 대놓고 하나?

에리스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그걸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과거의 그녀였다면 이게 혹시 돌려 까는 건 아닐까 싶어 이래저래 의심했겠지만, 지금의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상대에게는 아무런 악의도 없다.

그냥 머리가 꽃밭일 뿐.

…뭐, 그건 그것대로 이 나라가 평화롭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에리스는 대답했다.

“글쎄요, 특별히 좋은 일 하나가 있었다기보다는, 그냥 이것저것 여러 가지가 순조롭게 풀려서 그런 걸지도요.”

예전에는 거의 무언가에 쫓기다시피 하며 나날을 보내던 에리스였지만, 최근에는 그런 것도 많이 줄어들었다.

꾸준한 학습과 자기 단련은 여전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취미 생활을 즐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의욕이나 정신력이란 소모품에 가깝습니다. 꾸준히 한 목표에만 몰두하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건 수면 부족으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억지로 일을 계속하는 거나 마찬가지죠. 효율이 나쁩니다. 거기에 휴식 중에 새로운 영감을 떠올릴 수도 있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건 일이 아닙니다.」

왠지 과할 정도로 열변을 토하는 모 사서의 말을 받아들인 결과였지만, 우습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어처구니가 없다고 해야 할지, 실제로 에리스의 실력은 전보다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예전에도 델피나리스의 제자 중에서 상위권에 손꼽혔지만, 지금은 정말 스승이 아니면 누구든 이길 수 있을 정도.

다만, 여학생은 에리스의 말을 조금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아하. 하기야 이제 좀 있으면 목표로 하시던 천공 학원에 가시는 거니까요. 굉장히 무시무시하면서도 낭만이 넘치는 곳이라는데, 저도 한 번쯤 구경하고 싶어요!”

“음.”

에리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애써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사실을 재차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

“…? 에리스 양?”

“아, 네. 그렇죠. 얼마 안 있으면 떠나야 하니까요.”

에리스는 알드리지 강습소의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그 뒤에는 본래 예정대로 천공 학원에 들어가게 될 터.

강습소에서의 하루하루를 시간 낭비쯤으로 여기고 있던 과거의 에리스에게는 실로 바라고 바라던 순간이다.

하지만 지금의 에리스는 졸업을 그리 기뻐할 수 없었다.

천공 학원은 여러모로 특별하고도 기이한 곳이다.

일단 학생이 되고 나면 학원 바깥으로 빠져나올 기회는 극히 한정되고, 대부분의 시간을 학원 내에서 보내게 된다.

지극히 당연하게도, 지금처럼 도서관을 오가는 생활 같은 건 할 수 없게 되겠지.

에리스는 테이블 위의 차를 마셨다.

입안에 감도는 차의 맛이, 어쩐지 평소 이상으로 씁쓸했다.


알드리지 변두리에 있는 도서관.

에른스트는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새로운 손님이 찾아온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대충 3~40대 정도로 보이는 외모의 여인을 향해 물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찾으시는 책이 있으십니까?”

지극히 사무적인, 붙임성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표정과 높낮이가 부족한 평탄한 음성.

아무리 봐도 접객업에는 어울리지 않는 금발 사서의 모습에, 중년의 여인이 대답했다.

“젊은 여자아이가 좋아할 것 같은 책이 있나요?”

“흠.”

에른스트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몸을 일으켜 책장에서 몇 권의 책을 골랐다.

무언가를 살피는 것처럼 그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여인은, 이내 묘한 얼굴을 했다.

모르는 글자를 해석하려고 하다가, 이내 그 작업에 실패한 것처럼.

그러거나 말거나, 에른스트는 차분한 움직임으로 카운터 위에 책 몇 권을 늘어놓았다.

절반 정도는 연애와 관계된 것이었고, 나머지 반은 다양한 장르의 책이 뒤섞여 있었다.

여인은 그 책의 제목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세상은 넓은 것 같군요. 나이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데, 경지를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으니.”

책은 구실일 뿐, 사실은 너를 살펴보고 있었다고 실토하는 거나 다름없는 발언이었지만, 에른스트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태도에, 여인은.

아니, 대마법사 델피나리스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저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답니다. 그런데 개중 한 명이 최근 갑작스레 모습을 감추었죠.”

마리크 그림룬의 갑작스러운 실종.

그의 아버지인 백작조차 마리크를 제대로 찾으려 하지 않았지만, 델피나리스는 달랐다.

설령 마리크의 인품과 인성이 기대 이하라고 해도, 그 능력이 에리스보다 못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해도, 일단 제자로 받아들인 이상, 품에서 떠나보낼 때까지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델피나리스의 성품이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를 찾기 위해 이런저런 수단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도중 묘한 기운을 찾아냈습니다.”

악마 이외의 존재가 악마를 감지하는 것은, 일종의 숨은그림찾기나 다름없다.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걸 인식한 상태로 보는 게 아니라면, 그저 평범한 그림으로 인식하고 스쳐 지나갈 뿐.

누군가가 이것은 숨은그림찾기라고 알려주거나, 우연히 그림의 위화감을 찾아내거나, 아니면 무언가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주의 깊게 살펴보던 사람이 그림을 보고 이것이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고 깨닫거나.

델피나리스는 마지막에 속하는 경우였다.

마리크가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인 그의 방에서 여러 종류의 탐색 주문을 시험하던 델피나리스는 평소라면 인지하지 못했을 악마의 기운을 찾아냈고, 그 흔적이 알드리지로 향했다는 걸 알아내고 기겁했다.

에리스에게 무언가 큰 일이 생길지도, 아니 어쩌면 이미 생긴 뒤일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기운이 바로 이곳으로 이어지더군요.”

애제자가 자주 드나드는 도서관.

악마의 흔적이 남은 건물. 그 안에 있는 심상찮은 실력자.

너무나 수상쩍은 상황이다.

델피나리스는 기품 있는 얼굴 속, 매서운 눈빛을 숨긴 채 에른스트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정체는 뭐죠?”

대마법사의 질문에, 에른스트가 대답했다.

“이 도서관의 사서입니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조금의 떨림도, 거리낌도 없는 대답.

대마법사를 앞두고도 초연하기 짝이 없는 태도를 유지하면서, 정작 본인은 그저 사서일 뿐이라고 대답하는 모순.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당장 수상하다며 주문을 퍼부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델피나리스는 추가로 질문을 이어 나갔다.

“그러면, 에리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죠?”

“손님이십니다.”

이번 대답 역시 재빠르기 짝이 없었다.

딱히 고민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이.

그 대답에 어딘지 모르게 낙담한 듯한 대마법사가 새롭게 입을 여는 것보다 먼저, 에른스트는 무덤덤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함께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누는 독서 친구이기도 하지요.”

“…독서 친구.”

“예, 꽤 알찬 반응을 보여주셔서 보고 있으면 제법 즐거운 친구입니다.”

차마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는지, 델피나리스는 조금 멍한 눈으로 에른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나지막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그런가요. 그렇지요, 마법만이 전부가 아니겠지요.”

델피나리스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기세가 다시금 가라앉았다.

그녀는 품에서 금화 몇 개를 꺼내 접수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도서관 이용료치고는 조금 과한 금액이었다.

“시험하는 것 같은 행동을 해서 미안합니다. 늙은이가 또 주책을 부릴 뻔했군요. 적당한 선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참 쉽지가 않아요.”

점잖은 말의 안쪽에는, 어딘지 모를 씁쓸함이 담겨있었다.

생각과는 달리 빈번히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거나, 한발 늦어버리곤 하는 본인을 향한 자조와 낙담이었다.

그때 에른스트가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의아해하는 대마법사를 향해, 사서가 말했다.

“손님의 제자들은 필시 그 마음 씀씀이를 이해할 테니까요.”

“…허허. 이상하게 당신에게 들으면 뭔가 보답받은 기분이 드는군요.”

참 신기한 일이라고 말하며, 대마법사는 도서관을 떠나갔다.

그로부터 얼마 후.

마치 델피나리스와 교체라도 하듯이, 에리스가 도서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 권이요.”

자기 스승이 이곳에 들다는 걸 알지 못하는 그녀는 평소처럼 읽은 책을 반납한 뒤 다음 책을 요구했고, 에른스트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책을 내주었다.

펄럭, 펄럭.

조용히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정적 속.

입을 열 타이밍을 기다리듯, 에리스가 슬쩍슬쩍 눈치를 보고 있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에른스트가 카운터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에리스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에리스는 저도 몰래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

“손님.”

“네? 왜, 왜요?”

“받으시죠.”

에른스트가 내민 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당황하며 책을 받아든 에리스는, 이내 눈을 크게 했다.

이것이 평범한 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거, 마도서잖아요.”

“예. 하나 만들었습니다.”

“만들었다니. 마도서가 무슨 일기장도 아니고… 아니, 됐어요. 당신 정도의 마법사라면 뭔들 못 하겠나요.”

에리스는 의문 어린 표정으로 에른스트를 바라보았다.

설명을 재촉하는 듯한 그 모습에, 에른스트가 무뚝뚝하게 말을 이어갔다.

“책의 효과는 하나입니다. 다양한 종류의 책을 등록하고, 그 책의 내용을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게 하는 것. 말하자면 그 책 자체가 휴대용 도서관이라 할 수 있겠군요. 일단 이곳에 있던 책은 전부 등록해 놨으니, 설령 원본이 사라진다고 해도 당신의 책에 있는 정보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사용법을 설명해 드립니까?”

“아니, 됐어요. 그 정도는 대충 알 수 있으니까.”

에리스는 책의 표지에 손을 올린 뒤, ‘문학’이라는 카테고리를 떠올렸다.

눈꺼풀 아래로 보이는 수백을 넘는 책 중 하나를 강하게 의식하자, 책의 표지는 물론이고, 그 형태나 페이지 수까지도 함께 변했다.

더욱 기막힌 것은, 이게 단순한 책뿐만 아니라 마도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점이었다.

물 계열의 마도서가 아무렇지도 않게 손에 들린 걸 보고, 에리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이거, 설마 등록만 하면 원본이 지닌 마력까지 그대로 복사하는 건가요?”

“책의 등록과 재현은 손님과 그 마도서, 『돌으셨나요의 서』에 담긴 마력으로 이루어지니, 양측 합계보다 수준이 낮은 마도서라면 그렇습니다. 그보다 수준이 높은 마도서를 등록하기 위해서는 손님의 기량이 더 높아져야 하지요.”

“일단 그 망할 이름부터 바꿔요.”

“저번엔 이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바꾸라고요.”

“흠, 알겠습니다. 뭐 그 부분은 책 주인에게 맡기도록 하지요.”

에리스는 한숨을 푹 내쉰 뒤, 에른스트를 응시했다.

“그래서, 이건 뭐죠? 책의 정체를 묻는 게 아니라, 저에게 이걸 주는 의도를 묻는 거예요.”

에른스트가 대답했다.

“전별 선물입니다. 이곳을 떠날 손님에게, 이곳을 떠날 제가 건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