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dd 3 AI agents (writing, revision, story-continuity specialists) - Add 4 slash commands (rovel.create, write, complete, seed) - Add novel creation/writing rules - Add Novelpia reference data (115 works, 3328 chapters) - Add CLAUDE.md and README.md 🤖 Generated with [Claude Code](https://claude.com/claude-code) 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245 lines
12 KiB
Markdown
245 lines
12 KiB
Markdown
|
||
#94화 사서 에른스트(Ernst) (15) - 도서관의 금기를 어길 경우 생기는 일
|
||
|
||
사서에게 필요한 능력이란 무엇일까.
|
||
|
||
손님에게 원하는 책을 추천하고 안내하는 능력?
|
||
|
||
수많은 책을 보기 쉽게 정돈하고 진열하는 능력?
|
||
|
||
습기나 먼지 등으로 책이 상하지 않게 관리하는 능력?
|
||
|
||
어느 것도 정답이다.
|
||
|
||
허나 한 가지 더, 사서에게 매우 중요한 능력이 있다.
|
||
|
||
그것은─
|
||
|
||
“─도서관을 지키는 것이지요.”
|
||
|
||
저벅, 하고.
|
||
|
||
에른스트가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
||
|
||
그 머리는 평소 이상으로 헝클어져 있었고, 의복은 더럽혀져 있었으며, 신체 곳곳에선 타박상의 흔적이 엿보였다.
|
||
|
||
하지만 그 얼굴만큼은 평소와 똑같이 차분했다.
|
||
|
||
이글거리는 불꽃의 검 수십 개가 자기를 조준하고 있는데도, 두려움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태도.
|
||
|
||
덜컹! 덜컹덜컹!
|
||
|
||
도서관 한쪽 구석.
|
||
|
||
2층으로 이어지는 문이 크게 들썩였다.
|
||
|
||
무언가가 두들기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던 문은 이내 활짝 열렸고, 그 안쪽에서 책 한 권이 날아와 에른스트의 손 위에 안착했다.
|
||
|
||
“오, 친구. 공주님을 지키는 기사 흉내라도 내고 싶은가 보지?”
|
||
|
||
악마 발자레스가 에른스트를 조롱하듯이 혀를 날름거렸다.
|
||
|
||
그의 눈에 비웃음이 담겼다.
|
||
|
||
‘별거 없군.’
|
||
|
||
에른스트가 손에 든 책에서 마력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
||
|
||
어지간한 마법사가 상대라면 그럭저럭 싸워볼 만할지도 모르지.
|
||
|
||
허나, 인간으로 따지면 6위계 초입에 달하는 힘을 지닌 발자레스에겐 그저 가소로울 수준이었다.
|
||
|
||
뭣보다, 강력한 마도서가 있다고 한들 정작 그걸 다룰 에른스트에게서는 그 어떤 마력도 느껴지지 않지 않는가.
|
||
|
||
“그렇다면 내가 도와주지, 우선 기사치고는 옷차림이 너무 허술해! 붉게 타오르는 망토라도 장식해 보는 건 어떨까?”
|
||
|
||
-화르르륵!
|
||
|
||
불의 검 중 하나가 에른스트의 어깨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
||
|
||
“안 돼!”
|
||
|
||
에리스의 비명이 울려 퍼지고, 검이 에른스트의 몸에 닿으려 한 그 순간.
|
||
|
||
에른스트의 손에 있는 책이 빛을 뿜었다.
|
||
|
||
『성냥의 마지막 숨결이 스러지자, 모든 것은 사라졌다.
|
||
|
||
벽은 다시 차가운 벽으로 돌아왔고, 거리의 바람은 더욱 매섭게 그녀의 뺨을 때렸다.』
|
||
|
||
불이 꺼졌다.
|
||
|
||
에른스트를 위협하던 불꽃의 검은 물론이고, 발자레스가 생성해 두었던 수십 개의 검 역시 모조리 다.
|
||
|
||
조롱하는 듯하던 악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뒤에 있던 에리스 역시 숨을 삼켰다.
|
||
|
||
‘…마법? 마도서의 힘?’
|
||
|
||
불을 제어하는 주문, 마력을 제어하는 주문, 공기를 다루는 주문.
|
||
|
||
몇 가지 후보가 에리스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
||
|
||
발자레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품었는지, 그 입매를 비뚤어지게 했다.
|
||
|
||
“불꽃은 싫은가 보지? 멋진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아픈 걸 참을 필요가 있는데 인내심이 부족하군!”
|
||
|
||
발자레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의 주변으로 수많은 돌 조각이 떠올라 회전하기 시작했다.
|
||
|
||
닿는 것들을 모조리 분쇄해 가루로 만들어버릴 암석의 폭풍이 에른스트를 위협하듯이 으르렁거렸다.
|
||
|
||
『그날 아침, 햇살이 가득히 내리쬐고, 하늘은 깨끗한 푸른색이었다. 바람은 상쾌하고, 모든 것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
||
|
||
허나 에른스트의 손 위에 또 다른 책이 펼쳐진 그 순간, 흉포한 폭풍은 기분 좋은 산들바람으로 변했다.
|
||
|
||
코끝을 맴돌던 흙냄새가 향긋한 풀 내음으로 변하는 걸 느끼며, 에리스는 전율했다.
|
||
|
||
에른스트가 책을 펼친 그 순간 귓가에 울린, 마치 이 도서관 그 자체가 속삭이는 듯한 그 문구.
|
||
|
||
그 문구의 내용이, 이곳에서 읽어본 적 있는 어떤 책의 내용을 떠오르게 했기 때문이다.
|
||
|
||
심지어, 그걸로도 끝이 아니었다.
|
||
|
||
『그림자는 벽을 타고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그 움직임은 마치 짐승처럼 무겁고 굼뜨면서도, 점점 더 가까워졌다. 어둠 속에서 그것의 형상은 점점 더 구체화 되었고, 그 존재는 전혀 인간적이지 않았다.』
|
||
|
||
『갑자기 하늘이 갈라지며, 큰 번개가 언덕 위를 비추었다. 그것은 마치 지옥에서 솟아오른 불길처럼 강렬하게 떨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이 정적에 휩싸였다.』
|
||
|
||
『그의 칼은 내리쳐졌다. 날카로운 금속이 공기를 가르며 적을 향해 돌진했다. 상대는 그 힘에 압도당했고, 칼날이 그의 몸을 스쳐 지나가며 위협을 넘어서 공포를 안겨주었다.』
|
||
|
||
인간과 인간이 느끼는 공포를 다뤘던 이야기가, 그림자의 괴물이 되어 발자레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
폭풍이 치는 언덕, 사랑과 오해에 다뤘던 이야기가, 한줄기 낙뢰가 되어 발자레스에게 떨어졌다.
|
||
|
||
포기하지 않는 집념과 복수를 다뤘던 이야기가, 그 집념만큼이나 굳세고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발자레스를 베어 넘겼다.
|
||
|
||
그림자의 괴물을 짓밟고, 낙뢰를 흘려보내고, 실체화된 칼날을 막아내며, 발자레스가 외쳤다.
|
||
|
||
“뭐냐!? 대체 어떻게, 이렇게나 많은 마도서를 준비한 거지!?”
|
||
|
||
‘…아니야.’
|
||
|
||
에리스는 발자레스의 착각을, 아니 여태까지 그녀 자신조차 해왔었던 오해를 깨달았다.
|
||
|
||
에른스트가 사용하는 저것들은 마도서가 아니다.
|
||
|
||
하지만 마도서이기도 하다.
|
||
|
||
모순되는 것 같지만, 모순이 아니다.
|
||
|
||
「당신이 책 읽기를 좋아하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그러면 구태여 저한테 책을 권유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어차피 당신도 이미 읽은 책인데, 다른 사람의 감상 같은 게 무슨 의미가 있죠?」
|
||
|
||
「의미라면 있습니다. 설령 똑같은 책, 똑같은 문장이라고 해도 그걸 읽는 이마다 감상은 달라지는 법이니까요. 다른 누군가와 감상을 나누고, 공유한다면 책 하나로도 더욱 풍성한 즐거움이 생기는 법입니다.」
|
||
|
||
에리스의 뇌리에, 언젠가 에른스트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
||
|
||
같은 책이라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다르다.
|
||
|
||
누군가에게는 그저 실용성 없는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그 자체로 주문의 단서이자 강렬한 영감의 원천일 수도 있다.
|
||
|
||
책의 내용.
|
||
|
||
거기에 적혀 있는 문구 하나하나.
|
||
|
||
이를 해석하고, 강조하고, 현실로 뒤바꾼다.
|
||
|
||
읽는 이에게 마법의 힘을 주는 것이 마도서라고 한다면, 에른스트에게 있어서 이 도서관에 있는 책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마도서였다.
|
||
|
||
“좋아! 그렇게나 처참한 죽음을 원한다면, 진지하게 상대해 주지!”
|
||
|
||
더 이상의 장난은 끝이라는 듯이, 발자레스의 기색이 바뀌었다.
|
||
|
||
껍데기처럼 뒤집어쓰고 있던 마리크의 육신이 불타 사라지며, 그 안쪽에서 발자레스의 진짜 모습이 드러났다.
|
||
|
||
광대 같은 분장, 솟아오른 뿔, 피막에 뒤덮인 날개와 긴 꼬리.
|
||
|
||
발자레스의 손에서 뻗어나간 마력탄은 그대로 거대한 바위로 변하며 2층과 1층을 연결하는 문을 가로막았고, 이에 발자레스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
||
|
||
“잘난 마도서도 이걸로 끝이다!”
|
||
|
||
그는 2층에 있는 책만이 마도서라고 생각한 듯했지만, 에리스의 추측대로라면 그건 틀렸다.
|
||
|
||
에리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
||
|
||
주변에 분류별로 가득 놓여 있는, 수백을 넘는 책들을 바라보았다.
|
||
|
||
오직 에른스트의 손 위에서만은, 마도서로서 기능할 그 책들을.
|
||
|
||
그리고 그런 그녀의 믿음을 증명하듯, 에른스트는 근처에 있는 책장에서 적당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
||
|
||
아무런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 그저 평범한 종이 뭉치.
|
||
|
||
허나 에른스트가 그 책을 펼친 순간, 책에 강렬한 빛이 깃들었다.
|
||
|
||
『노란 형광등이 윙윙대는 소리, 얼룩진 카펫, 끝없이 복제된 공간들. 너는 탈출구 없이 그 안에 있다.』
|
||
|
||
도서관의 크기가 부풀었다.
|
||
|
||
그것은 언뜻 기분 탓이라고 느낄 만큼 작은 차이 같기도 했고, 수십 수백 배를 넘는 극적인 변화 같기도 했다.
|
||
|
||
에리스에게는 전자였으나, 발자레스에게는 후자인 것 같았다.
|
||
|
||
악마는 그 날개를 퍼덕이며 여기저기로 움직이려 했지만, 분명 쉴 새 없이 날개를 움직이고 몸에서 마력을 뿜어내는데도 그 위치는 처음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
||
|
||
마치, 아득하게 넓디넓은 공간에서 약간의 움직임 정도는, 전체상을 지켜보는 이에게는 그저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듯이.
|
||
|
||
발자레스가 분노와 함께 절규했다.
|
||
|
||
“어째서냐! 왜 카피할 수가 없는 거지!?”
|
||
|
||
발자레스가 지닌 힘은 복사.
|
||
|
||
타인의 노력을, 그들이 쌓아온 과정을 모조리 무시한 채, 오직 알맹이만을 빼먹는 권능.
|
||
|
||
에른스트가 제아무리 수많은 주문을 다룰 수 있다고 해도, 그건 본래라면 발자레스에게 아무런 위협도 안 될뿐더러 오히려 더 많은 먹이를 줄 뿐이다.
|
||
|
||
지금 발자레스를 억누르는 공간 주문 역시, 발자레스가 카피해서 사용한다면 얼마든지 속박을 해제하고 오히려 더 큰 마력으로 에른스트를 구속할 수 있을 터.
|
||
|
||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
||
|
||
아무리 권능을 발동하려고 해도, 이를 사용하려고 해도, 발자레스는 도저히 에른스트의 주문을 카피할 수가 없었다.
|
||
|
||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평소의 익살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린 악마를 향해, 에른스트는 특유의 무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
||
|
||
“보안 코드를 추가했으니까요.”
|
||
|
||
“…뭐?”
|
||
|
||
“책의 겉 페이지만 보고 그 내용을 전부 읽은 것처럼 굴 수 있는 게 당신의 능력 아닙니까? 그래서, 그걸 막았습니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하나하나 읽은 게 아니라면 머릿속에서 그 내용을 떠올릴 수도, 그 내용을 인용할 수도 없도록.”
|
||
|
||
한 권 한 권 모조리 암호화하려고 하니까 며칠 정도는 걸리더군요, 라며 에른스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
||
|
||
발자레스는 넋이 나간 듯한 얼굴을 했다.
|
||
|
||
그리고 그런 악마를 향해, 에른스트가 선언했다.
|
||
|
||
“살인, 스토킹, 상해, 협박, 공공장소에서 다수를 휘말리게 하는 마법 사용, 결정적으로 도서관 내에서 폭력 행위 및 기물파손. 죗값이 꽤 무거울 것 같군요.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저는 사서이므로, 설령 상대가 악마라고 해도 쉽게 죽이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
||
|
||
잠시 한 호흡을 둔 뒤, 그가 덧붙였다.
|
||
|
||
“그저 책으로 만들 뿐이지요.”
|
||
|
||
“무, 무슨 미친 소리를, 억, 커억!?”
|
||
|
||
발자레스의 몸이 기괴하게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
||
|
||
얇게, 얇게, 마치 종이처럼.
|
||
|
||
가늘게, 가늘게, 마치 잉크처럼.
|
||
|
||
에른스트는 카운터에서 적당한 하드커버 하나를 집어 들더니, 그것을 발자레스를 향해 집어 던졌다.
|
||
|
||
종이는 하드커버에 달라붙어 페이지가 되었고, 잉크는 그 종이를 채울 글귀와 그림이 되었다.
|
||
|
||
-아아아아아아악!
|
||
|
||
기나긴 비명이, 아득히 먼 곳으로 사라지듯이 점점 작아졌다.
|
||
|
||
남은 것은 바닥에 떨어진 책 한 권뿐.
|
||
|
||
에른스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책을 주워 올리더니, 이내 심각한 얼굴로 에리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
||
|
||
“…책 제목은 뭐로 할지 고민되는데, 혹시 추천하는 거 없으십니까?”
|
||
|
||
에리스는 아주 정중하고 우아하며 지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
||
|
||
“혹시 돌으셨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