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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사서 에른스트(Ernst) (14) - 진상 대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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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타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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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좁은 골목길을 나란히 달리기를 얼마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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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에른스트가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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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글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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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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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어버렸단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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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는 눈을 끔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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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의 말을 이해하기까지 잠시 쿨타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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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장난해요!? 아니, 그보다 그런 소리를 뭐 그리 평온하게 말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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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하게 말한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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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요! 그러면 그냥 제가 앞장설… 뭐야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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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를 제치고 주변을 살펴본 에리스는, 이내 명백한 이상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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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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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침침한 통로. 바닥의 쓰레기. 벽면의 얼룩. 좌우로 이어지는 갈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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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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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침침한 통로. 바닥의 쓰레기. 벽면의 얼룩. 좌우로 이어지는 갈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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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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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침침한 통로. 바닥의 쓰레기. 벽면의 얼룩. 좌우로 이어지는 갈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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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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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봐도,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도, 어떤 골목길로 들어가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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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마을의 골목길을 이렇게 편집증 같은 디자인으로 꾸며놓았을 리는 없으니, 결론은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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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환영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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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 저해. 환각. 환영. 아무래도 무언가를 위장하고, 사람을 속이는 데 능한 상대 같군요. 다만, 저희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건 아닙니다. 그냥 본체를 중심으로 광범위한 결계를 발생시켰을 뿐인 듯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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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불명의 환영 속에 빠졌으면서도, 에른스트의 태도에는 조금의 초조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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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담담히 상황을 분석하는 그 냉정함이, 에리스의 마음속에 있는 불안과 초조를 불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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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가 지팡이를 꺼내 해제 주문을 사용하자, 주변 풍경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며 그 너머의 ‘진짜’ 배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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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그것도 잠시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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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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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의 침음성과 함께, 본래대로 돌아왔던 풍경이 다시금 환영으로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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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을 유지하려는 마력과 해제하려는 마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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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힘 싸움으로 붙게 되자 에리스 쪽이 밀려나 버린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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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마리크를 상대했을 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빈틈을 찌르거나 주문을 흘려보내는 것조차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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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는 분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지만, 에른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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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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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 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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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의 손을 붙잡은 에른스트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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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 뚫린 전방으로 스무 걸음. 그리고 명백하게 벽으로 가로막힌 오른쪽으로 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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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짓이냐며 다그치려던 에리스였지만, 두 사람의 몸은 충돌하는 대신 아무렇지도 않게 벽을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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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에리스는 상황을 파악했다. 에리스가 환영을 해제한 짧은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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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으로 따지면 겨우 2초 미만일 그 틈새에, 에른스트가 시야에 비치는 길을 전부 외워버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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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초 뒤에 해제 주문 한 번 더 부탁드립니다.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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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이 초까지 안 세도 충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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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의 주문이 작렬하고, 환영이 흔들리며 진짜 현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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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에른스트는 재빨리 거리의 모습을 외운 뒤, 각 포인트까지 도달하는 데 필요한 걸음 수를 계산해 에리스에게 새로운 주문 사용 타이밍을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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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작업을 세 번쯤 반복했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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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있어? 어디 있어? 어디 있어?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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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랑 놀자! 우리랑 놀자! 우리랑 놀자! 우리랑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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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처럼 창백한 안색의 두 남녀가, 고장 난 축음기처럼 똑같은 높낮이의 멘트를 되풀이하며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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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달리면서 에른스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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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소식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모험가가 아닌 사서라서 저들을 단숨에 제압할 무력은 없습니다. 덧붙여 당신을 업고서 뛸 수 있을 만큼 체력이 좋지도 않습니다. 도서관 내부라면 또 모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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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기대도 안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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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에른스트가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내심 기대했던 에리스는, 괜히 뜨끔한 기분을 감추기 위해 더욱 큰소리를 지르며 주문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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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의 물과 강렬한 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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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종류의 마법을 전방으로 퍼붓자, 그들을 향해 달려들던 두 남녀가 온몸에 살얼음이 생긴 채로 그대로 정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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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는 에리스의 손을 붙잡고 다시금 땅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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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허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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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는 목 끝까지 숨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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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주문 사용과 계속되는 질주는 그녀의 체력과 마력을 급속도로 갉아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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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물림 마법사라는 오명을 피하기 위해 가끔이나마 운동을 해둔 게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이미 땅바닥에 퍼져버렸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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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 한구석에 있는 냉철한 이성이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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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이걸로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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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마력과 체력을 마구 소비해서 도서관에 간다고 한들, 이 상황이 나아지긴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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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도 잘 모르는 사서의 말만 믿고 행동하느니, 차라리 강습소로 가서 교수들의 도움을 구하는 게 좋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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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무릇 합리적이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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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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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에리스는 그걸 깔끔하게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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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그녀는 이성보다는 감성으로 사는 인간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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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도서관이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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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추격자들 역시 바로 등 뒤까지 달라붙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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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거야? 가지 마! 갈 거야? 가지 마! 갈 거야? 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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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의 손끝이 에리스의 옷자락에 걸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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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는 황급히 몸을 돌리며 이를 떨쳐냈지만, 그 탓에 몸의 균형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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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라면 넘어진다고 직감한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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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두 팔이, 에리스의 몸을 끌어안으며 품속에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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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와 에리스, 두 사람의 몸이 공처럼 튀어 오르며, 그대로 도서관 정문에 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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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억! 덜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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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부서지고, 에른스트와 에리스가 도서관 한복판을 데굴데굴 구르다 어느 책장과 충돌하며 정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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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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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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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를 감싸며 충돌한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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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레 표정을 일그러트리는 에른스트의 모습에 에리스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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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에른스트의 상태를 느긋하게 살필 여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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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정문 틈새로 두 남녀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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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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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의 머릿속 인내심이 마침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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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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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화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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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종류의 속성 주문이 서로 호응하며, 추격자들의 상반신을 통째로 지워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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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지고 얻어맞으면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던 추격자들은, 반신을 잃고 나서야 쓰러져 행동을 정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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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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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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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그걸로, 남아 있던 마력이 정말로 제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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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질주를 계속한 다리는 이 이상은 무리라는 듯 부들부들 떨렸고, 머리에서는 현기증마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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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쥐새끼 같은 발버둥, 잘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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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타이밍을 가늠하기라도 한 듯, 마리크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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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한껏 지은 그는, 지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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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마력 소모로 따지면 에리스의 수십 배는 더 극심했을 텐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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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도망치고 도망친 장소가 결국 여기인 건 좀 실망인데.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잖아. 강습소로 갔으면 교수들을 착란에 빠트려 서로 죽이게 하고, 델피나리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면 가는 길에 있는 인간들을 전부 미쳐 날뛰게 했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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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연극의 연출이 본인 기대보다 못한 것을 푸념하듯이, 마리크는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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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마리크를 보며, 에리스는 마침내 확신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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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정체가 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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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야? 벌써 내 얼굴 같은 건 잊어버렸다 뭐 그런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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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마리크는 당신보다 더 잔챙이 같아요. 언동을 흉내 내도, 그것만큼은 쉽게 따라 할 수 없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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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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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크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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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정적 후, 그가 폭소를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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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하하! 오, 그렇군. 그건 확실히 정곡을 찔렀어! 이야, 안 좋은 것도 어느 경지에 오르면 남들은 쉬이 범접할 수 없게 되는 법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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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깔깔 웃던 마리크, 아니 마리크를 흉내내는 무언가는 히죽거리는 얼굴 그대로 에리스에게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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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발자레스. 이 멍청한 계약자에게 힘을 주었고, 겸사겸사 새 계약자를 찾고 있는 악마지. 어때, 아가씨. 나랑 손을 잡을 생각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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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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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단어를 들은 순간, 에리스의 눈이 한껏 찡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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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엮여서도, 말을 섞어서도 안 될 종자들이라고 평가했던 스승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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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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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그렇게 매정하게 굴지 말고 좀 들어보라고. 여기 이놈은 정말 능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숨만 쉬어도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인간쓰레기였는데 말이지, 나와 계약을 한 뒤에는 승승장구를 거듭하며 마구 날아올랐어. 그게 어느 정도인지는 아가씨가 가장 잘 알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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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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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를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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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압도적인 마력. 주문을 보는 것만으로 즉석에서 습득하는 천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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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정말 본연의 재능은 아무 관계 없이, 그저 계약만으로 주어진 거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가공할 만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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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서적에서 악마에 관한 위험성을 몇 번이고 강조하고, 만신전의 사제들이 악마와 악마 계약자를 보면 살기를 드러내며 박살 내려고 하는데도 왜 계약하는 이들이 끊이지를 않는지 알 수 있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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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은 원판이 워낙 멍청했던 터라 내 힘을 가지고도 제대로 쓰지 못했지만, 아가씨는 달라.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만 하면 그야말로 따라올 자가 드문 마법사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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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친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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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똑바로 붙잡지 않으면, 방금까지 상대가 그녀의 목숨을 노려왔던 적이라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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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는 악마를 똑바로 노려보며 단호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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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하겠어요. 당신 같은 것하고 계약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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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 그리 쉽게 결정하지 말고, 좀만 더 고민해 보라니까? 아가씨 하기 나름으로는 아가씨의 스승보다 더 뛰어난 마법사가 될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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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사근사근하게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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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야. 천공 학원, 그곳에서 내가 원하는 어떤 물건을 찾아 건네주기만 하면 돼. 그 뒤에는 어떤 간섭도 하지 않을 거고, 힘은 그대로 남겨줄 거야. 이런 수지 맞는 장사, 다른 악마하고는 어림도 없다고. 나니까 이 정도로 해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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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한다고 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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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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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발자레스가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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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고개를 꺾으며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이내 히죽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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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실로 안타까운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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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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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위협을 각오한 행동이었지만, 발자레스는 익살스러운 태도로 그런 에리스의 각오를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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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해, 아가씨. 본래라면 아가씨가 생각한 그런 방법으로 계약을 권해볼까 했는데, 둘이 열심히 도망치는 모습을 보니까 생각이 좀 바뀌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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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레스의 주변, 불꽃으로 이루어진 수십 개의 검이 일제히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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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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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마리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마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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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그 검들이 조준하는 방향이, 에리스 자신이 아닌 에른스트 쪽이라는 사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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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레스가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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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을 해보자고, 아가씨. 지금부터 내가 제안한 계약에 아가씨가 ‘네’ 이외의 대답을 말할 때마다 여기 있는 검 중 하나가 거기 형씨 몸에 쑤셔 박힐 거야. 계약 조건이 전보다 좀 박하긴 할 테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원래 첫 기회가 가장 좋은 기회라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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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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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해! 머리랑 심장은 피해줄 테니까! 갸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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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웃고, 에리스는 그 비겁함과 사악함에 치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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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러면. 시작하지. 아가씨, 너는 지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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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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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레스가 계약의 내용을 선언하려고 한 그 순간, 도서관의 문이 갑자기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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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고 단단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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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침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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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누구의 탈출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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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그렇습니까. 대충 상황은 파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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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이나 담담한, 이 긴박한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는 무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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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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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금발의 남자가, 악마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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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레스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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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끼리 서로 감정을 부딪히는 하이라이트 장면에 갑자기 끼어든 조연을 보는 듯한 눈으로, 악마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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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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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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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는 악마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에리스의 등을 조용히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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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안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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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 손님 대응도, 사서의 역할 중 하나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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