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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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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사서 에른스트(Ernst) (14) - 진상 대응법

타닥타닥.

비좁은 골목길을 나란히 달리기를 얼마쯤.

문득, 에른스트가 내뱉었다.

“음, 글렀군요.”

“네?”

“길을 잃어버렸단 뜻입니다.”

에리스는 눈을 끔뻑거렸다.

에른스트의 말을 이해하기까지 잠시 쿨타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금 장난해요!? 아니, 그보다 그런 소리를 뭐 그리 평온하게 말하고 있어요!?”

“다급하게 말한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니니까요.”

“됐어요! 그러면 그냥 제가 앞장설… 뭐야 이거.”

에른스트를 제치고 주변을 살펴본 에리스는, 이내 명백한 이상을 깨달았다.

정면.

어두침침한 통로. 바닥의 쓰레기. 벽면의 얼룩. 좌우로 이어지는 갈림길.

측면.

어두침침한 통로. 바닥의 쓰레기. 벽면의 얼룩. 좌우로 이어지는 갈림길.

후방.

어두침침한 통로. 바닥의 쓰레기. 벽면의 얼룩. 좌우로 이어지는 갈림길.

길이 똑같다.

어딜 봐도,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도, 어떤 골목길로 들어가도 마찬가지.

평범한 마을의 골목길을 이렇게 편집증 같은 디자인으로 꾸며놓았을 리는 없으니, 결론은 하나였다.

“또 환영이군요.”

“인지 저해. 환각. 환영. 아무래도 무언가를 위장하고, 사람을 속이는 데 능한 상대 같군요. 다만, 저희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건 아닙니다. 그냥 본체를 중심으로 광범위한 결계를 발생시켰을 뿐인 듯하군요.”

정체불명의 환영 속에 빠졌으면서도, 에른스트의 태도에는 조금의 초조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상황을 분석하는 그 냉정함이, 에리스의 마음속에 있는 불안과 초조를 불식시켰다.

에리스가 지팡이를 꺼내 해제 주문을 사용하자, 주변 풍경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며 그 너머의 ‘진짜’ 배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나 그것도 잠시뿐.

“윽…!”

에리스의 침음성과 함께, 본래대로 돌아왔던 풍경이 다시금 환영으로 뒤덮였다.

환영을 유지하려는 마력과 해제하려는 마력.

순수한 힘 싸움으로 붙게 되자 에리스 쪽이 밀려나 버린 탓이었다.

저번에 마리크를 상대했을 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빈틈을 찌르거나 주문을 흘려보내는 것조차 어려웠다.

에리스는 분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지만, 에른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합니다.”

“무슨 소리, 앗.”

에리스의 손을 붙잡은 에른스트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뻥 뚫린 전방으로 스무 걸음. 그리고 명백하게 벽으로 가로막힌 오른쪽으로 돌진.

무슨 짓이냐며 다그치려던 에리스였지만, 두 사람의 몸은 충돌하는 대신 아무렇지도 않게 벽을 통과했다.

그제야 에리스는 상황을 파악했다. 에리스가 환영을 해제한 짧은 순간.

시간으로 따지면 겨우 2초 미만일 그 틈새에, 에른스트가 시야에 비치는 길을 전부 외워버렸다는 것을.

“5초 뒤에 해제 주문 한 번 더 부탁드립니다. 5, 4-”

“일일이 초까지 안 세도 충분해요!”

에리스의 주문이 작렬하고, 환영이 흔들리며 진짜 현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면 에른스트는 재빨리 거리의 모습을 외운 뒤, 각 포인트까지 도달하는 데 필요한 걸음 수를 계산해 에리스에게 새로운 주문 사용 타이밍을 알려주었다.

그런 작업을 세 번쯤 반복했을 무렵.

-어디 있어? 어디 있어? 어디 있어? 어디 있어?

-우리랑 놀자! 우리랑 놀자! 우리랑 놀자! 우리랑 놀자!

시체처럼 창백한 안색의 두 남녀가, 고장 난 축음기처럼 똑같은 높낮이의 멘트를 되풀이하며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거리를 달리면서 에른스트가 말했다.

“안타까운 소식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모험가가 아닌 사서라서 저들을 단숨에 제압할 무력은 없습니다. 덧붙여 당신을 업고서 뛸 수 있을 만큼 체력이 좋지도 않습니다. 도서관 내부라면 또 모릅니다만.”

“애초에 기대도 안 했어요!!”

사실 에른스트가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내심 기대했던 에리스는, 괜히 뜨끔한 기분을 감추기 위해 더욱 큰소리를 지르며 주문을 사용했다.

대량의 물과 강렬한 냉기.

두 종류의 마법을 전방으로 퍼붓자, 그들을 향해 달려들던 두 남녀가 온몸에 살얼음이 생긴 채로 그대로 정지했다.

에른스트는 에리스의 손을 붙잡고 다시금 땅을 박찼다.

“허억, 허억.”

에리스는 목 끝까지 숨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연이은 주문 사용과 계속되는 질주는 그녀의 체력과 마력을 급속도로 갉아먹고 있었다.

책상물림 마법사라는 오명을 피하기 위해 가끔이나마 운동을 해둔 게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이미 땅바닥에 퍼져버렸겠지.

머릿속 한구석에 있는 냉철한 이성이 질문했다.

정말로 이걸로 좋은가?

이렇게 마력과 체력을 마구 소비해서 도서관에 간다고 한들, 이 상황이 나아지긴 하나?

정체도 잘 모르는 사서의 말만 믿고 행동하느니, 차라리 강습소로 가서 교수들의 도움을 구하는 게 좋지 않나?

실로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무릇 합리적이기까지 했다.

‘알 게 뭐야.

허나, 에리스는 그걸 깔끔하게 무시했다.

애초에 그녀는 이성보다는 감성으로 사는 인간이었기에.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도서관이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문제는 추격자들 역시 바로 등 뒤까지 달라붙었다는 점이었다.

-갈 거야? 가지 마! 갈 거야? 가지 마! 갈 거야? 가지 마!

추격자의 손끝이 에리스의 옷자락에 걸쳐졌다.

에리스는 황급히 몸을 돌리며 이를 떨쳐냈지만, 그 탓에 몸의 균형을 잃었다.

이대로라면 넘어진다고 직감한 그 순간.

단단한 두 팔이, 에리스의 몸을 끌어안으며 품속에 감쌌다.

에른스트와 에리스, 두 사람의 몸이 공처럼 튀어 오르며, 그대로 도서관 정문에 격돌했다.

퍼억! 덜컹!

문이 부서지고, 에른스트와 에리스가 도서관 한복판을 데굴데굴 구르다 어느 책장과 충돌하며 정지했다.

“…큭.”

“괘, 괜찮아요!?”

에리스를 감싸며 충돌한 탓일까.

고통스레 표정을 일그러트리는 에른스트의 모습에 에리스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허나 에른스트의 상태를 느긋하게 살필 여유는 없었다.

열린 정문 틈새로 두 남녀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빠직.

에리스의 머릿속 인내심이 마침내 끊어졌다.

“적당히 좀, 해!!”

지수화풍.

네 종류의 속성 주문이 서로 호응하며, 추격자들의 상반신을 통째로 지워 날렸다.

넘어지고 얻어맞으면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던 추격자들은, 반신을 잃고 나서야 쓰러져 행동을 정지했다.

“후우, 후우.”

에리스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방금 그걸로, 남아 있던 마력이 정말로 제로가 되었다.

오랜 시간 질주를 계속한 다리는 이 이상은 무리라는 듯 부들부들 떨렸고, 머리에서는 현기증마저 일어났다.

“하하하! 쥐새끼 같은 발버둥, 잘 봤어!”

그리고 그 타이밍을 가늠하기라도 한 듯, 마리크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한껏 지은 그는, 지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단순한 마력 소모로 따지면 에리스의 수십 배는 더 극심했을 텐데도 말이다.

“그런데 도망치고 도망친 장소가 결국 여기인 건 좀 실망인데.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잖아. 강습소로 갔으면 교수들을 착란에 빠트려 서로 죽이게 하고, 델피나리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면 가는 길에 있는 인간들을 전부 미쳐 날뛰게 했을 것을!”

마치 연극의 연출이 본인 기대보다 못한 것을 푸념하듯이, 마리크는 탄식했다.

그런 마리크를 보며, 에리스는 마침내 확신을 얻었다.

“당신, 정체가 뭐죠?”

“무슨 소리야? 벌써 내 얼굴 같은 건 잊어버렸다 뭐 그런 뜻인가?”

“진짜 마리크는 당신보다 더 잔챙이 같아요. 언동을 흉내 내도, 그것만큼은 쉽게 따라 할 수 없다고요.”

“…….”

마리크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약간의 정적 후, 그가 폭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오, 그렇군. 그건 확실히 정곡을 찔렀어! 이야, 안 좋은 것도 어느 경지에 오르면 남들은 쉬이 범접할 수 없게 되는 법이로군!”

깔깔깔 웃던 마리크, 아니 마리크를 흉내내는 무언가는 히죽거리는 얼굴 그대로 에리스에게 고했다.

“나는 발자레스. 이 멍청한 계약자에게 힘을 주었고, 겸사겸사 새 계약자를 찾고 있는 악마지. 어때, 아가씨. 나랑 손을 잡을 생각은 없어?”

악마.

그 단어를 들은 순간, 에리스의 눈이 한껏 찡그려졌다.

함부로 엮여서도, 말을 섞어서도 안 될 종자들이라고 평가했던 스승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거절하겠어요.”

“너무 그렇게 매정하게 굴지 말고 좀 들어보라고. 여기 이놈은 정말 능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숨만 쉬어도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인간쓰레기였는데 말이지, 나와 계약을 한 뒤에는 승승장구를 거듭하며 마구 날아올랐어. 그게 어느 정도인지는 아가씨가 가장 잘 알지 않아?”

안다.

모를 리가 없었다.

그 압도적인 마력. 주문을 보는 것만으로 즉석에서 습득하는 천재성.

그게 정말 본연의 재능은 아무 관계 없이, 그저 계약만으로 주어진 거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가공할 만한 일이었다.

온갖 서적에서 악마에 관한 위험성을 몇 번이고 강조하고, 만신전의 사제들이 악마와 악마 계약자를 보면 살기를 드러내며 박살 내려고 하는데도 왜 계약하는 이들이 끊이지를 않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이놈은 원판이 워낙 멍청했던 터라 내 힘을 가지고도 제대로 쓰지 못했지만, 아가씨는 달라.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만 하면 그야말로 따라올 자가 드문 마법사가 되겠지.”

악마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친근했다.

정신을 똑바로 붙잡지 않으면, 방금까지 상대가 그녀의 목숨을 노려왔던 적이라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에리스는 악마를 똑바로 노려보며 단호히 말했다.

“거절하겠어요. 당신 같은 것하고 계약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허어, 그리 쉽게 결정하지 말고, 좀만 더 고민해 보라니까? 아가씨 하기 나름으로는 아가씨의 스승보다 더 뛰어난 마법사가 될 수도 있어.”

악마는 사근사근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야. 천공 학원, 그곳에서 내가 원하는 어떤 물건을 찾아 건네주기만 하면 돼. 그 뒤에는 어떤 간섭도 하지 않을 거고, 힘은 그대로 남겨줄 거야. 이런 수지 맞는 장사, 다른 악마하고는 어림도 없다고. 나니까 이 정도로 해주는 거야.”

“거절한다고 했잖아요!”

“흠.”

악마, 발자레스가 입을 다물었다.

이리저리 고개를 꺾으며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이내 히죽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실로 안타까운 일이야.”

에리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생명의 위협을 각오한 행동이었지만, 발자레스는 익살스러운 태도로 그런 에리스의 각오를 비웃었다.

“안심해, 아가씨. 본래라면 아가씨가 생각한 그런 방법으로 계약을 권해볼까 했는데, 둘이 열심히 도망치는 모습을 보니까 생각이 좀 바뀌더라고.”

발자레스의 주변, 불꽃으로 이루어진 수십 개의 검이 일제히 떠올랐다.

에리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나는 마리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마력에.

또 하나는 그 검들이 조준하는 방향이, 에리스 자신이 아닌 에른스트 쪽이라는 사실에.

발자레스가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게임을 해보자고, 아가씨. 지금부터 내가 제안한 계약에 아가씨가 ‘네’ 이외의 대답을 말할 때마다 여기 있는 검 중 하나가 거기 형씨 몸에 쑤셔 박힐 거야. 계약 조건이 전보다 좀 박하긴 할 테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원래 첫 기회가 가장 좋은 기회라잖아?”

“당신…!”

“안심해! 머리랑 심장은 피해줄 테니까! 갸하하하!”

악마는 웃고, 에리스는 그 비겁함과 사악함에 치를 떨었다.

“자, 그러면. 시작하지. 아가씨, 너는 지금부터─”

쿠웅!

발자레스가 계약의 내용을 선언하려고 한 그 순간, 도서관의 문이 갑자기 닫혔다.

굳고 단단히.

누구의 침입도.

아니, 누구의 탈출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흠. 그렇습니까. 대충 상황은 파악했습니다.”

무척이나 담담한, 이 긴박한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는 무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윽.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금발의 남자가, 악마를 바라보았다.

발자레스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주연끼리 서로 감정을 부딪히는 하이라이트 장면에 갑자기 끼어든 조연을 보는 듯한 눈으로, 악마가 입을 열었다.

“너, 뭐냐?”

사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른스트는 악마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에리스의 등을 조용히 다독였다.

“이제 안심하십시오.”

─진상 손님 대응도, 사서의 역할 중 하나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