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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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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사서 에른스트(Ernst) (13) - 가짜? 진짜?
교류회가 끝난 뒤, 에리스의 입지는 무척이나 탄탄해졌다.
모의전에서 보여준 활약과 그 과정이 너무나 드라마틱했던 터라, 안 그래도 높았던 주변 사람들의 평가가 더더욱 우상으로 치우쳤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에리스도 기뻐했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감이 없잖아 있었던 스승과의 관계가 다시 가까워지며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도 했고, 학업 측면에서 봐도 대외 평가가 좋아서 나쁠 게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라는 게 있지 않을까.
기숙사 개인실에서, 에리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응이 너무 과하다.
예전에도 대마법사의 제자 겸 강습소 내 수석이라는 걸로 제법 높은 평가를 받기는 했지만, 이제는 평가가 높은 걸 넘어 반쯤 숭배의 영역에 닿을 정도.
벤치에 앉아서 가만히 멍만 때리고 있어도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니, 라벨로시아의 미래를 고민하는 중인 게 틀림없다니 하는 식으로 금칠을 해대고, 다른 학생들 상대로 적당히 맞장구나 치면서 내뱉었던 말은 ‘에리스 님 명언집’ 같은 웃기지도 않은 제목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을 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미친 것 같았다.
‘강습소에서 좀 피해 있어야겠어.
졸업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강습소의 수업도 점점 뜸해져 반쯤 자습에 가까운 형태로 바뀌고 있었고, 학생들은 나날이 학습에 힘쓰기보다는 장래의 일에 대해 수다 떨기로 바빴다.
아니, 후자의 경우 원래도 그랬던 것 같지만 중요한 건 전에는 몰래 그래야 했던 것이, 이제는 대놓고 그래도 교수 중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
특히 에리스의 경우 교류회에서 확실한 성적을 내며 천공 학원 입학을 낙점받게 되었으니, 사전에 신청만 해둔다면 강습소에 나가지 않고 다른 곳에서 자습을 한다고 해도 거부당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한동안 방문을 자제했던 스승의 집에 가서 공부하는 것도 좋을 테고, 천공 학원 주변으로 사전 답사를 가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렇지만, 이런저런 후보를 떠올려도 결국 마지막에 에리스의 머릿속을 차지하는 장소는 정해져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적막한 도서관.
그 도서관 한구석에서 손님 응대를 할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얼굴로 차분하게 본인 책이나 읽고 있는 한 사서의 모습.
“…그러고 보니 교류회 뒤로는 얼굴도 못 봤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스승과의 화해라든가, 왕실 높으신 분의 호출이라든가, 한동안은 정말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으니까.
“뭐, 이래저래 신세 진 것도 있고, 보답으로 매출 정도는 늘려줘도 괜찮겠지. 겸사겸사 그쪽의 취미 생활에 살짝 어울려주는 것도, 음.”
‘그냥 찾아가서 만나고 싶다’ ‘함께 같은 책을 읽은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라는 본심을 그럴싸하게 포장한 뒤, 에리스는 내일을 기대하며 침대에 누웠다.
정확히는, 누우려고 했다.
-어머, 그게 정말인가요?
-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벌떡.
거의 트램펄린에 튕겨 나온 듯한 동작으로 에리스가 몸을 일으켰다.
두 남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즐겁게, 따스하게, 마치 연인끼리 밀회를 즐기며 정담이라도 나누는 듯한 목소리.
그것 자체는 좋다. 솔직히 말해서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문제는, 그 목소리가 에리스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소리라는 점이었다.
팟!
에리스는 커튼을 열어젖혔다.
2중으로 단단하게 막혀 있는 창문 너머로, 한 여성과 남성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럭저럭 훤칠한 키에, 살짝 마른 체격. 가벼운 정장과 곱슬거리는 금발.
여성 쪽은 이렇다 할 특징을 잡기 어렵지만, 도서관에서 에른스트에게 몇 번인가 말을 걸던 이의 모습이라는 것 정도는 떠올릴 수 있었다.
-아하하, 정말 재미있으세요.
-딱히 재미있는 말은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두 사람의 그림자와 함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에리스는 거의 반사적으로 기숙사를 뛰쳐나와, 다급히 주변을 살폈다.
아슬아슬하게, 시야 끄트머리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 에리스는 거리를 좁혀 두 명을 미행했다.
대화를 나누는 여자는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고, 에른스트는 평소처럼 무덤덤한 얼굴이었지만 그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가 있었다.
에리스는 왠지 모르게 속에서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에리스 본인도 본 적이 있는 웃음이긴 하다.
하지만 그게 자신을 향한 것과 잘 알지 못하는 다른 여자를 향하는 건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에리스 양은 말입니다, 사실….
흠칫, 하고 에리스의 몸이 떨렸다.
-정말요? 그렇게는 안 보였는데.
-사람은 원래 겉보기만으로는 알 수 없는 법이지요.
구체적인 대화 내용은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본래 말투와 뉘앙스만으로도 대개의 느낌은 알아챌 수 있는 법.
뒤에서의 음모론, 조롱, 비웃음, 악의적인 소문.
그런 것들을 퍼트리는 이들 특유의 간교함과 무책임함이, 두 명의 목소리에서 흘러나왔다.
뜻 모를 배신감에 에리스는 몸을 떨었고.
‘…잠깐.
이내, 어떤 위화감을 깨닫고 발을 멈추었다.
정황 증거는 명확하다.
이게 만약 그녀가 읽어 왔던 책 속의 이야기라면, 이후에 벌어질 파국을 예감할 만큼.
허나, 그렇기에 에리스는 냉정함을 되찾았다.
너무 잘 짜여 있다.
너무나 그럴듯하다.
우연히 누군가의 이야기 소리가 들리고, 그게 하필 아는 사람이고, 심지어 그 상대가 본인 뒷담화를 하고 있다?
아니 그 이전에.
‘─애초에 방음이 뛰어난 기숙사 개인실 안쪽에서, 바깥 거리를 걷는 사람의 말소리가 들릴 리가 없잖아! 창문을 열어둔 것도 아니었는데!
그걸 깨달은 순간, 에리스는 반사적으로 자기 머리를 향해 주문을 사용했다.
『옅은 꿈에서 깨어나는 마법』
일정 수준 이하의 정신 공격을 해제하고, 그 이상의 공격도 약화하는 힘을 지닌 주문.
파직!
주문이 작렬한 순간, 얇은 유리막을 깨트린 듯한 반동이 느껴졌다.
에리스가 재차 앞을 바라보자, 거기에 있는 것은 더 이상 에른스트와 도서관을 방문하던 여인이 아니었다.
단지 비슷한 체격을 지녔을 뿐인, 에리스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판 남.
얼굴에 핏기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그 두 명이, 우뚝하고 발을 멈췄다.
그들은 화기애애하게 웃고 있던 방금까지의 모습은 어디에 내다 버렸는지, 차갑게 얼어붙은 얼굴로 에리스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두 명의 입이 열렸다.
-들켰나?
-들켰어?
-들켰네.
-들켰구나.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들켰다.
에리스는 무심코 뒷걸음을 쳤다.
그리고 눈치챘다.
목소리는 저들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귓가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윽…?!”
오싹한 혐오감과 공포감에, 에리스는 자기 몸을 감싸듯이 불꽃의 벽을 일으켰다.
그러자 곁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멀어지며, 이내 깔깔 웃기 시작했다.
목소리의 방향을 확인한 에리스는, 눈을 부릅떴다.
마리크 그림룬.
얼마 전 그녀가 결투로 때려눕혔던 상대가, 광대처럼 히죽거리는 얼굴로 에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싫다 싫어. 눈치가 너무 빠르잖아. 좀 더 이것저것 착각하게 하고, 절망으로 울부짖게 만들고 싶었는데!”
“당신…! 이게 대체 무슨 수작이죠!?”
“무슨 수작이냐고? 뭘 당연한 걸 묻고 있어. 복수지.”
마리크의 두 눈이 크게, 안구가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크고 동그랗게 열렸다.
인간보다는 파충류, 혹은 죽은 생선을 연상케하는 그 모습에, 에리스는 본능적인 혐오감을 느끼고 뒷걸음질을 쳤다.
허나 물러선 것은 단 한 걸음뿐.
이내 그녀는 이를 악물고, 품에서 지팡이를 꺼내 마리크에게 겨누었다.
공포에 맞서려는 용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이성을 유지하려는 침착함.
누군가는 ‘훌륭하다’라고 평가할 만한 그 모습을 보면서, 마리크의 얼굴에 기괴한 뒤틀림이 생겨났다.
그건 분노가 아니었다.
낙담, 혹은 지루함이었다.
“과연, 재미가 없겠군.”
“?”
에리스가 반문하는 것보다 먼저, 아까까지만 해도 멀리 떨어져 있던 두 명이 기괴한 괴성을 지르며 에리스에게 덮쳐들었다.
고민은 찰나.
에리스는 주문을 사용해 그들을 요격하는 대신, 그대로 몸을 돌려 반대쪽으로 달려 나갔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너무 방심했어…!
마리크의 인성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보복을 시도해도 이상할 게 없었는데,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너무 놓아버렸다.
아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이유만으로 다짜고짜 집에서 뛰쳐나가 그 뒤를 따라간다니, 지나칠 정도로 무방비하고 어리석은 행동이 아닌가.
아무리 주문 때문에 잠시 홀렸다고 해도 그렇지, 알아차리는 게 너무 늦었다.
다만, 굳이 변명을 말하자면.
‘대체 언제, 어떻게 주문을 건 거지? 그것도 아무런 전조도 못 느끼게 하면서?
마법사로서 기본기가 탄탄한 에리스다.
여기서 기본기가 탄탄하다는 건, 단순히 주문을 잘 쓰는 걸 넘어 남이 쓰는 주문을 감지하고 대처하는 일에도 능하다는 뜻.
허나 이번에는 그 어떤 전조도, 위화감도 느끼지 못한 채 환영에 걸려버렸다.
마리크의 재능이 뛰어난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짧은 시간에 여기까지 실력이 늘었단 말인가?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같이 가. 같이 가. 같이 가.
등 뒤에서는 기괴한 말소리와 함께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는 두 남녀의 모습.
전처럼 귓가에서 속삭이는 게 아니라 제대로 본인들 입으로 내는 소리이긴 했지만, 그런다고 소름이 안 돋는 것은 아니었다.
신체 강화 주문을 통해 전력으로 달리고 있는데도, 거리는 좀처럼 벌어지지를 않는다.
에리스는 고민에 빠졌다.
‘요격해야 하나?
마리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만약 미처 따라잡지 못한 거라면, 지금은 적의 수를 줄일 기회다.
허나 마리크가 그녀를 따라잡았으면서도 기척을 죽이고 있는 거라면, 요격을 위해 주문을 사용한 순간 등 뒤를 찔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무작정 이대로 도망만 치기에는, 이 이상한 골목길이 언제까지 이어지는 건지 알 수 없다.
이런저런 고민 속에서, 결심을 굳힌 에리스가 옆 골목길로 방향을 틀었다.
적이 골목을 도는 순간 단숨에 공격을 퍼부으려던 그때.
“잠시, 실례하지요.”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온 팔이, 에리스의 입을 단숨에 덮어 가린 후 끌어당겼다.
에리스는 경악하며 발버둥 치려 했지만, 손을 입으로 깨물어도, 팔꿈치로 옆구리를 쳐도, 신발로 발등을 짓밟아도 상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어디 있어. 어디 있어. 어디 있어.
-나도 같이. 나도 같이. 나도 같이.
두 남녀의 그림자가, 에리스를 스쳐 지나가 엉뚱한 곳으로 달려 나갔다.
그들이 충분히 떨어진 뒤에야, 에리스를 붙들고 있던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너무 큰 소리는 내지 마십시오. 들키면 골치 아파질 테니.”
급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무덤덤한 목소리.
너무나 익숙한 그 말투와 태도에, 에리스는 눈을 크게 한 뒤 자신을 붙잡고 있던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사서 에른스트.
그가 그곳에 있었다.
“다, 당신, 진짜예요?”
“진짜라면 진짜고 가짜라면 가짜겠지만, 어느 쪽이든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믿음이라는 건 본인이 믿고 싶으면 믿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건데.”
“…최근에 읽은 책 중 가장 인상 깊은 첫 문장은?”
“아무래도 좆됐다. 그것이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나는 좆됐다.”
진짜 맞구나.
에리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상황은─”
“할 말이 많으신 건 알겠지만, 일단 저를 믿는다면 따라오십시오. 시간이 없으니.”
“…어디로 가려고요?”
“도서관입니다. 저는 거기가 아니면 제대로 힘을 못 쓰는 터라. 아, 물론 믿지 않으신다면 다른 곳으로 가셔도 됩니다. 강습소 교수에게 의지하는 것도 나름 좋은 방법이겠지요.”
선택은 어디까지나 에리스의 몫이라는 듯한 태도였다.
허나, 반대로 그것이 에리스의 신뢰를 샀다.
적어도 방금 전의 조잡한 환영에 비하면, 너무나도 에른스트다운 말이었기에.
“좋아요. 가죠, 도서관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