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dd 3 AI agents (writing, revision, story-continuity specialists) - Add 4 slash commands (rovel.create, write, complete, seed) - Add novel creation/writing rules - Add Novelpia reference data (115 works, 3328 chapters) - Add CLAUDE.md and README.md 🤖 Generated with [Claude Code](https://claude.com/claude-code) 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16 KiB
#91화 사서 에른스트(Ernst) (12) - 당신의 친근한 악마
패배란 쓰라린 법이다.
허나, 모든 패자가 반드시 비참한 것만은 아니다.
만약 패자가 평소 주변을 신의 있게 대하고 공손한 태도를 보였더라면, 사람들은 ‘한 번쯤 질 수도 있지’라든가 ‘너무 신경 쓸 필요 없다’라며 패자를 위로할 것이다.
만약 패자가 싸움 도중 정정당당하고 명예로운 태도를 지켰더라면, 사람들은 ‘졌지만 잘 싸웠다’라든가 ‘승패를 따질 것 없이 멋진 승부였다’라며 패자를 격려할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 중 어느 것도 해당 사항이 없는 마리크의 패배가 끌어낸 결과는 그야말로 처참함 그 자체였다.
“이게 대체 무슨 추태더냐!! 네가 감히 우리 가문의 이름을 더럽혀!?”
그림룬 백작은 노발대발했다.
은밀한 일대일 결투도 아니고, 왕국의 주요 인물 중 상당수가 관심을 기울이고 개중에는 아예 직접 관람하기까지 했던 결투에서 패배했다.
아니, 그냥 패배만 한 것도 아니고 시합 도중에 온갖 추태란 추태는 다 부리는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디까지나 모의전에 불과한 승부에서 대놓고 살수를 날리는 걸로도 모자라, 듣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발언을 연달아 내뱉지 않았던가.
새로 들인 양자의 자랑스러운 승리를 보여주기 위해 교류회 당시 지인들을 초청하기까지 했던 그림룬 백작은, 수치심으로 사람이 죽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에리스라고 했나? 알드리지 강습소 쪽 대표 학생은 진짜 멋지더라.”
“그에 반해 우리 쪽 대표는… 아휴. 교수님들도 다들 한숨만 푹푹 내쉬던데?”
“그냥 학생인 나도 쪽팔렸는데 교수님들은 오죽했겠냐. 차라리 다른 녀석이 나갔으면 그냥 깔끔하게 지고 끝났을 텐데.”
학원의 평판 역시 끝장난 건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마리크는 그 성격 때문에 같은 강습소 내에서도 인망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래도 실기에서 보여주는 실력만큼은 압도적이었기에 ‘성격은 더럽지만 실력은 있는 놈’ 취급을 받았던 건데, 이번 일로 그 방패가 벗겨졌다.
마리크의 실력 자체는 예전과 변함이 없더라도, 거기에서 오는 권위와 압박감이 바닥으로 추락한 것이다.
남들 앞에서 처참하게 두들겨 맞은 일진이 다른 학생들 앞에서 허세를 부리면, 앞에서는 다들 숙이는 척해도 뒤에서는 비웃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시발, 시발! 빌어먹을 놈들! 내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만약 여기서 평소 본인의 행실을 반성할 정도의 상식과 도덕이 있었더라면 마리크 그림룬이라는 소년의 앞날에도 한 줄기 빛이 깃들었을지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늘 하던 대로 본인 잘못을 인정하는 대신 주변을 원망했다.
자기를 질책한 백작을,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교수들을, 비웃는 학생들을.
그리고 그의 스승 델피나리스를.
「미안하구나, 마리크. 네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늙은이의 아집과 집착으로 외면했었다. 그저 마법과 지식을 알려주는 것만이 아닌, 사람으로서 올바른 길을 갈 수 있게 하는 것도 스승의 역할인 것을.」
에리스로 인해 눈을 뜬 델피나리스였지만, 그래도 그녀는 마리크를 내버리려고는 하지 않았다.
일단 제자로 받아들인 이상, 설령 못난 제자라고 해도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그녀의 사고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델피나리스 나름의 속죄이자 사죄였지만, 마리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델피나리스의 강력한 마법과 대마법사의 제자라는 이름값만 원하던 그에게, 잘못을 고치니 올바른 사람으로 만드니 하는 소리는 그저 번거롭고 짜증만 날 뿐이었다.
화가 난다.
짜증이 치민다.
넘실대는 분노를 욕지거리로 바꿔 몇 번이고 토해내던 마리크는, 이내 그 분노의 방향을 돌렸다.
“따지고 보면 이게 다 네가 준 능력이 허접해서 그런 거잖아!! 델피나리스 그 노인네 아니면 누구라도 이길 수 있는 힘이라며!!”
마리크의 외침에, 방구석 그늘에 숨어 있던 악마 발자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기가 준 능력을 ‘허접하다’며 모욕하는 발언에도, 발자레스의 입가에선 변함없이 경박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오, 친구. 그 말은 좀 틀렸어. 난 분명히 ‘평범한 5위계 이하는 전부 이길 수 있는 힘’이라고 말했거든.”
“그러면 에리스 그년은 뭔데!!”
“그야 평범하지 않았던 거겠지?”
“지금 그딴 말장난이나 들으려고 하는 건 줄 알아!?”
어린애처럼 떼를 쓰는 마리크의 모습에 발자레스는 친근한 태도로 그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자, 자, 진정해. 주변의 이런저런 말 같은 건 신경 쓰지 말라고, 친구. 지금 너를 욕하는 놈들 대부분은 네가 다시 강력한 힘으로 승승장구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머리를 숙이며 아첨할 녀석들이니까.”
“…지금 상황으론 그 ‘승승장구’ 자체가 힘들잖아? 말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아?”
“정답이야, 친구! 말만으로는 안 되지. 그러니까 행동을 해야 해.”
어디까지나 친근하게, 익살스럽게, 웃는 얼굴로.
악마 발자레스는 말했다.
“그러니까 우선 그 에리스라는 계집을 죽여버리자고.”
끔뻑.
마리크는 두 눈을 감고 열기를 반복했다.
발자레스의 말투와 태도가 너무나도 평소 그대로라, 그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계집의 실력이 제법 볼만한 건 사실이야. 10의 힘으로 공격을 퍼부어도, 그 계집이라면 아마 1의 힘으로 능히 막아내겠지. 근데 말이지, 그러면 그냥 100의 힘으로 찍어 누르면 돼. 이왕이면 델피나리스에게 배운 주문들을 쓰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으니 내가 하나쯤 알려주지.”
마리크처럼 분노에 가득차 ‘죽인다’라고 선언하는 게 아니다.
머리에 피가 올라 앞뒤 안 가리고 난리를 치다가, 실수로 죽여버리는 것도 아니다.
명확한 의사를 지니고, 아무런 흥분도 동요도 없이, 그저 커피 한잔할까? 하는 정도의 가벼움으로, 발자레스는 에리스를 죽일 방법을 논했다.
그 형용하기 어려운 섬뜩함에, 마리크는 반사적으로 부정의 말을 내뱉었다.
“자, 잠깐만. 하지만 이 시점에서 그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다들 날 의심할 거 아니야?”
“좋은 지적이야! 이제 좀 머리가 돌아가는군! 케케케!”
낄낄거리며 웃던 발자레스는, 이내 입꼬리를 쓱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그래도 안심해! 나는 『기만』의 계보에 속하는 악마. 인간 따위를 속여 넘기는 건 너무나 간단한 일이니까. 네가 일을 저지를 때 알리바이 정도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어! 남들이 잔뜩 보는 곳에 네 환영을 유지해 두고, 적당한 인간 몇 명의 기억을 조작해 너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하면 쉬운 일이지.”
“그래도 의심할 것 같은데….”
“그래, 인간은 꼭 합당한 증거만을 믿는 존재는 아니지. 그냥 상황만으로 너를 의심하는 놈들도 없진 않을 거야. 그런데, 그러면 뭐 어쩔 건데?”
발자레스의 눈이 초승달을 그렸다.
“라벨로시아에 있는 강습소 학생 중, 천공 아카데미에 들어갈 만한 실력자는 너와 그 에리스라는 계집뿐이야. 그 계집만 죽여버리면 우리 친구의 성적이 얼마나 개판이든 상관없이 그곳에 들어갈 수 있겠지. 그걸로 끝이야. 거기는 대마법사라고 해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니까.”
“그다음에는?”
“다음 같은 건 걱정할 필요가 없지! 거기서 내가 요구하는 물건을 찾아주고 나면, 네가 지금 가진 힘은, 아니 그보다도 더욱 큰 힘이 네 것이 될 테니까! 스승이고 백작이고 다른 놈들이고, 너를 곤란하게 하는 인간들 전부를 네 발 아래 두고 내려다볼 수 있다고!”
발자레스의 태도는 친절했다.
그의 말투는 너무나도 친근했고, 마리크의 마음속에 있는 욕구와 욕망을 사정없이 뒤흔드는 법을 알았다.
허나, 마리크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이제 와서 양심 따위가 찔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으응? 친구. 왜 그래. 내가 다 챙겨준다니까? 너는 눈감고 가서 그 뒤통수에 최대급 주문만 때려박으면 돼. 아니, 아니지. 귀찮으면 그냥 칼로 푹 찌르는 것도 방법이겠군. 괜찮아, 아무도 너를 알아차리지 못할 테니까. 즐겁디즐거운 복수의 시간이라고!”
그저.
“몇 번이고 죽인다고 말했잖아? 실제로 죽이는 게 네 인생에 도움이 되기도 하잖아? 그러면 저질러야지! …으응? 이봐, 친구. 자네 말이야.”
그저, 그저, 그저.
“─혹시 겁먹었나?”
움찔, 하고 마리크의 몸이 크게 떨렸다.
그 반응에, 발자레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리크가 떼를 써도, 욕을 퍼부어도, 억지를 부려도 늘 익살스러운 태도를 바꾸지 않았던 악마의 얼굴이 실망과 낙담으로 물들었다.
“하아, 정말인 모양이로군. 완전히 움츠러들었어.”
“무, 무슨 헛소리야! 나는 그냥, 좀 더 완벽한 계획을 위해서!”
“이보게 친구, 내가 왜 자네를 선택한 줄 아나?”
발자레스가 자신을 선택한 이유?
갑작스러운 질문에, 마리크는 얼이 빠진 채로 대답하지 못했다.
딱히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단순히 ‘능력’만으로 따지면, 너보다 나은 녀석은 얼마든지 있었어. 막말로 강습소에 있는 이들 중 아무나 골라잡아서 내 능력을 빌려줬어도, 너보다는 훨씬 더 잘 썼겠지.”
“성격은 또 어때? 훨씬 더 내게 순종적이고, 떽떽 시끄럽게 굴지 않고, 괜히 나대다가 위험한 일을 자초하지 않고 얌전히 굴 놈들은 얼마든지 있었단 말이야.”
“그래도 나는 너를 선택했지. 그 이유가 뭔지 알아?”
툭, 하고.
발자레스가 마리크의 코앞까지 얼굴을 내밀었다.
평소에는 광대처럼 웃음을 품고 있던 얼굴이, 정색한 상태로 마리크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건 네가, 불량식품이라서 그래.”
마리크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발자레스의 말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되뇌어도 이해가 가지 않아, 그 의문을 입 밖으로 내밀었다.
“불량, 식품?”
“고결한 영혼, 의지가 강한 영혼, 순수한 영혼. 악마에게 있어서 값지고 귀한 것들은 바로 그런 영혼들이지. 값비싼 코스 요리라고 할까? 대표적으로 너를 쓰러트린 그 계집이 딱 그런 느낌이야. 그런데, 세상을 살다 보면 가끔은 불량식품도 좀 먹어보고 싶어지거든?”
그런 의미에서 마리크는 실로 이상적이라고 할 만했다.
추악하고, 게으르고, 이기적이고, 어리석다.
그릇은 작은 주제에 욕망은 비대하고, 노력은 싫어하는 주제에 주변에서 떠받들어주기를 원한다.
악마라는 존재가 나타나 여러 달콤한 말로 꼬드기는데, 이를 의심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런 너였기에 선택했고, 그런 너였기에 응원했지. 적당히 부추기기만 하면 본인을 파멸시킬 선택지에도 아무런 의심 없이 쑥 하고 뛰어들 테니까.”
자기 꼬리를 쫓으며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고양이를 보며 사람들이 웃듯이, 어떤 종류의 어리석음은 보는 것만으로 관객을 즐겁게 한다.
그렇기에 발자레스는 마리크가 아무리 억지를 쓰고 자기를 모욕해도 개의치 않았다.
그조차 광대극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랬는데.
“두려움을 알고 자제한다? 상대가 무서우니까 몸을 사린다? 오, 친구. 이봐 나를 실망하게 하지 마.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현명해졌지? 네 역할은 등 뒤를 툭 하고 밀면 앞뒤 구분 못 하는 망나니처럼 돌진하는 거라고!”
친구라고 말하면서도, 발자레스의 말에는 그 어떤 경의도 우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제야, 마리크는 그가 단 한 번도 자기를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애초에 기억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이.
“이, 이런 개자식이이이이이!! 감히 누굴 가지고 놀아!?”
마리크는 발자레스를 뒤로 밀친 뒤, 충동적으로 지팡이를 뽑아 발자레스에게 겨누었다.
그 끝에서 생겨난 화염의 검이 발자레스를 향해 발사되었고.
푸욱!
그대로 궤도를 돌려, 마리크 자신의 머리에 꽂혔다.
치이이익, 하고 피와 살이, 그리고 뇌수가 불타며 끓는 소리.
축 늘어진 혓바닥과 빙글빙글 통제를 잃은 채 기괴하게 회전하는 두 눈.
끔찍한 광경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발자레스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것만으로도 불꽃의 검이 소멸하고, 꿰뚫렸던 상처 역시 그대로 사라졌다.
허나, 혓바닥과 두 눈알은 여전했기에 그 기괴함이 한층 더 돋보였다.
“좋아, 그러면 이렇게 하자고. 친구. 죽이는 건 싫은 것 같으니, 너는 지금부터 그 에리스라는 계집을 궁지에 몰아넣는 거야. 그야말로 처참하게, 생명의 위기를 느낄 정도로. 그리고 그런 에리스에게 내가 다가가 속삭이는 거지. 죽고 싶지 않다면 나와 계약을 하자, 그렇게. 그러면 그녀는 살 수 있고, 나는 새 계약자를 얻어 천공 학원으로 갈 수 있지. 겸사겸사 친구 너도 복수를 할 수 있고. 멋지지? 모두가 득을 보는 계책이야!”
친구 사이에 감사 인사는 필요 없으니 고마워하지는 말라며, 발자레스는 낄낄댔다.
마리크는 변함없이 기괴하게 뒤틀린 얼굴로 침묵하고 있었다.
그제야 마리크의 상태를 눈치챈 듯이, 발자레스는 “오.”하고 추임새를 내뱉더니.
그대로 손가락을 뻗어 마리크의 눈에 쑤셔 넣었다.
찌걱, 찌걱 하고 불쾌한 소리가 울려 퍼진 뒤, 마리크의 눈이 제자리를 되찾았다.
혓바닥 역시 밖으로 삐져나온 만큼을 스윽 하고 잘라내자, 마침내 그 입이 온전하게 닫혔다.
한복판에 구멍이 뚫린 안구와 제 기능을 못 할 만큼 짧아진 혀를 만족스레 바라본 발자레스는,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이번에야말로 마리크의 얼굴이 완벽하게 온전한 상태로 되돌아왔다.
“때로는 불필요한 과정을 거치는 것 또한 삶에 풍요를 더해주는 법이지.”
그리 말한 뒤, 본인의 말에 만족한 듯이 발자레스는 폭소했다.
악마의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