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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사서 에른스트(Ernst) (8) - 산책 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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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과 라페르가 처음 대결을 시작했을 때, 제자들의 생각은 대개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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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로 발끈해서 힘을 휘두르는 건 품위가 없는 행동이다. 하지만 이렇게나 심각한 모욕을 들어놓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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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페르 녀석의 젊은 혈기가 이럴 때는 도움이 되는군. 우리라면 몰라도 녀석이 나서면 형 동생뻘이란 걸로 넘어갈 수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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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건방진 꼬맹이의 기를 확 눌러놓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날뛰면 오히려 스승님의 반감을 살지도 모른다. 라페르 녀석 적당히 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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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씩 방향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들은 하나같이 라페르의 승리를 당연시했고, 소년이 아픈 꼴을 보는 걸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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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 제자가 선배들에게 다소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정도야 어른스럽게 넘어갈 수 있다고 치더라도, ‘실력도 형편없는 주제에 잔소리가 심하네’ 같은 태도로 나오는데 그 어떤 선배라고 한들 화가 안 나고 배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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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장에는 델피나리스가 제자들의 훈련을 위해 설치해 둔 보호 마법도 있으니, 어차피 생명이 위험한 일은 없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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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다소의 통증 정도는 느낄 수 있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라페르는 시합 개시 전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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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도 건방진 언동을 사과하고 동문 선배들을 향해 기본적인 예우를 지킨다고 맹세한다면, 여기서 끝내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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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으니까 시작하시죠? 말이 많으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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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페르의 목에 핏대가 세워지며, 그가 단숨에 지팡이를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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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르르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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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페르의 주변에 생겨난 거대한 불꽃이 이내 검의 형상으로 압축되는 모습을 보며, 다른 선배들이 눈을 살짝 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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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페르 녀석, 실력이 많이 늘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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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계 끝자락 정도인가? 저 정도면 머지않아 4위계에 도달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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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의 종류는 마법의 역사만큼이나 방대하고, 이를 알기 쉽게 구분하기 위한 분류법 역시 다양한 것이 탄생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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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중에서도 현재 대륙 내에서 자주 쓰이는 분류법은 크게 두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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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위력에 따라 나누는 방식이었고, 하나는 시전 난이도에 따라 나누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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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그리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한, 그러니까 주로 주문서 따위를 통해 마법사의 길에 들어선 이들은 전자를 선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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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자릿수를 위협할 수 있으면 하급, 두 자릿수를 위협할 수 있으면 중급, 세 자릿수를 위협할 수 있으면 상급이라는 식으로, 그 기준이 꽤나 명쾌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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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마법을 체계적으로 배운 이들일수록 저러한 위력 지상주의적 등급 부류에 거부감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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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이란 같은 주문이라고 해도 사용자의 기량이나 마력 속성, 환경에 따라 위력이 극과 극으로 변하니, 주문의 위력이라는 최종 결과만 가지고 구분하는 건 올바른 부류가 아니라는 이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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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주문에 필요한 마력 소모량, 집중력, 습득의 난해함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등급 기준표라는 걸 탄생시켰고, 이는 단순히 위력만 가지고 주문의 등급을 논하는 것보다 더 정확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정확성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주류가 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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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력 분류 체계가 더 오래 쓰였기에 그냥 관습적으로 계속 사용되는 것도 있었고, 등급 기준표 자체가 마법사들의 커뮤니티 내에서만 돌아다니는 터라 민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는다는 점도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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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 라페르가 시전한 『불의 검을 다루는 마법』은 3위계, 개중에서도 난이도가 높은 편에 속하는 주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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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 범위 자체는 비교적 좁지만, 순수한 위력은 4위계의 기사들조차 직격당하면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할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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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자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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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결을 길게 끌 생각 따위는 없다는 듯이, 라페르가 휘두른 지팡이에 따라, 불꽃의 검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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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꽤 멋지네요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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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그 검이 소년을 꿰뚫는 것보다 먼저, 소년의 눈앞에 생겨난 또 다른 불꽃의 검이 라페르의 공격을 멈춰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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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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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저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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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불꽃의 검이 서로 길항하는 모습을 보며, 관객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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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계 내에서도 최상위 난이도로 평가받는 주문을 소년이 너무나 손쉽게 사용한 것도 그러했지만, 그 위력이 라페르의 주문과 맞먹는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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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맞먹는 것조차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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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르르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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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검은 라페르의 검을 점점 먹어 치우기라도 하듯 크기를 키우더니, 라페르의 검을 단숨에 쪼개버린 뒤 그 주인에게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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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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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페르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공격을 회피한 뒤, 곧장 얼음의 화살을 생성해 소년에게 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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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순간적으로 반격에 나선 것은 그가 그저 혈기만 가득한 젊은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으나, 이번엔 상대가 나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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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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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생성한 얼음 화살들이, 라페르의 얼음 화살을 모조리 격추한 뒤 그대로 라페르에게 쇄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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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런 말도 안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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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페르는 발악하듯이 온갖 주문으로 소년을 압도하려 했지만, 소년은 그와 똑같은 주문을 더 강한 위력으로 사용해 라페르를 압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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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궁지에 몰리던 라페르는 마침내 지팡이를 떨어트렸고, 소년은 그의 배와 목에 연달아 마력탄을 때려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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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라페르의 모습을 확인한 뒤, 소년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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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은 이걸로 끝인가요? 잘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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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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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혹시 본인이 무언가를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비비거나 옆자리의 사람들과 시선을 교환했지만, 그런다고 해도 이미 일어난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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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에게 들어오기 전, 바깥에서 어느 정도 마법 실력을 쌓고 오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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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페르의 실력은 제자 전체 중에서 따진다면 중위권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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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소년이 평범하게 라페르를 상대로 승리했다고 한다면, 제자들은 놀라워했을지언정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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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단순하게 이기는 것과, 상대의 특기 마법을 즉석에서 카피해 더 강한 위력으로 압도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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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놀면서 이겼다는 뜻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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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저한테 새로운 가르침을 주실 선배님은 안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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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선언에 제자들 중 몇몇이 울컥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개중 쉽게 나서는 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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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페르보다 실력이 부족하거나 크게 차이가 없는 이들은 당연히 나설 자신이 없었고, 반대로 확실히 라페르와 격차가 있을 만큼 강한 이들은 대부분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기에 이런 상황에 나서는 것 자체가 껄끄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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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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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면 당연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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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기거나 치열하게 싸우기만 해도 막내와 동급이니 어른답지 못하니 하는 소리를 들을 판에 어찌 쉽게 나서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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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한 명만은 예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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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중에는 저 소년 또래이면서 제자들 중에서도 상위권의 실력을 지닌 인물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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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서 몰려드는 시선을, 에리스 역시 모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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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각오를 품고 입을 열려고 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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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그쯤 해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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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델피나리스가, 앞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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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조용히 대련장 한구석에 쓰러진 라페르에게 다가가, 은은한 빛이 어린 손으로 그의 배와 머리를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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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컥, 쿨럭!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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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되찾은 라페르를 몇 차례 다독인 뒤, 델피나리스는 다소 엄격한 표정으로 소년, 마리크 그림룬을 질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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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겨룰 수도 있다. 서로 다툴 수도 있지. 허나 시합이 끝난 후 쓰러진 상대를 방치하고 곧장 다음 상대를 찾는 것은 대체 어디서 배운 예의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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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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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크는 순간 눈을 찡그렸지만, 이내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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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들떴던 것 같습니다. 동경하는 선배님들에게 배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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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나리스의 눈이 마리크의 정수리를 지긋이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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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쇠한 대마법사의 눈에, 여러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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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델피나리스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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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들에게 무례한 태도를 보인 것을 사죄하거라. 그리고 너희들도, 막내에게 너무 모질게 굴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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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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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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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은 양쪽에서 돌아왔으나, 어느 쪽도 진심이 아닌 것은 명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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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는 눈을 험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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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해결될 리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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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크의 사죄는 껍데기뿐이고, 다른 제자들의 반감도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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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태로 유야무야 흘려보내도,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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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 그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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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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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는 아직 어떤 본론도 꺼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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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이, 델피나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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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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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반론하려던 에리스였지만, 델피나리스의 눈을 보고는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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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눈으로 저를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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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을 꾸짖는 분노였다면 이해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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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좀 도와달라는 부탁이었어도 이해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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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델피나리스의 눈에 담긴 건 어느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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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스승은, 걱정과 우려만을 그 눈에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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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한 에리스의 두뇌는, 스승의 눈에 담긴 감정의 의미를 정확하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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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깨닫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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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의 스승은, 그녀와 마리크가 격돌한다면 에리스가 패배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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꽉 움켜쥔 에리스의 주먹이 덜덜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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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본인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그녀 본인조차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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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해요, 몸이 좀 안 좋아서, 오늘은 먼저 돌아가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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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일방적으로 선고한 채, 에리스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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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서 당황하거나 만류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를 억지로 붙잡거나 쫓아오는 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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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도망치듯 움직이기를 얼마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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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저택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떨어진 그녀는, 적당한 바위 위에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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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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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할 정도의 자괴감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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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에게 인정받겠노라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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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새로운 제자인지 뭔지를 압도해서, 자기야말로 진짜라고 증명해 주겠노라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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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그게 전부 에리스 혼자만의 생각이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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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은 그녀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고, 일찌감치 그녀를 단념한 뒤 다른 대체품을 찾고 있던 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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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스승이 바라던 ‘진짜 천재’가 나타났고, 어중간한 수재일 뿐인 에리스는 필요가 없어진 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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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폭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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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하게나마 남은 이성이 모든 걸 그렇게 나쁜 식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지적했지만, 흘러넘치는 감정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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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기대하고, 혼자 노력하고, 혼자 승부욕을 불태우고, 혼자 도망치고, 혼자 비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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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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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마나 한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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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 얼마나 비웃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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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야, 완전히 광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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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입에서 새어 나온 한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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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우등생의 가면을 쓰고 있었던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온 약한 소리는, 그대로 누구에게도 닿는 일 없이 허공으로 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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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그건 두고 봐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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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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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에리스는, 멍하니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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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도서실의 인공적인 조명 아래서만 빛나던 금발이 야외의 바람을 받아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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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은 언제나 그렇듯 제대로 각이 잡히지 않은 채 흐트러져 있었으며, 몸에서는 먼지와 잉크의 냄새가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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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객업에는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눈매와 웃음기라고는 없는 얼굴이, 속내를 알 수 없는 감정을 품은 채 에리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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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는 얼이 빠진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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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여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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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입니다. 매번 앉아서 책만 읽고 있으면 몸이 상하니, 가끔은 운동을 해줘야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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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지껄인 사서는, 충혈된 에리스의 눈을 보고는 툭 하고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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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함께 걸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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