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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사서 에른스트(Ernst) (3) - 차근차근
에리스가 ‘책’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명확했다.
그 책에 적혀 있는 지식이 얼마나 실용적인가. 그저 그것뿐.
가장 으뜸으로 치는 것은 마법에 관련된 지식이지만, 꼭 마법 관련 내용이 아니라도 그 지식이 실용적이라면 기피하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녀의 기준에서 ‘실용적이지 못한’ 책은 매우 싫어했다.
머릿속이 꽃밭인 귀족 영애들이 연애 소설을 읽으며 꺄악꺄악 거리는 걸 이해하지 못했고, 이성보다 본능으로 행동하는 귀족 남아들이 기사 소설이 어쩌고 영웅담이 어쩌고 하는 모습을 보며 혐오감마저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이야기들은 현실이 아니다.
모든 게 공상이자 허구이며, 그런 걸 읽는다고 해서 마법 실력이 늘어나지도, 현실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굳이 도움이 되는 분야를 찾는다면 다른 학생들과 대화할 화젯거리 정도인데, 이건 에리스에게는 하등 쓸모가 없는 가치였다.
그녀가 강습소의 다른 학생들을 상대로 날을 세우지 않는 건 그저 우등생이라는 평가를 놓치지 않고, 천공 아카데미에 진학할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다.
거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대인 관계만 유지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고, 그러니 굳이 그들의 취향에 맞춰주기 위해 내키지도 않는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랬었는데, 어쩌다, 이런 걸…!”
기숙사에 돌아온 에리스는 사서에게 넘겨받은 책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내려다보았다.
조난 어쩌고로 시작하는, 굳이 입으로 읽고 싶지도 않을 만큼 긴 제목을 지닌 ‘엉터리 같은 책’.
평소 에리스의 독서 취향과는 백만 광년 정도 떨어진 물건이지만, 그렇다고 읽지 않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 사서가 다음 문제는 이 책의 내용으로 낸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본래라면 도서관의 일개 사서 따위가 뭐라고 말하든 코웃음 칠 에리스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그때 도서관 2층에서 느껴진 마력은 한두 개가 아니었어. 그것들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마법이라는 분야에 있어서, 에리스는 향상심이 강하다.
거의 집착이라고 해도 좋다.
안 그래도 최근 강습소에서의 느슨한 나날 탓에 실력이 답보 상태인 게 느껴지는 상황.
눈앞에 더욱 높은 경지로 오를 수 있는 실마리가 나타났는데, 이를 외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힘으로 빼앗는 것 역시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아끼는 수제자가 도서관의 사서 상대로 폭력을 휘둘러 책을 빼앗았다고 하면 경애하는 스승은 슬퍼할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스승의 명성에 먹칠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에리스 자신이 본인을 용서할 수 없게 될 터.
“후우.”
그래, 이건 쓸모없는 행동이 아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긴 길을 걸어야 하는 것처럼, 이 역시 마도서를 얻기 위한 중간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모 대악마가 보았다면 ‘얘는 겨우 책 하나 읽는데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라고 생각할 자기 합리화를 끝낸 뒤, 에리스는 혐오스러운 책에 손을 뻗었다.
다행히 단순 암기는 그녀의 특기였다.
책의 내용은 굳이 이해하지 않고, 그냥 활자 그 자체를 머리에 저장한다는 느낌으로 읽는다면 그리 오래 걸릴 것도 없었다.
“30분이면 충분해.”
그리고 대략 3시간 정도가 흘렀다.
“흠, 전부 정답입니다. 제대로 읽으신 모양이로군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금발의 사서가 건넨 말에, 에리스는 도도한 태도로 대답했다.
“수준 높은 마도서와 비교하면 이런 건 고작해야 애들 장난이죠. 세세하게 재본 건 아니지만, 다 읽는 데 10분도 안 걸렸던 것 같네요.”
“그렇군요. 아, 이런, 다시 보니 이 부분의 답변이 조금 틀린 것 같습니다만? 주인공이 그 동료를 구출하는 과정 말입니다.”
“뭐? 그럴 리가 없어요! 제가 그 부분을 몇 번을 다시 읽었….”
에리스의 말꼬리가 급격하게 흐려졌다.
녹색의 눈동자를 파르르 떠는 그녀를 방치한 채, 사서는 에리스가 반납한 책의 페이지를 넘겨 특정 부분을 확인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말씀하신 대로군요. 죄송합니다.”
에리스는 침묵했다.
사서가 만약 비웃음을 보이거나 놀리는 태도를 보이기라도 하면 차라리 화라도 냈겠지만, 지극히 무덤덤한 얼굴로 담담히 본인 할 일만 하니 그조차도 불가능했다.
분명 사죄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패배한 것 같은 굴욕감에 에리스가 몸을 떠는 도중, 사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책을 꺼내 에리스에게 내밀었다.
단, 이번에는 두 권짜리였다.
[수 속성 마법과 얼음 속성 마법의 상관관계에 대한 고찰]
[수 속성 마법과 얼음 속성 마법의 상관관계에 대한 고찰 –해례본–]
“…이번에도 마도서는 아니네요.”
에리스의 얼굴에 노골적인 불만과 실망이 드러났다.
마법에 관한 책은 크게 나눠 세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주문서’라 불리는, 특정 주문의 사용법이 적혀 있는 책.
마력을 어떻게 운용하고 어떤 타이밍에 얼마만큼 부여하면 어떤 효과가 나오는지가 설명되어 있고, 그 과정을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주문을 사용할 수 있다.
흔히 ‘야생 마법사’ ‘독학 마법사’라고 불리는 이들이 바로 이런 식으로 마법에 발을 들이는데, 에리스처럼 ‘체계적인’ 마법을 배운 이들은 저런 이들을 제대로 된 마법사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해하기 어렵다면 요리 레시피를 생각하면 된다.
특정 레시피를 그저 따라 할 뿐인, 해당 레시피 외에는 아무런 요리도 만들 수 없는 이를 제대로 된 ‘요리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주문서만으로 마법을 배운 마법사들은 대개 본인이 사용하는 주문이 어떤 구조인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그렇기에 높은 경지에 오르지 못한다.
두 번째는 ‘이론서’로 불리는, 마법 그 자체에 대한 분석과 고찰이 담겨 있는 책.
그저 정해진 과정을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되는 주문서에 비해 훨씬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내용이 담겨 있으며, 그만큼 이해하기가 어렵다.
허나 마법사로서 진정 높은 경지에 오르고자 하면 이런 이론서에 대한 탐구가 필수적이다.
5위계 이상의 고위 마법사 중에는 이론서로 마법을 배운 이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고, 주문서만으로 같은 경지에 오른 이는 한 줌에 불과하니까.
세 번째는 ‘마도서’로 불리는, 책 그 자체가 마법적인 힘을 품고 있는 책.
내용 자체는 주문서나 이론서이지만 그 내용이 훼손되지 않도록 보존 주문이 걸린 것으로부터, 그저 책을 읽은 것만으로 특정한 주문을 습득하게 해주는 것, 일종의 보조 장치처럼 주인의 마력을 강화해 주는 것 등 품고 있는 힘의 종류는 실로 다종다양해, 마법 관련 책 중에서도 유달리 값어치가 높다.
이 중 에리스가 본래 이 도서관에서 노린 것은 세 번째 마도서에 속했다.
만약 마법사의 능력을 강화해 주는 마도서가 있다면 대박 중의 대박이고, 설령 그 내용이 단순한 주문서나 이론서라고 해도 보존 마법까지 걸어가며 남겨둔 책에 적힌 거라면 그 가치가 높을 가능성이 컸으니까.
그에 반해 지금 사서가 건네준 건 평범한 이론서.
물론 이건 이것대로 유용하고 중요한 책이긴 하지만, 이미 2층에 마도서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 에리스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부족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책의 진가는 읽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런 에리스의 속내를 꿰뚫기라도 한 듯이, 사서가 말했다.
푸념하기 전에 일단 읽어보기나 하라는 듯한 그 태도에, 에리스는 살짝 퉁명스러운 태도로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수 속성 마법과 얼음 속성 마법의 상관관계에 대한 고찰]은 에리스가 자주 접해본, 일반적인 이론서였다.
그러니까, 빌어먹게 복잡하고 알기 어려운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는 뜻이다.
‘…뭐, 나쁘지는 않네.’
독자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활자 뭉치였지만, 담겨 있는 내용 자체는 충분히 유용한 것이었다.
이를 온전히 해석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면 제법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 작업이 끝나고 나면 마법 실력은 오를 터.
마도서에 정신이 팔려 있으니 불만족스럽게 느껴질 뿐이고, 이 책 자체도 평소에 접했다면 충분히 눈을 빛낼만한 물건이었다.
제자리에서 가볍게 독파할 만한 내용이 아니라 여긴 에리스는 일단 책을 덮은 뒤, 해례본이라 적힌 또 하나의 책에 손을 뻗었다.
꽤 낡고 오래된 분위기를 풍기는 원본에 비해, 이쪽은 그 상태가 무척이나 새것 같았다.
다만, 에리스는 이쪽 책에 그리 큰 기대를 품지는 않았다.
복잡한 원서를 쉽게 풀어쓰려다가 오히려 원서의 내용이 훼손, 변질되는 일은 흔하디흔했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차라리 보지 않은 것만 못한 형편 없는 해석이 적힌 내용도 있을 정도였다.
어디 한번 뭐라고 쓰여 있는지 보기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그녀는 페이지를 넘겼다.
펄럭.
페이지를 또 넘겼다.
펄럭.
페이지를 다시 넘겼다.
펄럭.
페이지가 계속해서 넘어가면 갈수록, 에리스의 얼굴은 점점 망연하게 변해갔다.
그녀는 무심코 입 밖으로 소리를 내 중얼거렸다.
“뭐야 이거.”
에리스가 알고 있는 해례본이란 기본적으로 원본의 ‘사족’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원본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쓴 건 물론이고, 원본에서 다소 애매하게 넘어가거나 빼먹은 부분을 아예 새로 채워 넣고 있었다.
학생이 조잡하게 적어낸 논문을, 교수가 읽어본 뒤에 더 풍부한 지식과 더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재구성한 것 같은 물건.
에리스는 다급하게 책의 저자를 살펴보았다.
원서의 저자는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 그 나름대로 이름을 알린 5위계 마법사였고, 해례본의 저자는 공백으로 남겨져 있었다.
“어쩌시겠습니까. 책을 바꿔드립니까?”
지극히 사무적이고 무덤덤한 어조로, 사서가 입을 열었다.
에리스의 안색이 다채롭게 바뀌는 걸 눈앞에서 보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에리스는 잠시 눈을 찌푸린 뒤, 이내 분한 듯이 말했다.
“아뇨, 이 책으로 좋아요. 단지, 2층엔 ‘이런 게’ 더 있나요?”
“그건 찾아보지 않으면 모르겠군요. 그래도 뭐, 해석본이 함께 있는 쪽이 편하시다면야 가능한 그쪽으로 구해드릴 순 있습니다.”
다만, 하고 사서는 덧붙였다.
“어디까지나 퀴즈를 맞히신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입니다만.”
“…다음 퀴즈는 지금 이 두 권에서 나오는 건가요?”
“아뇨, 이 책에서 낼 겁니다.”
그리 말하며, 사서는 또 다른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이번에도 에리스의 취향과는 거리가 먼 실용성 없는 소설이었다.
에리스의 얼굴이 찡그러졌다.
“저한테 그런 쓸모없는 이야기를 읽게 해서, 당신한테 대체 무슨 이득이 있는 거죠?”
“모르십니까? 재미있는 책이란 본인만 읽고 즐기는 게 아니라, 남에게도 권하고 싶은 마력을 품고 있습니다. 전 그저 그 마력에 취했을 뿐이지요.”
“당신은 재미있을지 몰라도 저는 조금도 재미가 없어요. 싫어하는 걸 강요해서 뭐가 즐거운지 모르겠네요.”
“그러면 안 읽으시면 됩니다.”
자기는 아쉬울 것 하나 없다는 태도에, 에리스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분하지만, 매우 분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아쉬운 쪽이었다.
에리스는 거의 상대를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사서를 노려보며, 그가 내민 책을 넘겨받았다.
“기대할만한 보상을 내놓지 않는다면, 그땐 각오하는 게 좋을 거예요. 성격 더러운 사서씨.”
사서는 대답 없이,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미소라 부르기에는 무척이나 인위적이고, 동시에 사악한 무언가였다.
다시금 상대에 대한 호감도가 바닥으로 처박히는 걸 느끼며, 에리스는 도서관을 떠나갔다.
“에리스 양. 조금 피곤해 보이시는데 괜찮으신가요?”
한 여학생의 질문에, 에리스는 괜찮다는 듯이 우아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새로운 책을 손에 넣어서, 몰두하다 보니 무심코.”
“아아, 이번에도 새 이론서인가요? 저는 교재용으로 나온 기초 서적만 봐도 머리가 아픈데, 정말 굉장하세요!”
“예, 뭐.”
부드러우면서도 청초한 웃는 얼굴 속에서, 에리스는 내심 뜨끔한 심정을 억눌렀다.
이론서 말고 소설을 읽다가 밤을 새워버린 사실은 절대로 들키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그녀는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 읽은 것뿐이지만,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오해할 수 있으니까.
그저 그게 전부였다.
아무튼 그랬다.
주변 학생들이 보는 에리스 입니다!
환바림님께서 그려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