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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음악가 하멜(Hamel) (5) - 약속 체결과 약속 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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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통해 하멜과 히스티아의 만남을 지켜보던 루시드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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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지금 저거 뭔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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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고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네만, 질문이라는 ‘저거’라든가 ‘이거’ 같은 애매한 표현을 쓰는 건 그리 좋은 화법이 아니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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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러니까, 저 아버지 어쩌고 하는 소리는 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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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가 사용하는 분신 주문의 본래 주인은 루시드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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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그녀가 알기에, 분신이란 말 그대로 또 다른 몸을 만들어내는 행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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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격으로 조정한다는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본인의 팔다리를 다루는 것과 크게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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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을 이것저것 개조하더니, 이젠 아예 별개 인격을 창조하는 경지에 도달하기라도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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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라니, 과장이 심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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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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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라는 배우가 B라는 역할에 아주 깊게 몰두했다고 하세. 본래 자신이 A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게 막연한 기억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을 만큼 B라는 배역에 심취했다고 가정해 보잔 말일세. 자네의 이야기는 이걸 A가 B를 창조했노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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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저 아버지가 어쩌고 형제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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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이라는 음악가가 나라고 하는 본체와 다른 분신들, 그리고 자신의 관계를 그렇게 정의한 것뿐이지. 메타적인 표현을 즐겨하는 건 그냥 성격 문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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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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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도 황태자는 TRPG의 캐릭터가 어쩌고 플레이어가 어쩌고 하며 설명을 계속했지만, 루시드라가 듣기에 그리 와닿는 설명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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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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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이랑 배우의 구분이 희미해질 정도의 몰입과 연기를, 여기에 본체가 멀쩡히 생각하고 활동하는 상황에서 한다는 게 가능하긴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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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 베른 때 연기 더럽게 못한다고 신나게 깠던 루시드라가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새로운 분신이 나오면 나올수록 황태자의 정신 구조가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실로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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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뭐, 이 인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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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면 말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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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황태자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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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특수 카테고리를 상대로 ‘정석’을 말하는 것만큼 허무한 일도 없다며, 루시드라는 납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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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하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던 자기소개가 끝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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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과 히스티아 두 사람은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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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고통으로 혼절한 채 쓰러져 있는 불량배들도 문제였지만, 이리저리 얻어맞은 하멜의 몸 상태도 썩 좋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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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티아는 약간의 망설임 후, 하멜을 데리고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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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의 거점은 도시 여기저기에 존재하지만, 개중 ‘헤카테’가 아니라 ‘히스티아’로서 이용할 수 있는 곳은 얼마 없었기에 택한 차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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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하멜이 입은 상처 중 심각한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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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가 조금 찢어지고, 여기저기에 다소 멍이 생긴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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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물질적으로는 제법 큰 손해가 있었는데, 하멜이 지니고 있던 피리가 망가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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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거참. 야무지게도 짓밟아놨군요. 어떻게 고치지도 못하겠습니다,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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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배가 바닥에 내팽개치고 짓밟은 흔적이 역력한 피리를 보며, 히스티아의 얼굴과 눈매가 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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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하멜의 연주 소리에 지닌 관심과 호의는 거의 집착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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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소중한 피리를 하찮은 시정잡배 놈들이 망가트렸다고 하니, 차마 분노를 억제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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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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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숨통을 끊어 놨어야 했다고 그녀가 후회하고 있자니, 그런 히스티아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하멜이 갑작스레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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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통해 주변 지형을 내려다보던 그는, 이내 원하던 걸 찾아낸 듯이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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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티아 양. 혹시 잠시만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그리고 혹시 피리 말고 다른 악기도 좋아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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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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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히스티아는 솔직히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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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겠네요. 솔직히 아는 게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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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뭐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습니다. 제가 첫인상을 결정할 수 있다는 뜻 아닙니까? 오히려 의욕이 생기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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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으로 떠벌떠벌 떠든 후, 하멜은 그대로 휙 하니 방을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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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히스티아는 멍하니 굳어 있다가, 이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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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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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가까워질 수 없다고, 그저 멀리서 그의 연주를 듣는 것만으로 만족한다고, 그렇게 포기한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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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정작 그렇게 모든 걸 내려놓고 나니,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그와 가까워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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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운명의 인도라고 한다면, 아무리 그래도 장난이 심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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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방에서, 이 모든 게 환상은 아니었을까 고민하고 있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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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감상으로는 대략 10분 정도가 흐른 뒤, 하멜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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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점주하고 가격 교섭을 하는 데 제법 시간이 걸린 터라. 본래는 이것저것 사서 골고루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이거 하나를 고르니 지갑이 파산을 외쳐버렸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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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말하며 하멜이 들어 올린 것은 그의 상징 같았던 피리가 아닌, 검은 광택의 바이올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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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긁히고 색이 바래 빈말로도 멀끔하다고는 하기 어려운 그것을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중히 끌어안은 하멜은, 그녀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대로 연주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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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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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티아는 무심코 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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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연주를 들은 적은 몇 번이나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것도 피리가 아닌 다른 악기가 자아내는 선율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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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거친 물결이었고, 바람에 흩날리는 들풀이었으며, 맹렬한 화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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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의 연주자가, 오직 한 명의 관객에게 선사하는 일인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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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려 퍼지던 음이 멈추고, 하멜이 무대 위의 배우처럼 관객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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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습니다. 훨씬 좋은 얼굴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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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말의 의도를 알지 못했던 히스티아였으나, 이내 자신의 안에 있던 질척하고 어두운 살의가 지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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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표정을 본 하멜이, 급하게 연주회를 준비한 이유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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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바라보며 유쾌하다는 듯이 웃는 그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 어쩐지 멋쩍어, 히스티아는 화제를 돌리듯이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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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 외에, 다른 악기도 다룰 수 있었던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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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캐스터네츠, 뭐든 적당히 다룰 줄 알지요. 정작 가진 악기는 별로 없습니다만! 이 악기라는 게 원체 비싼 물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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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악기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려다가 그대로 황금 고블린 꼴이 될 뻔했다며, 하멜은 껄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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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자학적으로도 들릴 수 있는 말이 우울하지 않은 것은, 그가 지닌 성품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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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다면 사 줄 수도 있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히스티아였지만, 어떻게든 억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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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통해 자신을 휘두르려 하는 것을 그가 불쾌해한다는 걸 이미 경험해 본 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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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답례를 해야 할 텐데, 가진 거라고는 이 비루한 몸뚱이와 비루하진 않은 음악 실력뿐이로군요. 혹시 바라시는 게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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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들은 연주로도 충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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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 음악을 헐값에 팔아넘길 생각이 없지만, 그렇다고 바가지를 씌울 생각도 없습니다. 들어줄 수 있을지 어떨지는 내용 나름이지만, 적어도 제시 정도는 해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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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 ‘뭐든지 가능하진 않다’라며 선을 긋는 모습은 제법 뻔뻔했으나, 어째서인지 그것이 불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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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쪽에서 미리 선을 보여준 덕분에, 히스티아 역시 조금은 부담을 덜어낸 채 입을 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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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저의 말 상대가 되어 줄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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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 연주를 해달라는 게 아니라 그쪽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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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것도 생각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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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멜 본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연주는 그리 값싸지 않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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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연주를 듣는 것보다 하멜의 이야기를 듣는 쪽이 같은 가치로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히스티아는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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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습니다. 그렇다면 일주일에 하루 정도 시간을 내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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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시간을 빼앗는 거니 보수 정도는 지불할 수 있어요. …물론, 불쾌하다면 취소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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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불쾌한 것까진 아닙니다만, 그 경우 관계가 다소 지저분해질 것 같긴 하군요. 말벗이라고는 해도 친구는 친구. 돈이 엮여 들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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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이렇게 하자며, 하멜은 손뼉을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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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먹거리 정도를 부탁하지요. 원래 적절한 먹거리는 이야기의 윤활유가 되는 법이니까요. 겸사겸사 가난하고 가련한 악사 놈의 뱃가죽도 구원할 수 있고 말이죠.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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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당황스러운 제안이긴 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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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습니다. 5일 뒤에 분수대 앞. 지금 이 시간에 다시 보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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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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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다음에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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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바람처럼, 혹은 아지랑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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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이나 홀가분한 태도로, 하멜은 집을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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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을 테니 좀 더 쉬라고 말릴 새도 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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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떠나간 문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히스티아는, 털썩하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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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상당히 피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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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적으로 크게 뭔가 한 것은 없으니, 정신적으로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여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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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성과는 있었으니, 이대로 기분 좋게 잠이나 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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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생각하던 히스티아는, 문득 뭔가를 까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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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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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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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조직의 일이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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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 안에 계십니까? 보스? 혹시 무슨 일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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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들려오는 평소보다 격한 노크와 우려에 찬 목소리를 듣고, 히스티아는 평소에 잘 흘리지 않는 식은땀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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