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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화 음악가 하멜(Hamel) (3) - 연주 한 곡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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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에서 의외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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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바로 매력적인 미녀가 술을 권했을 때 그걸 가차 없이 차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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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차버린다’에 약간의 거절이나 뜸 들이기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 정도는 밀당의 범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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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하다못해 추후 어디에서 만나자는 약속 하나 없이 그대로 등을 돌려 떠나버리는 건 이야기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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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따위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걸 대놓고 보여주는 행동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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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을 권유한 입장에서는 이토록 무안한 일이 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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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이 찾아온 바에서 서로가 눈치만 보는 도중, ‘안개 낀 술잔’의 오너 라이튼은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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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 새끼야! 이 미친 새끼야!! 그따위로 판을 깨버리면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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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격한 좆됨을 감지하고, 라이튼의 셔츠가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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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는 무려 조직의 대간부와 선이 닿은 걸로 추정되는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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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여인의 체면에 먹칠을 해버렸으니, 그 뒷감당을 어찌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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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모르는 길거리 악사 하나가 바다에 가라앉는 것쯤이야 그로서는 알 바가 아니지만, 자칫 그의 가게까지 거기에 휩쓸릴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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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흠. 이것 참. 역시 무지한 악사 나부랭에게는 눈앞의 꽃을 알아볼 능력조차 없는 모양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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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서로 눈치만 살피는 도중, 한 청년이 앞으로 나서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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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감부터 고급 티가 팍팍 나는 의복에 금색 손목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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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좋은 향유로 머리를 정돈하고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모습은, ‘나 잘 나가는 놈이요’라고 전력으로 어필이라도 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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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아름다운 꽃은 거친 들판이 아닌, 고귀한 화단에서 피어나는 법입니다. 부디 저에게 꽃을 모실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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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을 향해 우아하게 손을 내미는 청년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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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자든 일단 자신과 마주하고 나면 마음이 혹하지 않을 리 없다는 자부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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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가 기대하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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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냥 대답 자체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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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 부는 사내가 떠난 뒤로 줄곧, 여인의 시선은 오직 그가 있던 자리만을 빤히 응시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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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허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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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권유가 무시당한 모양새가 되자, 청년의 얼굴이 자못 볼만하게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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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헛기침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보려 한들, 붉어진 얼굴과 미세하게 떨리는 눈썹까지는 어쩔 수 없는 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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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제가 마음이 급해서 자기소개조차 하지 않았군요. 저는 렌스턴 몬태규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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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태규라는 성씨에, 바에 있던 술꾼들 사이로 가벼운 놀라움이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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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깃발을 들고 일어난 백성들이 왕도 귀족도 모조리 처형해 버렸다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공화국에는 제법 많은 귀족들이 살아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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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왕정 수호를 외치며 백성들과 척을 졌던 이들은 시민들의 거대한 분노에 쓸려나가 버렸지만, 혁명 직후의 혼란기 동안 눈에 띄지 않고 숨어 있었거나, 시류에 재빨리 영합한 이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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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태규 가문은 이 중 후자에 속하는 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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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혁명 정부의 토지 개혁이 본격화되기 전 보유하고 있던 땅을 팔아 숙청을 회피했고, 그렇게 얻어낸 자금으로 사업에 뛰어들어 지금은 북부 내에서도 제법 알아주는 방직 공장의 주인이 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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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스턴이 뒤로 밀려나면 본인들이 나설 생각이었던 다른 청년들이 내심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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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한 혈통에 막대한 부까지 지닌 그가 손을 내밀었으니, 아무리 도도한 여인이라고 한들 이를 무시하지는 못하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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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여인의 호박빛 외눈이 처음으로 렌스턴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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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신비롭고, 우수에 젖은 듯한 눈동자를 마주하고, 렌스턴은 무심코 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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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여성 편력을 자랑하며 온갖 여자들을 만나온 그였지만, 여인이 품고 있는 매력은 그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색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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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해요,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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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긋하면서도 처연함을 품은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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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나 매혹적이었기에, 렌스턴은 그 내용이 거절임에도 불구하고 곧장 당혹이나 분노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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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이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악사가 떠나간 길을 그대로 떠나간 뒤에야, 렌스턴은 뒤늦은 감정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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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딴 악사가 대체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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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 해봐야 길거리 악사 따위에게 질투를 느끼기에는, 그의 신분이나 지위는 너무나 고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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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그가 중얼거린 말 역시 질투보다는 안타까움의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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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아직은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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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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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네가 보기에는 내가 별로 매력이 없어 보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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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보스가 건넨 질문에, 조직의 세 대간부 중 한 명이자 무력을 담당하는 행동대장 레오는 아주 난감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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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에 꽤 자유분방한 공화국의 분위기를 생각했을 때 여성이 남성에게 저런 질문을 하는 건 일종의 유혹으로 봐야겠지만, 이 경우에 그 가능성은 없다고 해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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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레오는 유부남이었으며, 보스와 그의 나이 차는 거의 부모 자식뻘이었고, 뭣보다 지금 그와 보스는 ‘일’을 끝낸 직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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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바닥이며 보스의 옷이며 곳곳에 희생자들의 피가 범벅이 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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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아무리 자의식 과잉으로 가득 찬 인간이라고 한들 이 상황에서 연애적인 의미로 가슴이 뛰진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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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숙청이 다가왔나 싶어 공포로 가슴이 뛸 수는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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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고민하던 레오는, 이내 군인 시절 상급자에게 난감한 질문을 들었을 때와 비슷한 대응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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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보스 정도의 미인은 보기 드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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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자기가 고향에서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날이면 날마다 떠들고 다니던 근육 오징어 선임에게 맞장구를 쳤을 때랑 달리, 지금 레오가 느끼는 양심의 가책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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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딱히 근거 없는 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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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여인의 외모는 무척이나 빼어난 편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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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가린 안대와 특유의 퇴폐적이고 위험한 분위기가 없었다면, 주변 남자들이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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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렇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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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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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슬그머니 눈치를 보던 레오는, 이내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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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낀 술잔’ 쪽에서 블레이크 놈에게 하소연 같은 걸 한 모양입니다. 그날 있었던 일은 악사의 독단 행동일 뿐이고, 자기네 쪽에서는 그 어떤 지시도 개입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혹시 무언가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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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딱히 아무 문제도 없었어. 그쪽에도 괜히 겁먹어서 이상한 짓 하지 말고, 그냥 지금 하던 대로 하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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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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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짐을 받아두는 것 같은 여인의 대답에, 레오의 추측은 확신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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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거리 악사 놈이 엮인 일은 맞나 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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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여 일이 잘못될까 봐 지레 겁을 먹은 ‘안개 낀 술잔’의 오너는 그의 뒤를 봐주는 조직원에게 당시 사건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았고, 그 내용은 곧장 레오에게도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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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를 들었을 때 레오가 느낀 감정은 일종의 감탄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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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보스의 정체를 몰랐으니까 저지른 일이겠지만, 세상에 그 헤카테를 바람맞힌 인간이 있다고 하면 주변에선 대체 어떻게 반응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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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레오의 개인적 호기심과 별개로, 이는 절대로 밖에 새어 나가선 안 되는 정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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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 마녀 헤카테의, 그리고 조직 그 자체의 위신에 상처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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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보스의 심기가 불편한 것 같으면 슬쩍 양해를 구한 후 그대로 묻어버릴 생각이었지만, 지금 보스는 그렇게까지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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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들고 있던 열쇠가 눈앞의 자물쇠와는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새로운 열쇠를 준비하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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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그녀가 지니고 있는 열쇠로 자물쇠를 열 수 있기를, 레오는 충심으로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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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이 자신의 외모에 대해 주변에 질문한 건, 당연히 부하들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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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저 객관적인 평가를 요구하고 싶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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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한 사람의 반응이라면 아부라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바의 다른 남자들도 달려드는 걸로 봐선 내가 그냥 착각에 빠져 산 건 아닌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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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외모가 빼어난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도 본인이 그 사실을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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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안 꾸미고 살던 사람이 꾸미면서 인상이 달라진 경우면 모를까, 본래 모습 그대로 하고 다니면서 미남 미녀 소리 듣는 사람이 자기가 잘생기고 예쁜 줄 몰랐다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기만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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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여인은 나름 자신 있게 피리 부는 사나이에게 잔을 권했고, 그대로 가차 없이 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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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큰 망신이라고 할 상황이지만, 여인은 그에게 큰 악감정을 품거나 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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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남들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는 그에게 더욱 흥미가 커졌다는 게 정확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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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여인은 이번에는 아예 피리 부는 사나이가 무대에 오르기 전에 선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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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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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들이 아니라 직원만이 오갈 수 있는 통로에서, 여인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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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네요. 혹시 저를 잊어버린 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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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지만 누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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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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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입니다. 그리 충격받은 얼굴을 하시니 제가 다 마음이 아프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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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안이 벙벙한 여인을 향해, 사내는 커다랗고 맑은 두 눈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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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꿈을 꾸는 아이 같은 눈이라고, 여인은 무의식중에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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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 짓궂으시네요. 정말 놀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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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작은 보복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놀란 건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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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놀랐다니, 어째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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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보람찬 저녁 무대를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 예상도 못 했던 미녀가 나타난 셈이니까요. 사람이라면 놀랄만한 상황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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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화기애애하게 흘러가는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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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이번에는 수월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겠다고 여긴 여인은 청년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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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아요. 저번에는 선약이 있어서 안 된다고 했지만, 이번에는 괜찮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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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제 곧 무대에 올라가야 하는 몸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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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연주 한 번 정도 빼먹어도 오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까요. 물론 보상도 그대로 나올 테고요. 아니, 그것과는 별개로 내가 보상을 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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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이, 여인은 품속 지갑에서 금화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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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정부의 개혁 아래 종이를 위주로 한 신 화폐가 발행되며 기존의 화폐 지위를 잃어버린 금화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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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에서는 잘 받아주지도 않는 종이 화폐보다 구 왕국 시절의 화폐를 선호하는 이들은 여전히 산재해 있고, 꼭 그게 아니라 해도 금은 금이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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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여인이 내민 금화 뭉치 중 단 하나만으로도 가난한 길거리 악사에게는 황송한 가격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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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외모가 그를 혹하게 할 수 없다면, 돈으로 그의 관심을 끌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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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여인이 내린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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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그동안 살아오며 배운 세상의 법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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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굉장한 걸 바라는 게 아니에요. 그냥 이야기를 나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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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 사내의 심금을 울릴 만한 여인의 간절한 요청에, 악사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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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하겠습니다. 저의 연주를 팔기에, 그건 너무 싸구려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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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까지의 친절하고 친근하던 태도와는 사뭇 다른, 선을 긋는 것 같은 냉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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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한 여인을 뒤로한 채, 악사는 태연히 무대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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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고, 손님들의 감탄과 환호성이 뒤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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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즐거워하는 상황 중, 어두운 그늘에 홀로 남겨진 여인은 조용히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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