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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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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거지 그리츠(Gritz) (15) - 그레이스의 기원
“어젯밤 그건 뭐였을까? 지진?”
“벼락이 친 거 아니었어?”
“비도 안 내렸는데 벼락은 무슨 벼락이야. 지진이 맞다니까?”
“너흰 다 틀렸어! 내가 두 눈으로 분명히 봤다고! 달빛 아래에 거인이 있었다니까?”
“이 인간 또 술 처먹고 헛소리하네.”
“헛소리 아니라고!!”
벨라리아의 주민들은 수군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영지 전체를 강타한 굉음과 땅울림.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 빛나던 금색과 은회색의 빛을 많은 이들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붙여 점점 커졌고, 수많은 추측과 가설이 뒤얽히며 혼란을 자아냈다.
─수호신께서 승하하셨다.
그 모든 혼란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듯이, 얼마 지나지 않아 카닐리안 가문의 공식 입장이 발표되었다.
─수호신께서는 주민들의 성대한 연회에 흡족해하셨으며, 자신의 수명이 다하기 전에 ‘계승의 의식’을 치르셨다.
─어젯밤에 있었던 각종 소리와 빛은 의식의 여파이며, 의식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수호신으로 다시 태어나신 그레이스 님께서는 영민들에게 안심하고 일상을 영위하라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새로운 무녀의 공출 역시 없으리라 단언하셨다.
수호신이 세대교체를 했다는 소리에 영민들은 당황했지만, 이내 곧 카닐리안 가문의 공표를 받아들였다.
이미 축제니 뭐니 하며 충분할 만큼 조만간 무슨 일이 있으리라 낌새를 풍겼던 만큼 언젠가 일어날 일이 일어난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카닐리안 측은 영민들이 옛 신전에 접근하는 건 막았지만, 먼발치에서 현장을 바라보는 건 의도적으로 방치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주저앉은 상태에서도 높이가 수십 미터에 이르는 나무 거인의 잔해는,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주었으니까.
거인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인근 나무가 모조리 뽑혀 나갔기에 시야가 탁 트여있기도 했다.
사람들은 나무 거인을 ‘수호신의 허물’이라고 여겼으며, 이 경이로운 구조물은 영민들의 수호신 신앙을 더욱 강하게 하는 데 일조했다.
***
“…작전은 성공적입니다. 영민들은 다시 안정을 되찾았고, 농작물에 이상이 생겼다는 보고도 없습니다.”
카닐리안 저택의 집무실.
매우 공손한 태도로 보고를 올리며, 가주는 힐끔 그레이스의 눈치를 살폈다.
본인의 집무실에서 다른 이에게 하인 노릇하는 것이 자존심이 상할 법도 했지만, 가주는 그런 사소한 문제는 개의치 않았다.
수호신에 관련된 진실과 역대 가주가 저지른 이야기를 그레이스가 밝히는 순간 가주는 끝장난다.
또한 카닐리안 가문의 지배력과 정당성을 보증하는 것이 신의 핏줄을 이었다는 점이니 그레이스가 ‘전대 신’의 핏줄은 더 이상 중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그걸로도 끝장난다.
아니, 그냥 이것저것 다 떠나서 수호신으로서 계승한 힘을 얍! 하고 휘두르는 순간 가주는 억! 하고 죽어야 한다.
일족 중 몇 명이 정신 못 차리고 ‘한때 우리의 팻감에 불과했던 계집이니 잘 구슬려서 뜻대로 다루자!’라고 주장하긴 했지만, 가주는 그놈들을 그냥 전부 매달아버렸다.
복종해야 할 이유가 이토록 많은데 과거의 신분 운운하며 주도권을 쥐려고 한다니, 죽으려면 제발 혼자 죽으란 말이다.
“그건 잘된 일이네요. 혹시 농사가 영 아니다 싶었으면 정말 힘을 써야 하나 싶었는데.”
그레이스는 그리 말하며 집무실 한구석에 있는 화분에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온 은회색의 빛이 닿은 순간, 꽃봉오리만 맺혀 있던 꽃이 한순간에 만개하고, 그걸로도 모자라 아예 꽃다발처럼 증식하며 화분을 가득 메웠다.
일단 평범하게 물주고 햇볕 쬐게 한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닌 건 분명했다.
가주는 무심코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수호신이 사라지면 그레이스의 능력 역시 사라지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 적도 있었지만, 지금 저 모습으로 봤을 때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듯했다.
“그러면, 저는 가볼게요. 언제 돌아올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 크게 상관은 없죠? 어차피 전대 수호신 때도 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뭘 한 건 아니잖아요. 아, 그래도 이건 기억해 주세요.”
그레이스의 회색 눈동자가 가주를 응시했다.
본래도 빼어난 외모이긴 했지만, 몸에서 은회색의 광채를 내뿜는 지금 그녀의 모습은 정말로 신이라고 해도 될 만큼 신비롭고 경이로웠다.
“제가 아저씨랑 카닐리안을 내버려두는 건 여러분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진실을 전부 까발렸을 때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는 걸. 근데 가문의 해악이 혼란보다 더 크면, 음. 뭐 굳이 뒷말은 안 할게요.”
“며, 명심하겠습니다. 실망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바들바들 몸을 떠는 가주의 모습에, 그레이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뒤 그대로 창문 쪽을 향했다.
은회색의 신성력이 그녀의 몸을 감싼 직후, 가주가 재차 시선을 향했을 때 이미 그곳에는 그레이스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주는 그제야 겨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의 생활이 그리 평탄치 않으리라는 직감이 들긴 했지만, 이 또한 업보라고 생각하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
그레이스는 도시의 길거리를 느긋하게 걸어 나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레이스가 모습을 드러내기만 해도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였던 영민들이었지만, 지금은 호위 하나 없이 길거리 한복판을 대놓고 거니는데도 누구 하나 그녀에게 말을 걸려 하거나, 그녀를 보며 수군거리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레이스가 그곳에 있다는 것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레이스는 쓴웃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진짜 만능이네, 이거.”
신성력이란 곧 바라는 것을 이루는 힘.
하려고만 하면 몸을 강화하는 것도, 상처를 치유하는 것도, 지금처럼 존재감을 억누르는 것도 가능했다.
다만 한계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레이스가 계승한 신성은 농경신의 것이고, 그녀가 가장 힘을 잘 발휘할 수 있는 것도 농사 관련이었다.
그 외에는 신성력의 소모 효율도 나쁠뿐더러, 경우에 따라선 아예 할 수 없는 일들도 적지 않았다.
시야를 가득 메울 정도의 논밭을 기름지게 하는 것보다, 작은 횃불 크기의 불꽃을 만들어내는 게 더 어렵고 힘들다고 하면 이해가 갈까.
물론, 그레이스는 거기에 큰 불만을 느끼지는 않았다.
따지고 보면 이런 능력을 가지게 된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에 가깝다.
그리츠의 설명에 따르면 신족 이외의 존재가 사람들의 염원을 직접 힘으로 삼기 위해서는 초월자가 되어야 한다는데, 그레이스는 초월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염원을 곧바로 신성력으로 변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성의 강탈이 어쩌니, 하나의 주술적 의식이 어쩌니 하는 설명을 듣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레이스는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자신이 일종의 후천적 신족으로 변했으며, 그게 꽤 터무니없는 일이라는 정도만 자각했을 뿐.
계속해서 길을 걷기를 얼마쯤일까.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도시 외곽.
이제는 번듯하게 완성된 고아원의 새로운 건물과 마당에서 즐겁게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그레이스는 입가에 깊은 미소를 지었다.
토실토실 살이 차오른 뺨과 깨끗하고 번듯한 의복이, 아이들의 생활 여건이 전보다 훨씬 좋아졌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하기야 새로운 수호신님이 본래 이곳 출신이라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다.
누가 감히 저들을 부모 없는 아이들이라고 함부로 멸시하겠는가.
아이들을 향해 다가갈까 말까를 한참이나 고민하는 듯하던 그레이스는, 이내 그대로 몸을 돌렸다.
“뭐냐, 인사는 안 하는 거냐? 저 녀석들도 반가워할 텐데.”
그리고 그런 그녀의 눈앞에, 덩그러니 바닥에 놓인 오크통 하나가 보였다.
그레이스의 얼굴이 순간 다채롭게 변했다.
당황, 의심, 기쁨과 반가움.
가장 큰 감정은 마지막이었지만, 그녀는 그 감정을 어이없음이라는 뚜껑으로 덮은 채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은 그것보다 다른 말이 먼저 아닌가요?”
“무슨 말?”
“그야 당연히 ‘미안하다’죠! 그렇게 갑자기 사라져 버리면 어떻게 하라고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그날, 수호신과의 싸움이 끝난 뒤.
그리츠는 별다른 설명 하나 없이 그대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눈을 뜬 뒤. 바닥에 널려 있던 오크통의 잔해를 보고 얼마나 기겁했던가.
귀로 들었던 그리츠의 목소리가 퍽 여유로웠던 것과 핏자국이나 시체 같은 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승리를 점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추측과 확신 사이에는 절대 좁힐 수 없는 아득한 거리가 있었다.
“미안하긴 개뿔. 내가 어디 가든 내 맘이지. 어찌 감히 일개 수호신 따위가 거지의 자유를 침해하려 하느뇨?”
그레이스의 이마에 십자 혈관이 떠올랐다.
그녀는 말없이 다가가 오크통을 퍽하고 걷어찼다.
“아니, 이년이 이제 사람을 치네!”
“그래 쳤다! 쳤으면 어쩔래! 말이라도 미안하다고 해주면 어디 덧나기라도 해요!?”
“어어, 그만 차라! 그러다 구멍 나 이 년아! 원래 있던 게 망가져서 간신히 새로 구한 거란 말이다!”
“사람 마음에 구멍을 냈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제법 긴 실랑이가 있던 후.
그레이스는 지친 듯이 턱 하니 바닥에 주저앉아, 그대로 오크통에 등을 기댔다.
“카닐리안 가문은 일단 내버려두려고요. 여러모로 괘씸한 곳이긴 하지만, 거기가 완전히 망해버리면 또 새로운 사람이 권력자가 되겠다고 이리저리 날뛸 테니까요. 그렇게 새로 권력을 손에 넣은 사람이 전보다 나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흐흐, 네년이 마음에 드는 녀석으로 고르면 되는 일 아니냐. 그것도 아니면 직접 통치해도 되고. 전보다 신성력 수급도 잘 될걸?”
“싫어요. 무녀님, 무녀님 하면서 떠받들어지는 것만 해도 지긋지긋했는데, 이젠 아예 대놓고 신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얼마나 호들갑을 떨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걸요.”
“가족들한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그것 때문이냐? 너를 향한 태도가 달라질까 봐?”
“네. 그냥 다가가서 신경 쓰지 말라고, 평소처럼 대하면 된다고 말해볼까 생각도 했는데… 안 되겠더라고요.”
그레이스 본인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고 한들, 받아들이는 처지에서 그게 쉬울 리가 없다.
그건 그레이스 본인의 이기심을 위해서 상대에게 힘든 일을 강요하는 거고, 설령 어찌어찌 고아원 내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해도 그레이스가 특정 시설이나 거기 사람들을 과하게 편애한다는 말이 나온다면 이 또한 언젠가 불화의 씨앗이 되겠지.
지금은 순수한 아이들도, 몸이 커지고 머리가 굵어지면 어떻게 헛바람이 들어갈지 모르는 일.
“그러니까, 바깥으로 나가볼 생각이에요. 저를 잘 모르는, 무녀니 수호신이 하는 것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환경, 새로운 꿈을 향해서. 뭐, 너무 방치하면 또 영지 상태가 이상해질 수도 있으니까 가끔 돌아오긴 해야겠지만요.”
“그러냐.”
“같이 가줄 수는 없나요?”
그리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향해, 그레이스가 말을 이었다.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다는 거 알아요. 이제 떠날 생각이라는 것도. 그러니까 부탁할게요. 가지 말아요. 내 곁에 계속 있어 줘요.”
“어떤 일에도 끝은 있는 법이다.”
“지금 고개를 끄덕이면 벨라리아 최고의 미소녀인 데다가 겸사겸사 수호신이기도 한 아가씨랑 연인이 될 수 있다고 해도요?”
“자신감과 자기애가 아주 하늘을 뚫는구나.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정말 너무하네.”
“흐흐, 본래 이런 놈인 줄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뭘 새삼스레.”
“그러게요. 어쩌다가 이런 이상한 괴인한테 끌려서는. 하다 하다 얼굴도 못 본 남자한테 고백했다가 차였다고 생각하니 억울해서 눈물이 다 나오네.”
후우,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쉰 그레이스는, 그런데도 울거나 매달리는 대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좋아요. 그러면 포기할게요.”
“현명한 선택이로군.”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당신을 포기하겠다는 뜻이 아니에요.”
“응?”
그레이스는 활발한, 묘하게 악동 같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사뭇 경건한 태도로 무릎을 꿇고 그리츠를 향해 기도했다.
“얼굴조차 모르는 이여. 가장 낮은 곳을 자처했기에, 누구보다도 자유분방했던 이여.”
“절망에 허우적대며, 웃는 얼굴 아래에서 비명을 지르던 저의 목소리를, 오직 당신만이 들어주셨나이다.”
“당신께서 저를 웃게 했고, 당신께서 저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렇기에, 당신께서는 저의 신이십니다.”
“모두가 저를 향해 기원한다면, 저는 당신을 향해 기원하겠습니다.”
“모두가 저를 신이라고 칭송한다면, 저만큼은 당신을 향해 칭송을 바치겠습니다.”
“저의 기원을 이루어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제가 스스로 이루겠습니다.”
“당신께서 저의 곁에 남지 않겠노라 하신다면, 제가 당신 있는 곳에 찾아가 머물겠습니다.”
“기다려 주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발길을 멈추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저, 기원하는 것만은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긴 침묵이 있었다.
“거참, 사서 고생을 하는군. 멋대로 해라.”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레이스는 눈을 떴다.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웃었다.
간절히 바친 기원이 닿은 무녀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