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es
rupy1014 f66fe445bf Initial commit: Novel Agent setup
- Add 3 AI agents (writing, revision, story-continuity specialists)
- Add 4 slash commands (rovel.create, write, complete, seed)
- Add novel creation/writing rules
- Add Novelpia reference data (115 works, 3328 chapters)
- Add CLAUDE.md and README.md

🤖 Generated with [Claude Code](https://claude.com/claude-code)

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2025-12-14 21:31:57 +09:00

307 lines
14 KiB
Markdown
Raw Permalink Blame History

This file contains ambiguous Unicode characters
This file contains Unicode characters that might be confused with other characters. If you think that this is intentional, you can safely ignore this warning. Use the Escape button to reveal them.
#136화 거지 그리츠(Gritz) (12) - 신앙의 향방
그레이스는 지금의 상황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본래 기대했던 변장 데이트와는 여러모로 달랐지만, 이건 이것대로 충분히 재미있었다.
세상에 슈퍼 오크통을 타고 광란의 레이스를 즐겨본 인간이 달리 어디에 있겠는가.
고로, 그녀는 어떤 유감도 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고마웠어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아직 안 끝났는데 충분하긴 뭐가 충분해?”
“?”
문제는 그레이스가 만족했어도 그리츠 쪽은 아니었단 점이었다.
탑승객이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이젠 내려달라고 외친다고 해서 운행 중이던 놀이기구가 멈추는 법은 없다.
그레이스의 군것질이 끝난 걸 확인한 그리츠는, 곧장 다음 목적지를 향해 운행을 개시했다.
“자, 잠깐만요! 어디로 가려고요?”
“됐으니까 구경이나 해라!”
오크통이 움직였다.
뛰고, 구르고, 기괴하고도 자유롭게.
지붕에서 다음 지붕으로, 골목에서 새로운 골목으로, 담벼락을 넘고 벽을 타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주변 풍경을 아연하게 바라보던 그레이스는, 이내 그리츠가 도시를 넘어 산을 오르기 시작하는 걸 보고 화들짝 놀랐다.
심지어 그냥 산도 아니었다.
이 땅과 바깥을 분단시키는 거대한 산맥의 일부.
마치 깎아내린 것처럼 험난한 지형 탓에 산지기들조차 어지간해선 발도 들이지 않는 급경사를, 오크통은 물리 법칙을 무시하기라도 한 것처럼 성큼성큼 오르기 시작했다.
지면과 수평을 이루고 있던 의자가 직각에 조금 못 미치는 각도로 눕혀지고, 그 상태로 몸 전체가 들썩들썩 흔들리는 상황은 제아무리 강심장 기질이 있는 그레이스라고 해도 겁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이, 이거 괜찮은 거 맞아요?!”
“안 괜찮다고 하면 네가 뭘 할 수 있지?”
“?”
오늘따라 머리에 물음표를 띄우는 일이 많은 그레이스를 무시한 채, 오크통은 계속해서 등산을 계속했다.
높게, 높게, 더 높게.
시야를 가득 메우던 녹색이 점점 듬성듬성하게 변하고, 이윽고 암석의 회색과 모래의 황색으로 변할 때까지.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오크통이 정지한 후.
그리츠의 말이 멍해져 있던 그레이스를 깨웠다.
“바깥으로 나와라.”
친절함이라고는 없이 무뚝뚝한, 하지만 어딘지 모를 은근한 장난기가 담긴 목소리.
거기에 분노인지 안도감인지 본인도 잘 모를 감정을 느끼면서, 그레이스는 그가 인도하는 대로 오크통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와아.”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수확의 때를 기다리는 듯한 여린 이삭과 드문드문 피어난 꽃.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기나긴 강.
옹기종기 쌓아 올려진 건물과 그 사이를 오가는, 아마도 사람일 터인 작은 점.
벨라리아.
그녀의 고향이자, 평생을 살아왔던 땅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그녀의 시야에 담겼다.
“이야, 이게 위에서 보면 이런 느낌이었네요.”
그레이스는 흠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과연, 관광 코스의 마무리로는 더할 나위 없는 끝이라고 생각하면서.
“다 봤냐?”
“네. 평생 가도 못 잊을 구경이었어요!”
“그러면 다음으로 가야겠군.”
“다음이요?”
그레이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볼 건 다 본 것 같은데, 새삼스레 또 어딜 가자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허나 그리츠는 대답 대신 오크통을 굴리며 앞장을 섰고, 그레이스는 이번에는 두 발로 걸으며 그런 그리츠의 뒤를 따랐다.
오크통에 타는 편이 더 편하긴 했을 테지만, 그레이스는 굳이 태워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츠가 먼저 타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높디높은 봉우리.
그녀가 처음 내린 곳과는 반대쪽 끄트머리에서 펼쳐진 풍경은, 방금 보았던 것과는 또 다른 의미로 압도적이었으니까.
“…….”
그레이스는 이번엔 감탄사를 흘리지 않았다.
그저 멍한 표정으로 눈앞의 풍경을 바라봤을 뿐.
넓었다.
그리고 낯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벨라리아는 그녀가 태어나 살아왔던 땅이었다.
현장에서 걸어 다니느냐,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느냐의 차이는 있어도 근본적으로는 익숙한 곳.
하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그녀가 말로만 들어왔을 뿐 직접 체험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는 영역이었다.
“바깥….”
카닐리안의 저택이 우습게 보일 정도로 웅장한 성이 있었다.
아득한 지평선 가까이 구름에 닿을 정도의 탑이 있었다.
거대한 도로와 마차. 방대한 평원. 기이한 안개에 뒤덮인 숲.
이야기로만 들어본 곳, 혹은 이야기로조차 들어보지 못했던 곳.
“아.”
그레이스는 과거의 자신을 때려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평생 가도 못 잊을 구경이라는 표현을 지나치게 성급하게 써버린 바보를 향한 훈계였다.
덕분에 지금 이 감정을 표현할 마땅한 말이 떠오르질 않았으니까.
“이것도 일부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곳이, 보이는 곳보다 훨씬 많고 더 넓지. 몇 번이고 말했잖느냐. 이 대륙은 빌어먹을 정도로 크다고.”
그저 굳어 있는 그레이스의 귓가에, 그리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작전이 순조롭게 풀리면, 네 고향 땅에서 신앙의 대상은 수호신이 아닌 네가 될 거다. 때로는 그게 족쇄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 그때는 이 풍경을 떠올려봐라.”
수호신이니 뭐니해도, 결국 고립된 땅에서 왕 노릇을 하던 골목대장일 뿐.
이 아득한 광경 앞에서 신이라는 이름이 지닌 무게는 그리 무겁지도, 특별하지도 않다.
그러니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벗어던질 수 있는 장신구쯤으로 여겨라.
그 무심하면서도 배려가 담긴 말에, 그레이스는 애써 미소를 머금었다.
그야, 좋은 일이 있는데 눈가에 눈물이 흐르면 분위기가 이상해지지 않겠는가.
“…네, 절대로 잊지 않을게요. 이 풍경도, 당신의 말도.”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 정도는, 부디 애교로 넘어갈 수 있기를. 그레이스는 그리 바랬다.
***
축제가 진행되는 내내, 벨라리아의 주민들의 심정은 살짝 미묘했다.
절대 나쁘다고 할만한 것은 아니다.
놀거리가 부족한 시대, 마음껏 먹고 마시는 게 가능한 축제는 기꺼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 땅을 다스리는 통치자 가문에서 창고를 열고 대대적인 지원을 한 축제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웃고 떠들면서도, 사람들의 마음 속 한구석에는 미묘한 찝찝함, 혹은 의문이라고 할만한 게 남아 있었다.
‘수호신이 바뀐다는 게 사실일까?
‘정말로 이제는 새로운 무녀를 선별해서 바칠 필요가 없다고?
‘잘 되면 좋은 일이긴 한데, 괜히 기대만 했다가 실망하는 거 아닌가 몰라.
사람들은 그레이스의 행보에 열렬한 호응을 보였지만, 그 호응은 적잖이 계산적인 측면이 강했다.
마음속 깊이 소문을 믿었다기보다는, 그냥 믿는 편이 본인들 입장에서 죄책감도 덜고 혹여 진짜였을 때 이익도 되니까 믿었다는 뜻이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은 도시에서 함께 어울리던 소녀가 갑자기 신이 된다고 들었을 때, 그걸 마음 깊은 곳에서 믿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고로, 축제 마지막 날.
한참 웃고 떠들던 도시 중심부에서 벗어나, 밀밭에 모인 이들의 눈에는 은근한 불신, 혹은 미심쩍음이 담겨 있었다.
그 시선을 눈치챘으면서도, 그레이스는 당당히 밀밭으로 나아갔다.
주변에서는 언뜻 봐도 수천, 자칫하면 수만은 될법한 인파가 눈을 빛내고 있었지만, 그레이스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작디작은 시골의 행사일 뿐이다. 그리 긴장할 것도, 부담스러워할 것도, 과장되게 여길 것도 없다.
사락.
그레이스의 손끝에, 여린 이삭 하나가 붙들렸다.
수확의 즐거움을 맛보기에는 아직 시간과 노동력이 더 필요한, 그런 이삭.
그것을 붙잡은 채, 그레이스는 조용히 눈을 감고 기원했다.
신을 향한 기도가 아니었다.
평범한 사제나 무녀는 자신이 믿는 신을 향해 기원을 바치고 그 대가로 신성력을 하사받지만, 그레이스는 신의 자리 그 자체를 빼앗으려 하는 입장.
그녀의 기원은 다른 곳에 있는 누군가가 아닌, 오로지 본인의 마음을 정형하고, 그 형태를 특정한 모양새로 바로잡는 일에 쓰였다.
이 밀밭의 알곡이 좀 더 풍성해지기를.
사람들이 좀 더 배불리 먹고, 기분 좋게 잠잘 수 있기를.
올바른 형상을 이룬 기원이, 신성력이라는 형태로 그녀의 몸 주변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다만, 그 효력은 그렇게까지 강렬하지 못했다.
알곡이 좀 더 풍성해지고, 커지기는 했지만 기껏해야 수많은 이삭 중 단 하나뿐.
이 또한 굉장한 이적이긴 했으나, 이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단숨에 감동하게 하기에는 임팩트가 부족했다.
밀밭 한구석.
그저 배경 소품처럼 놓여 있던 오크통에서 흘러나온 은은한 마력이, 밀밭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그 마력에는 별다른 능력이라든가, 특이성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기능이라고는 그저 그레이스의 이미지에 따라, 회색과 은빛 사이를 오가는 빛깔로 영롱하게 빛날 뿐.
공격에도, 방어에도, 치유에도 쓸모가 없는, 전문가가 보면 낭비라며 혀를 찰 마력 운용법.
허나, 지금 이 순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용도로는 충분했다.
“오?”
“오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리츠의 교묘한 마력 운용 덕분에, 사람들이 보기에는 마치 그레이스의 몸을 기점으로 피어난 은색의 아우라가, 드넓은 밀밭 전체를 감싼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더할 나위 없이 신성했고,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기대감을 주는 비주얼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그런 기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염원이 되어 그레이스에게 모여들었다.
허와 실이 뒤바뀌었다.
혹은, 허가 실로 변했다.
모여든 염원이 그레이스의 주변 이삭들을 급격하게 성장시키며 풍성하게 만들었고, 그 변화를 눈으로 확인한 사람들의 놀라움과 경이가 더욱 새로운 염원을 불러 모았다.
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본디 평범한 인간에게는 염원 그 자체를 힘으로 바꾸는 기능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득한 천상, 애초에 태어나기를 신족으로 태어난 이들만이 타고나는 기능이기 때문이다.
초월의 경지에 오른다면 신족이라는 중개자를 무시하고 직접 신성력을 긁어모으는 것도 가능했으나, 정작 신성력을 기반으로 초월자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신성력이라는 것 자체가 본래부터 ‘신’이라 불리는 이들이 중개자 역할을 해주지 않으면 인간은 사용할 수 없는 힘이다.
이 말은 즉, 신이 보기에 상황이 불리하다 싶으면 얼마든지 신성력의 공급을 끊어버릴 수 있다는 뜻.
신들은 자신을 믿는 이들을 늘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신도들에게 신성력을 베풀었지만, 정작 그 신도가 본인에게 위협이 될 정도로 성장할 것 같으면 신성력의 공급을 제한하거나, 혹은 불합리한 계약을 맺는 식으로 신도들을 견제했다.
신족이 아닌 존재가 ‘신’이 된다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로는 경쟁자를 늘리는 행위니까.
그레이스는 당연히 초월자가 아니었고, 수호신의 계승자 같은 타이틀을 내걸면서 수호신이라는 중개자를 이용하는 건 본래라면 말도 안 되는 행위였다.
무녀가 자신을 대체할 존재로서 알려지는걸, 그 어떤 신이 허용하겠는가.
그렇다.
염원을 자기 뜻대로 다루는 게 아니라, 염원 그 자체에 이리저리 휘둘려 자아까지 오락가락할 정도로 맛이 가버린 신이 아니고서야, 가능할 리가 없었다.
[──────]
밀밭에서 멀리 떨어진 곳.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신전에서 소리 없는 절규가 울려 퍼진 것을, 벨라리아의 수많은 이들 중 오직 그리츠와 그레이스만이 감지했다.
자신을 향한 신앙이 점점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감지했는지, 수호신은 분노와 함께 그레이스를 향한 힘의 공급을 끊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그 작업은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미 그레이스가 눈앞에서 펼쳐 보인 ‘기적’에 넋이 나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벨라리아의 주민들이 그레이스를 수호신으로 인식하면 인식할수록, 수호신은 그 염원에 저항하기가 어려웠다.
뻑뻑한 수도꼭지를 어찌어찌 돌려 물줄기를 약하게 할 수는 있어도, 아예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고로, 수호신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이대로 얌전히 신앙을 빼앗겨 뒷방 늙은이로 전락하거나, 혹은 완전히 신앙이 옮겨가기 전에 그레이스를 죽여버리거나.
그리츠의 눈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늦어도 오늘 밤. 모든 것이 결착 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