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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거지 그리츠(Gritz) (11) - 오크통과 무녀와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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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지엄한 상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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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병에는 물을 넣을 수 있다. 김장독에는 김치를 넣을 수 있다. 뒤주에는 사람을 넣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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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크통에 사람을 넣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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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바로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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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는 상식인으로서 단호히 이 불합리한 처사에 저항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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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니 무리거든요! 어떻게 사람이 오크통에 들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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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지금, 네년 눈에 나는 사람처럼 안 보인다 이거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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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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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 봉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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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댁이 그리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며 무척이나 억울한 눈빛을 향하는 그레이스에게, 그리츠는 제법 음침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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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흐흐, 안심해라. 나도 초심자에게 다짜고짜 상급자 코스를 들이밀 만큼 배려를 모르진 않으니까. 원래 자전거도 처음에는 보조 바퀴 달고서 타는 법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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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가 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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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에 가면 그런 게 있다. 정확히는 있는 나라도 있고, 없는 나라도 있지. 이놈의 대륙은 땅덩어리가 원체 커서 그런지, 아니면 초월자 놈들 때문인지 문명 수준, 아니 방향성이 좀 오락가락한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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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그리츠 씨가 제대로 설명할 생각이 없다는 건 잘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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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심 변장 데이트 같은 걸 -겸사겸사 잘 풀리면 그리츠의 본모습 보기도- 기대했던 그레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지만, 이제 와선 다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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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해 온 성의를 봐서라도 일단 시도나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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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마음가짐으로 그리츠가 가져온 오크통에 몸을 들이민 그레이스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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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 의외로 넓네. …아니, 그보다 너무 넓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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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봤을 때는 억지로 몸을 구겨 넣어야 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의 크기였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오크통 내부는 생각보다도 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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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통을 하나의 터널이라고 가정하면, 기어다니기는커녕 허리만 살짝 굽혀도 여유롭게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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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보다, 오크통은 그냥 비어 있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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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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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통의 중심부. 마치 벽면과 일체화된 것처럼 불쑥 튀어나와 있는 의자를 보고 그레이스의 머리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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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오크통 안에 대체 왜 의자가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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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어두워서 잘못 본 건가 싶었지만, 손으로 의자를 만졌을 때 와닿는 감촉은 허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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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하냐? 빨리 앉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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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츠의 채근에, 그레이스는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일단 의자에 착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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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가죽을 사용한 건지 의자에 앉는 감촉은 썩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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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녀가 의자에 앉은 순간, 갑자기 눈앞에 빛이 번뜩이는 듯하더니 그레이스의 시야가 확 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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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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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그레이스는 오크통의 옆면이 뜯겨나간 것으로 착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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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을 가로막던 벽이 사라지며 전면이 보인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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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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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가 그 훤히 뚫린 것 같은 부분으로 손을 뻗자, 매끄러운 벽 같은 것이 만져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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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아니, 밖에서 봤을 땐 그냥 오크통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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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건 직접 확인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답게, 그레이스는 오크통 바깥으로 나와 그 겉모습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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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아도, 느껴지는 건 그저 평범한 오크통의 외관과 감촉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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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통은 사람 하나가 편히 앉을 수 있는 의자를 장착할만큼 크지도 않았고, 옆면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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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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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잖냐. 초심자용이라고. 확인 끝났으면 빨리 다시 들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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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대답이 아닌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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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에 대해서 진지하게 설명하면 대충 일주일 정도 밤샘을 해야 할 텐데, 괜찮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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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는 재빨리 오크통 안으로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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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호기심보다 중요한 게 있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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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한번 경험한 대로 의자에 착석하자, 어두컴컴해서 사물의 윤곽 정도만이 흐릿하게 보이던 풍경이 다시금 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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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트 착용해라. 오른쪽 어깨에 있는 끈 있지? 거기에 달린 갈고리를 왼쪽 허리에 있는 고리에다가 걸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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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대신, 그냥 지시에 따르는 걸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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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 하나하나에 의문을 표하느니 일단 하라는 건 다 해보고 평가하는 쪽이 빠르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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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키는 대로 끈의 고리를 서로 연결하고 나니, 그레이스의 몸이 의자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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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가쁠 정도의 압박은 아니었지만, 자유롭게 움직이기에는 조금 불편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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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음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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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앉아 있으면 된다. 재미있는 구경을 시켜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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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구경이 뭐냐고 질문할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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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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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레이스가 들어왔던 오크통의 입구가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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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크통 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에, 기다란 밧줄 두 개가 그리츠의 오크통과 연결된 채 팽팽하게 늘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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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말과 마차를 연결하는 끈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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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말과 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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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의 두뇌와 직감이 맹렬한 경종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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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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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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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리츠의 오크통이 앞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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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와 연결된 그레이스의 오크통 역시 그에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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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아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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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본능적으로 비명을 내질렀던 그레이스였지만, 이내 그 비명의 기세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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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츠의 오크통은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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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의 오크통 역시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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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작 그 안에 있는 그레이스는 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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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앉아 있는 의자와 발판이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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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방향을 꺾을 때마다 몸이 한쪽으로 쏠리는 관성 정도는 느껴졌지만, 몸을 포근하게 감싸는 의자 구조와 고정끈 덕분에 견딜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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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견딜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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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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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뛰어넘은 오크통 어트랙션에, 그레이스의 머릿속에서 도파민이 마구 용솟음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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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을 마음대로 조절하거나 하는 건 불가능하고, 그냥 그리츠가 이끄는대로 끌려갈 뿐이었지만, 되레 그랬기 때문에 운전한답시고 정신 파는 일 없이, 순수하게 속도감과 마구 변하는 주변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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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카닐리안 저택 내부만을 질주하던 오크통은, 마침 커다란 창문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바깥쪽으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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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꽉 다물고 있어라. 혀 깨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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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 그리고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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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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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에 충돌하는 순간의 충격은 제법 아찔했지만, 몸에 무리가 가거나 통증이 느껴질만큼 커다랗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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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주행 코스가 매끄러운 건물 복도에서 거친 야외로 바뀐 덕분인지, 오크통 자체가 덜덜 떨리며 속도감과 박진감 역시 한층 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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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는 신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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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봐요! 당신 거지 아니죠! 세상에 이런 거 타고 다니는 거지가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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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오크통 사이의 거리와 어지러운 상황을 고려하면 제대로 전달 되기 어려운 질문이었지만, 그리츠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을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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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 큰 소리로 외쳐서 들려온다기보다는, 오크통 내부에 어딘가 소리를 내는 구멍 같은 게 있어서 거기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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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쯧, 네가 쓰는 거 하고 내 거가 똑같다고 생각하지 말거라. 초심자용과 전문가용을 어디서 비교하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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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쪽에 태워주지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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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들어가기도 좁아, 이 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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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좁은 곳에 나 같은 미소녀하고 같이 들어갈 수 있으면 이득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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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잡소리가 나오는 걸 보니까 슬슬 적응이 끝난 모양이구나. 속도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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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크통의 회전 속도가 단숨에 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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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득히 점처럼 보였던 나무가 눈 한번 깜빡이는 순간에 가까워지고, 다음 순간에는 또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지는 속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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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도시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그레이스는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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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속도 좀 줄여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러다가 사람들하고 부딪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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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축제 때문에 평소 이상으로 사람이 많은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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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곳을 이런 고속 회전 오크통으로 기어들어갔다간 말로 하기 어려운 대참사가 벌어질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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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걱정에 대한 그리츠의 대답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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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외곽에 돌입한 순간, 그리츠의 오크통 옆으로 지팡이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는 광경을, 그레이스는 분명히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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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팡이가 바닥을 후려치는 순간, 오크통 전체가 마치 도약이라도 한 것처럼 높게 날아오르는 광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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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시간이 늦게 흐르는 것 같은 착각과 함께, 두 오크통이 어느 건물의 지붕 위로 착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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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라면 큰 소리가 나거나 지붕이 상해도 이상하지 않았겠지만, 대체 무슨 조화를 부린 것인지 착지의 충격은 사뿐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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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는 구르기가 아니라 뜀뛰기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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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위를 굴러다니는 대신, 퉁퉁 몸통을 튕겨가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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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아래로 보이는 왁자지껄한 축제 풍경에, 그레이스는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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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라면 멀미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애초에 이런 경험이 처음인 그레이스는 그걸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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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몸 주변으로, 어느새인가 은은한 빛무리가 새어 나오고 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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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지막한 오크통 두 개가 지붕 위를 돌아다니는데도,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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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머리 위를 쳐다보는 이들이 거의 없기도 했고, 그리츠의 행동이 워낙에 신출귀몰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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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그레이스는 마음껏 축제 구경에 전념하며, 그 떠들썩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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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만족스러웠지만, 그리츠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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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역시 축제라면 먹거리가 생명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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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 아니, 이걸로도 충분한데요. 괜히 뭐 사 먹는다고 모습 드러냈다가 분위기 싸해지면 어떻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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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방법이 있으니 지켜보기만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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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츠는 어느 지붕 위에서 두 오크통을 연결하는 끈을 잠시 해제한 뒤, 혼자서 광장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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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웬 오크통 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자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그 오크통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재주를 부리자 이 역시 축제의 일부라 여겼는지 웃으며 구경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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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는 지붕 위에서 그 광경을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확실히 그리츠의 재주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무언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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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소리는커녕 몸 대부분이 오크통 안에 숨어 있어서 표정조차 보이질 않는데, 오직 팔과 지팡이의 움직임만으로 능수능란하게 여러 감정을 표현하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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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지팡이 하나로만 걷는 시늉을 하거나, 벽을 타고 오르거나, 돌멩이로 저글링을 하는 등 온갖 재주가 동원되었고, 특히 물구나무를 선 채로 빙글빙글 회전하는 묘기 앞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환호성을 내지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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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신이 나서 오크통을 향해 동전 따위를 집어던졌고, 그리츠는 그 동전 중 일부는 오크통 안으로 빨아들였지만, 나머지 일부는 그대로 몇몇 음식점에 전달한 뒤 지팡이로 매대의 음식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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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의 여지가 없는 의사 표현에 가게 주인들은 기꺼이 음식을 내주었고, 그리츠는 그것을 넘겨받은 뒤 그대로 공중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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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사람들이 어떻게든 그리츠가 어디로 간 건지를 살피려 했으나, 지팡이 하나로 벽면 뛰기가 가능한 이 미친 오크통을 추적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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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위에서 내려다보던 그레이스조차도 잠시 그리츠의 행적을 놓칠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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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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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두드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그레이스의 오크통 뚜껑이 잠시 열리더니, 그 사이로 몇몇 먹거리들이 그대로 배달되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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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옆에 당연하다는 듯이 음식들을 놔둘 수 있는 미니 탁자가 떠오른 것은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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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는 이 해괴한 구조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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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재미있고 편하니 좋은 것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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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음식은 참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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