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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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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거지 그리츠(Gritz) (11) - 오크통과 무녀와 축제

세상에는 지엄한 상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물병에는 물을 넣을 수 있다. 김장독에는 김치를 넣을 수 있다. 뒤주에는 사람을 넣을 수 있다.

하지만 오크통에 사람을 넣어선 안 된다.

그것이 바로 상식이다.

그레이스는 상식인으로서 단호히 이 불합리한 처사에 저항하려 했다.

“아니, 아니 무리거든요! 어떻게 사람이 오크통에 들어가요!?”

“그러니까 지금, 네년 눈에 나는 사람처럼 안 보인다 이거로군?”

“…….”

반론 봉쇄.

거기서 댁이 그리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며 무척이나 억울한 눈빛을 향하는 그레이스에게, 그리츠는 제법 음침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말했다.

“흐흐흐, 안심해라. 나도 초심자에게 다짜고짜 상급자 코스를 들이밀 만큼 배려를 모르진 않으니까. 원래 자전거도 처음에는 보조 바퀴 달고서 타는 법 아니냐.”

“자전거가 뭔데요.”

“다른 나라에 가면 그런 게 있다. 정확히는 있는 나라도 있고, 없는 나라도 있지. 이놈의 대륙은 땅덩어리가 원체 커서 그런지, 아니면 초월자 놈들 때문인지 문명 수준, 아니 방향성이 좀 오락가락한단 말이야.”

“일단 그리츠 씨가 제대로 설명할 생각이 없다는 건 잘 알았어요.”

내심 변장 데이트 같은 걸 -겸사겸사 잘 풀리면 그리츠의 본모습 보기도- 기대했던 그레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지만, 이제 와선 다른 수가 없었다.

준비해 온 성의를 봐서라도 일단 시도나 해보자.

그런 마음가짐으로 그리츠가 가져온 오크통에 몸을 들이민 그레이스는 생각했다.

‘안은 의외로 넓네. …아니, 그보다 너무 넓은데?

겉으로 봤을 때는 억지로 몸을 구겨 넣어야 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의 크기였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오크통 내부는 생각보다도 넓었다.

오크통을 하나의 터널이라고 가정하면, 기어다니기는커녕 허리만 살짝 굽혀도 여유롭게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

뭣보다, 오크통은 그냥 비어 있는 게 아니었다.

“의자?”

오크통의 중심부. 마치 벽면과 일체화된 것처럼 불쑥 튀어나와 있는 의자를 보고 그레이스의 머리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아니, 오크통 안에 대체 왜 의자가 있단 말인가.

처음에는 어두워서 잘못 본 건가 싶었지만, 손으로 의자를 만졌을 때 와닿는 감촉은 허구가 아니었다.

“뭐하냐? 빨리 앉지 않고.”

그리츠의 채근에, 그레이스는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일단 의자에 착석했다.

무슨 가죽을 사용한 건지 의자에 앉는 감촉은 썩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의자에 앉은 순간, 갑자기 눈앞에 빛이 번뜩이는 듯하더니 그레이스의 시야가 확 트였다.

“어? 어어?”

잠시, 그레이스는 오크통의 옆면이 뜯겨나간 것으로 착각했다.

앞을 가로막던 벽이 사라지며 전면이 보인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레이스가 그 훤히 뚫린 것 같은 부분으로 손을 뻗자, 매끄러운 벽 같은 것이 만져졌기 때문이다.

“유리? 아니, 밖에서 봤을 땐 그냥 오크통이었는데?”

궁금한 건 직접 확인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답게, 그레이스는 오크통 바깥으로 나와 그 겉모습을 확인했다.

하지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아도, 느껴지는 건 그저 평범한 오크통의 외관과 감촉뿐.

오크통은 사람 하나가 편히 앉을 수 있는 의자를 장착할만큼 크지도 않았고, 옆면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지도 않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말했잖냐. 초심자용이라고. 확인 끝났으면 빨리 다시 들어가라.”

“그건 대답이 아닌 것 같은데요.”

“원리에 대해서 진지하게 설명하면 대충 일주일 정도 밤샘을 해야 할 텐데, 괜찮냐?”

그레이스는 재빨리 오크통 안으로 돌입했다.

때로는 호기심보다 중요한 게 있는 법이었다.

이미 한번 경험한 대로 의자에 착석하자, 어두컴컴해서 사물의 윤곽 정도만이 흐릿하게 보이던 풍경이 다시금 환해졌다.

“벨트 착용해라. 오른쪽 어깨에 있는 끈 있지? 거기에 달린 갈고리를 왼쪽 허리에 있는 고리에다가 걸면 된다.”

그레이스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대신, 그냥 지시에 따르는 걸 선택했다.

행동 하나하나에 의문을 표하느니 일단 하라는 건 다 해보고 평가하는 쪽이 빠르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시키는 대로 끈의 고리를 서로 연결하고 나니, 그레이스의 몸이 의자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숨이 가쁠 정도의 압박은 아니었지만, 자유롭게 움직이기에는 조금 불편한 상태였다.

“이 다음은요?”

“그냥 앉아 있으면 된다. 재미있는 구경을 시켜주지.”

재미있는 구경이 뭐냐고 질문할 필요는 없었다.

덜컹!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레이스가 들어왔던 오크통의 입구가 닫혔다.

그리고 오크통 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에, 기다란 밧줄 두 개가 그리츠의 오크통과 연결된 채 팽팽하게 늘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그건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말과 마차를 연결하는 끈 같은…

‘…잠깐. 말과 마차?

그레이스의 두뇌와 직감이 맹렬한 경종을 울렸다.

“아니, 잠깐─”

“그럼 출발한다!”

그레이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리츠의 오크통이 앞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와 연결된 그레이스의 오크통 역시 그에 끌려갔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반쯤 본능적으로 비명을 내질렀던 그레이스였지만, 이내 그 비명의 기세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리츠의 오크통은 돌고 있다.

그레이스의 오크통 역시 돌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 안에 있는 그레이스는 돌지 않았다.

그녀가 앉아 있는 의자와 발판이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니까.

이리저리 방향을 꺾을 때마다 몸이 한쪽으로 쏠리는 관성 정도는 느껴졌지만, 몸을 포근하게 감싸는 의자 구조와 고정끈 덕분에 견딜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견딜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재밌는데?

시대를 뛰어넘은 오크통 어트랙션에, 그레이스의 머릿속에서 도파민이 마구 용솟음쳤다.

방향을 마음대로 조절하거나 하는 건 불가능하고, 그냥 그리츠가 이끄는대로 끌려갈 뿐이었지만, 되레 그랬기 때문에 운전한답시고 정신 파는 일 없이, 순수하게 속도감과 마구 변하는 주변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처음에는 카닐리안 저택 내부만을 질주하던 오크통은, 마침 커다란 창문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바깥쪽으로 몸을 날렸다.

“입 꽉 다물고 있어라. 혀 깨문다.”

비상, 그리고 추락.

쿵!

지면에 충돌하는 순간의 충격은 제법 아찔했지만, 몸에 무리가 가거나 통증이 느껴질만큼 커다랗지는 않았다.

또한 주행 코스가 매끄러운 건물 복도에서 거친 야외로 바뀐 덕분인지, 오크통 자체가 덜덜 떨리며 속도감과 박진감 역시 한층 배가 되었다.

그레이스는 신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솔직히 말해봐요! 당신 거지 아니죠! 세상에 이런 거 타고 다니는 거지가 어디 있어!”

두 오크통 사이의 거리와 어지러운 상황을 고려하면 제대로 전달 되기 어려운 질문이었지만, 그리츠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을 돌려주었다.

먼 곳에서 큰 소리로 외쳐서 들려온다기보다는, 오크통 내부에 어딘가 소리를 내는 구멍 같은 게 있어서 거기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같았다.

“쯧쯧, 네가 쓰는 거 하고 내 거가 똑같다고 생각하지 말거라. 초심자용과 전문가용을 어디서 비교하느뇨?”

“그러면 그쪽에 태워주지 그랬어요!”

“나 혼자 들어가기도 좁아, 이 년아.”

“아니, 좁은 곳에 나 같은 미소녀하고 같이 들어갈 수 있으면 이득 아니에요?”

“자꾸 잡소리가 나오는 걸 보니까 슬슬 적응이 끝난 모양이구나. 속도 높인다.”

그리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크통의 회전 속도가 단숨에 배가 되었다.

저 아득히 점처럼 보였던 나무가 눈 한번 깜빡이는 순간에 가까워지고, 다음 순간에는 또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지는 속도감.

출발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도시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그레이스는 당황했다.

“소, 속도 좀 줄여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러다가 사람들하고 부딪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안 그래도 축제 때문에 평소 이상으로 사람이 많은 거리였다.

그런 곳을 이런 고속 회전 오크통으로 기어들어갔다간 말로 하기 어려운 대참사가 벌어질 터.

그녀의 걱정에 대한 그리츠의 대답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돌아왔다.

도시 외곽에 돌입한 순간, 그리츠의 오크통 옆으로 지팡이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는 광경을, 그레이스는 분명히 목격했다.

그 지팡이가 바닥을 후려치는 순간, 오크통 전체가 마치 도약이라도 한 것처럼 높게 날아오르는 광경도.

잠시 시간이 늦게 흐르는 것 같은 착각과 함께, 두 오크통이 어느 건물의 지붕 위로 착지했다.

본래라면 큰 소리가 나거나 지붕이 상해도 이상하지 않았겠지만, 대체 무슨 조화를 부린 것인지 착지의 충격은 사뿐하기만 했다.

그 뒤로는 구르기가 아니라 뜀뛰기의 시간이었다.

지붕 위를 굴러다니는 대신, 퉁퉁 몸통을 튕겨가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는 뜻이다.

눈 아래로 보이는 왁자지껄한 축제 풍경에, 그레이스는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본래라면 멀미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애초에 이런 경험이 처음인 그레이스는 그걸 알지 못했다.

자신의 몸 주변으로, 어느새인가 은은한 빛무리가 새어 나오고 있다는 것도.

큼지막한 오크통 두 개가 지붕 위를 돌아다니는데도,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했다.

애초에 머리 위를 쳐다보는 이들이 거의 없기도 했고, 그리츠의 행동이 워낙에 신출귀몰한 탓이었다.

덕분에 그레이스는 마음껏 축제 구경에 전념하며, 그 떠들썩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만족스러웠지만, 그리츠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흐음. 역시 축제라면 먹거리가 생명이지.”

“엑? 아니, 이걸로도 충분한데요. 괜히 뭐 사 먹는다고 모습 드러냈다가 분위기 싸해지면 어떻게 해요.”

“다 방법이 있으니 지켜보기만 해라.”

그리츠는 어느 지붕 위에서 두 오크통을 연결하는 끈을 잠시 해제한 뒤, 혼자서 광장으로 뛰어들었다.

사람들은 웬 오크통 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자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그 오크통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재주를 부리자 이 역시 축제의 일부라 여겼는지 웃으며 구경을 시작했다.

그레이스는 지붕 위에서 그 광경을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확실히 그리츠의 재주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무언가가 있었다.

말소리는커녕 몸 대부분이 오크통 안에 숨어 있어서 표정조차 보이질 않는데, 오직 팔과 지팡이의 움직임만으로 능수능란하게 여러 감정을 표현하였으니 말이다.

이외에도 지팡이 하나로만 걷는 시늉을 하거나, 벽을 타고 오르거나, 돌멩이로 저글링을 하는 등 온갖 재주가 동원되었고, 특히 물구나무를 선 채로 빙글빙글 회전하는 묘기 앞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환호성을 내지를 정도였다.

사람들은 신이 나서 오크통을 향해 동전 따위를 집어던졌고, 그리츠는 그 동전 중 일부는 오크통 안으로 빨아들였지만, 나머지 일부는 그대로 몇몇 음식점에 전달한 뒤 지팡이로 매대의 음식을 가리켰다.

오해의 여지가 없는 의사 표현에 가게 주인들은 기꺼이 음식을 내주었고, 그리츠는 그것을 넘겨받은 뒤 그대로 공중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몇몇 사람들이 어떻게든 그리츠가 어디로 간 건지를 살피려 했으나, 지팡이 하나로 벽면 뛰기가 가능한 이 미친 오크통을 추적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심지어 위에서 내려다보던 그레이스조차도 잠시 그리츠의 행적을 놓칠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똑똑.

나무를 두드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그레이스의 오크통 뚜껑이 잠시 열리더니, 그 사이로 몇몇 먹거리들이 그대로 배달되어 들어왔다.

의자 옆에 당연하다는 듯이 음식들을 놔둘 수 있는 미니 탁자가 떠오른 것은 덤이었다.

그레이스는 이 해괴한 구조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아무튼 재미있고 편하니 좋은 것 아니겠나.

길거리 음식은 참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