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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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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신입 모험가 베른(Bern) (30) - 반딧불
흐릿해진 의식 속.
블랑카는 멍하니 방금 일어났던 일을 회상했다.
어지럽게 뒤집히는 시야.
바람 앞의 나뭇잎처럼 흔들리는 몸.
저주, 병마, 맹독. 세상의 온갖 악하고 더러운 것들에게서 쥐어 짜낸 기름에 불이 붙은 듯한 폭발.
그리고, 그 폭발로부터 그녀를 감싸 안았던 누군가의 품.
그걸 떠올린 순간, 블랑카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윽…!”
온몸 여기저기에서 느껴지는 두들겨 맞은 것 같은 통증.
그것을 애써 무시하며, 블랑카는 다급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지면이 폭락하며 무너져 내린 건물 잔해와 허공을 떠도는 먼지.
그 사이에서 익숙한 붉은 머리를 보고 뛰쳐나간 블랑카는, 이내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덜덜 몸을 떨었다.
“아, 아아….”
베른의 상태는 참혹 그 자체였다.
오른쪽 다리는 커다란 돌덩어리에 깔려 짓뭉개져 있었고 피부 곳곳이 중독된 것처럼 검게 물든 데다가, 실시간으로 타들어 가기라도 하듯이 계속해서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마 저 침식이 완전히 끝나고 나면, 시체 하나 남기지 못하고 몸이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리고 말 터.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은 블랑카는 거의 기다시피 하면서 베른에게 다가가, 치유의 주문을 사용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그가 입은 상처가 나을 때까지 계속해서.
허나 이는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그녀가 흩뿌린 하얀빛은 베른의 몸을 침식한 검은 마력을 밀어내지 못했고, 그의 상처를 아물게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블랑카는 계속해서 주문을 외웠다.
“나아, 나으란 말이야. 이럴 때 쓸 수 없으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건데…!!”
어린 시절.
무력했던 딸을 지키기 위해, 그녀의 어머니는 희생을 자처했다.
그리고 지금.
유일하게 그녀를 이해하고, 그녀와 같은 꿈을 꾸었던 사내가, 또다시 그녀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사실에 블랑카의 마음이 썩어 문드러지려 하던 그때.
덥썩, 하고.
그녀의 손을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
“─그만하셔도 됩니다, 블랑카 씨.”
어느새 정신을 차린 것일까.
붉은 머리의 모험가가 블랑카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당장 죽어가는 인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차분하고 평온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어차피 고칠 수 있는 상처가 아니니, 괜히 마력 낭비하지 말고 아끼십시오. 아니, 그보다 일단 블랑카 씨의 상처부터 치료하는 게 낫겠군요.”
그 너무나도 천연덕스러운 말투에, 블랑카는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몰래 울컥하고 말았다.
“지금 그런 말이나 할 때예요!? 왜, 대체 왜 나를 감싼 건데요!”
“으음.”
블랑카의 쥐어 짜내는 것 같은 절규에, 베른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야 블랑카 씨의 목숨 쪽이 훨씬 중요하니까요.”
숨을 삼키는 듯한 소리를 낸 것은, 대체 누구였을까.
말을 잃어버린 블랑카를 앞두고, 베른은 어딘지 모르게 멋쩍은 듯이 말을 이었다.
“어지간하면 비밀로 할 생각이었지만, 이대로라면 당신이 괜한 마음의 짐을 짊어질 테니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겠군요.”
베른은 아이에게 마술의 비밀을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익살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며, 이런 말을 내뱉었다.
“모험가 베른은 실존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이 몸도, 신분도, 마법으로 만들어 낸 가짜에 불과하죠.”
“진짜 ‘저’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아주 멀쩡한 모습으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실 필요도, 괜히 죄책감을 가지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동안 속여서 미안합니다. 블랑카 씨.”
블랑카는 침묵했다.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를… 이렇게나 한심하고 부족한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당신은 그런 거짓말까지 하는 건가요.
타오르듯이 목이 멨다.
지금 당장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누굴 바보로 아는 거냐고 그에게 따지고 싶었다.
허나, 정작 블랑카는 그럴 수가 없었다.
죽어가면서도 그녀에게 죄책감을 주지 않으려는 남자의 마지막 헌신을.
그 지독히도 서툴고, 처절할 만큼 상냥한 배려를, 대체 어떻게 외면하란 말인가.
그렇기에, 블랑카는 말했다.
“…네, 정말로, 너무하네요, 베른. 이렇게 뻔뻔한 남자인 줄 몰랐어요.”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았을까.
연기가 너무 서툰 나머지, 그가 눈치채지는 않았을까.
내심 불안에 떠는 그녀였지만, 다행히 베른은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하하, 죄송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길게 사죄의 말을 건네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을 것 같군요.”
베른의 시선이 위쪽.
그들이 떨어져 내린 천장에 생긴 구멍 쪽을 응시했다.
“방금 공격에는 아마 놈 자신도 휘말렸겠지만, 머지않아 곧 부활을 끝낼 겁니다. 리치에게는 ‘심장’, 일종의 예비 목숨을 만들어 두는 능력이 있으니까요. 그러니, 그 전에 움직여야 합니다.”
“움직인다고요? 뭘 위해서요?”
블랑카는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유일하게 리치를 쓰러트릴 수 있었던 베른이 이렇게 된 시점에서, 어차피 승부는 끝난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싸울 필요도 없지 않은가.
차라리, 그가 사라질 마지막 순간까지 옆에서 함께 하는 것이 좋은 일 아닌가.
“승리를 위해서.”
허나 그런 블랑카의 어리광을 잘라버리듯, 베른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린 아직 패배한 게 아닙니다. 위에는 렌야를 비롯한 다른 모험가들이 남아 있고… 무엇보다 블랑카 씨가 있지 않습니까.”
블랑카는 고개를 저으려 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당신이 없는데 나 따위가 리치를 상대할 수는 없다고, 그렇게 부정하려 했다.
“당신을 옆에서 봐온 제가 단언해 드리겠습니다. 블랑카 씨는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블랑카 씨가 이긴다면, 그건 저의, 아니 ‘우리’의 승리입니다.”
그렇지만, 베른은 그녀에게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녀라면 할 수 있다고.
그렇기에, 블랑카는 좌우가 아닌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답례였기에.
베른이 만족스레 미소 지었다.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참으며, 블랑카도 마주 웃었다.
블랑카는 몸을 일으켰다.
검을 손에 쥐고, 떨어진 잔해를 계단 삼아 위로, 위로 올라갔다.
그녀의 동료에게, 승리를 바치기 위해서.
그의 마지막 모험을, 실패가 아니라 성공으로 만들기 위해서.
저벅.
원래 있던 계층에 발을 들여놓자, 어느새인가 한곳에 다시 뭉친 모험가들과 그런 모험가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 리치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보였다.
리치가 상급 주문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보라색 안개를 회수했다고 한들, 이미 안개에 접촉하며 모험가들이 입은 피해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안개에 실린 온갖 부정적인 주문의 효과와 피로로, 모험가 대부분이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상태.
그에 반해 리치는 주력이었던 사령 기사를 전부 베른에게 잃기는 했지만, 아직도 많은 마력과 수하들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미 도주를 시도했다가 처참하게 박살 난 전적이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싸우고 있을 뿐, 모험가들의 얼굴에 전의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호오, 제 발로 죽으러 기어 나온 것이냐. 정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으면, 조금쯤은 삶을 연명할 수 있었을 것을.”
베른이 쓰러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일까.
리치의 말투에는 어느새인가 다시 여유가 돌아온 상태였다.
본인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만 드러나는, 저열하기 짝이 없는 거짓 카리스마.
저런 것 따위를, 악몽까지 꿔가며 두려워했었다.
저런 자 따위에게, 소중한 이를 두 번이나 잃어버리게 되었다.
울컥, 하고 블랑카의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솟구쳤다.
그 감정을, 블랑카는 애써 억누르지 않았다.
그녀는 걸음을 내디뎠다. ─그에게 배웠던 검술과 몸놀림이 그곳에 있었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에게 선물받은 반지가 존재감을 주장했다.
그녀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가 자기 목숨을 바쳐가며 지켜준 생명이었다.
마력의 성질이란, 삶의 궤적.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행했고, 어디를 바라보는지.
그녀가 짊어져 왔던 수많은 조각이, 하나로 합쳐져 거대한 탑을 이루기 시작했다.
“쯧,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실성했는가.”
블랑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 거슬렸는지, 아니면 또다시 블랑카에게 접근을 허용하면 귀찮으리라 여겼는지, 리치의 손에서 저주와 독기를 품은 검은 구체가 쏘아졌다.
직격한다면 중장비로 무장한 기사조차 중상을 입을 수준의, 상급 공격 주문.
블랑카는 『바위를 태우는 마법』으로 이를 요격했지만, 상급 주문과 중급 주문으로는 제대로 된 승부가 될 리가 없었다.
다소 위력이 줄어든 게 전부인 검은 구체는 그대로 블랑카를 향해 달려들었고, 블랑카는 그 구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요란한 폭발과 함께, 블랑카의 몸이 뒤로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화상과 저주에 의한 침식으로 죽어가는 블랑카를 보며, 리치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푹!
블랑카가 지면에 검을 꽂고, 그에 의지하며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애를 쓰는구나. 포기하면 편할 것을.”
그 발버둥을 유쾌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리치가 또다시 주문을 쏘아냈다.
이번에도 요격을 시도한 블랑카였지만, 역시 힘 승부를 이겨내지 못하고, 그녀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아니…?”
처음에는 장난감이라도 가지고 놀 듯이 블랑카를 공격하던 리치였으나, 이내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얼굴을 굳혔다.
리치가 아무리 살벌한 공격을 퍼붓고, 그녀의 숨통을 끊어놓으려 해도, 블랑카는 절대로 쓰러지지 않았다.
피를 토하고, 바닥을 구르면서도, 검과 주문을 활용해 어떻게든 치명상을 회피하고, 강화와 치유를 통해 계속해서 싸움을 이어갔다.
한 번이라면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이라면 근성과 집념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이 세 번, 네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반복된다면 어떨까.
“네년,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포효와 함께, 살의를 품은 주문이 블랑카에게 쏘아졌다.
블랑카는 이번에도 불꽃을 쏘아 맞대응했고, 두 주문이 맞붙었다.
얼핏 보면 전과 똑같은 상황.
퍼어어엉!
허나, 리치의 주문을 완전히 상쇄해 버린 불꽃이, 그 결과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고작 3위계일 터인 마법사가 쏘아낸 중급 주문이, 5위계의 마법사가 쏘아낸 상급 주문과 호각을 이룬 기막힌 상황에, 리치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제야 리치는, 블랑카의 몸 주변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마력의 흐름을 깨달았다.
『몸이 조금 강해지는 마법』과 『가벼운 상처를 치유하는 마법』에 들어간 블랑카의 마력이, 주변에 존재하는 다른 마력과 접촉하는 순간 빛을 내더니, 이내 주문의 효과가 늘어났다.
마력 특성, 『반딧불』
블랑카 자신의 마력과 주변 환경에 존재하는 다른 마력을 반응시켜, 효력을 증폭시킨다.
주변에 마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반응은 더욱 격렬해지고 주문들은 본래 정해진 것 이상의 효과를 발휘한다.
…전투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주변에 마력을 퍼트릴 수밖에 없는 마법사에게는, 그중에서도 특히, ‘마력 그 자체를 안개로 바꿔 주변에 흩뿌린다’라는 리치 모르티우스에게는 천적에 가까운 고유 성질.
그 위험성을 깨달은 모르티우스는 어떻게든 재빨리 블랑카를 끝장내려 했지만, 강화가 시작되기 전에도 불가능했던 일이, 이제 와서 가능할 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모르티우스가 블랑카를 죽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 쓸수록, 그 마력을 받아먹고 블랑카의 스펙이 더욱 증가했다.
모르티우스 역시 그 악순환을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법사인 그가 주문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대체 뭘 하란 말인가?
그나마 방법이 있다면 마력을 체내에 붙들어 둔 채 활용하는 전사 계열이 나서는 것인데, 그의 수하 중 쓸만한 전사들은 이미 베른의 손에 의해 박살 난 지 오래였다.
이윽고 블랑카의 중급 주문은커녕 하급 주문조차 막아내기 급급한 상황이 되자, 모르티우스는 안개 속에 몸을 감춘 채 도주를 시도했다.
당연하지만, 블랑카가 그걸 그냥 두고만 볼 리가 없었다.
콰아아아아앙!
처음에는 어린아이의 몸집만 했던 화염 덩어리가, 모르티우스의 안개와 반응하더니 마차 급으로 거대해져 작렬했다.
모르티우스는 어떻게든 방벽을 소환해 공격을 막아내려 했지만, 거대한 화염은 그 방벽과 함께 그를 날려버렸다.
새까맣게 타버린 그의 몸이, 어디에선가 날아온 심장 형태의 오브제 중심으로 다시 재구성되었다.
블랑카는 말없이 재차 불을 쏘아냈고, 모르티우스는 부활한 직후 또다시 숯덩이가 되었다.
한 번 더 부활한 모르티우스가 다급하게 외쳤다.
“멈춰라, 당장 멈춰!! 지금 이 심장은 네 어머니의 것이다! 그 여자의 생명과 영혼이 심장에 들어가 있단 말이다! 그걸 네 손으로 부술 생각이냐?!”
우뚝.
블랑카의 동작이 멈추었다.
그것을 기회라 여긴 모르티우스는, 필사적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계집, 내 제자, 아니 협력자가 되어라! 그렇다면 네 어머니에게 그럴듯한 몸을 만들어 부활시켜 주겠다! 6위계에만 오른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야! 허나, 여기서 내가 쓰러진다면 네 어머니와 재회할 방법은 영영 사라진다! 정말 그걸로 좋으냐!?”
길드 소속의 제자 여럿을 데리고 있던 모르티우스였다.
길드의 유명인인 블랑카에 대해서도 당연히 알고 있었고, 그녀가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모험가가 되었다는 것 역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 계집이, 어머니와의 재회라는 미끼를 물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일단은 달콤한 말로 싸움을 멈추게 하고, 그 뒤에는 정면 승부 이외의 방법으로 처리하면 될 터.
이거야말로 최선의 계책이라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과부터 말한다면.
“─나는, 어머니를 ‘해방’하기 위해 싸운 거예요. 그딴 감언이설에 흔들리는 모습을, 내가 두 명에게 보여줄 것 같아요?”
그녀가 말하는 ‘두 명’이 누구인지, 모르티우스는 알지 못했다.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어느새인가 그의 가슴을 꿰뚫은 검이, 그에게서 심장을 도려냈기 때문이다.
리치에게 있어서, 심장이란 현세에 남아 있기 위한 ‘쐐기’와 같은 존재.
그를 이승에 붙들어 둔 마지막 심장이 강제로 분리당하자, 모르티우스의 영혼이 지상을 떠나 저승으로 향했다.
아니, 향해야 했다.
[─광대 짓 수고하셨습니다! 삼류라기엔 능력이 좋고, 일류라기엔 그릇이 작으니, 딱 이류급 무대였네.]
요염하면서도 경쾌한, 성숙한 여인 같으면서도 풋풋한 소녀 같은, 그런 모순을 품은 목소리.
죽음을 초월한 마법사조차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누군가가, 모르티우스의 영혼을 붙잡았다.
[마법사 아가씨의 몫은 육체에 있는 생명과 정기. 내 몫은 영혼 그 자체. 잘난 황태자님의 잔소리 때문에 죄 없는 인간의 혼은 못 먹는 게 흠이긴 한데, 당신하고는 상관없는 일이겠네. 그렇지?]
모르티우스는 비명을 내지르려 했다.
허나, 영혼만이 남은 그에게 그런 사치는 허용되지 않았다.
수많은 이들의 영혼과 생명을 농락해 왔던 사악한 리치는, 마지막 순간 무력한 영혼이 되어서야 그 죄를 이해했다.
여자의 홍옥처럼 빛나는 입술. 그 안쪽으로 펼쳐지는 무저갱 같은 어둠은─
[─그러면 잘 먹겠습니다.]
꿀꺽.
***
모든 것이 끝난 후.
블랑카는 베른이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리치의 사악한 주문에 당한 붉은 머리의 모험가는, 그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있었다.
한때 어머니의 것이었던 심장을 안고, 사랑했던 남자의 흔적을 쫓으며, 소녀는 미뤄두었던 울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