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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는 영감이 턱에 손을 얹고, 깊은 고민에 빠진 채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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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린을 흡수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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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목소리에는 감탄과 의심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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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없을 것 같다. 광철이 놈이 만든 검사에서도 문제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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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감에게 내가 편린을 흡수한 과정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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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해 7일간 머물렀다는 사실은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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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적당히 둘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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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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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또 알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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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머릿속에 한명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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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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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내가 편린을 흡수한 것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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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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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린, 강아린이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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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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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린?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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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박광철이 반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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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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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하겠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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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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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은 여전히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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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침묵이 이어졌고, 방 안은 적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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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천천히 눈을 뜬 영감이,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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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차피, 네가 세상에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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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목소리에는 체념과 결단이 뒤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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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받아들여야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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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한 영감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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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한 발걸음으로 문을 열고, 나를 힐끗 돌아보며 한마디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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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히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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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용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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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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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딸, 그러니까 시온의 어머니를 마인에게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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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빛나는 재능을 가진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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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인들은 그녀의 성장을 두려워했고, 결국 그녀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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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영감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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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와 시온을 훈련시키고 성장시키면서도, 그 어떤 곳에도 우리를 노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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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온에 입학하는 것조차, 처음에는 완강히 반대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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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신념을 꺾고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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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닫히고도 한동안 방 안에는 적막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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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입을 연 것은 박광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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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온으로 돌아갈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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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짧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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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러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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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대답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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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뜬금없이 말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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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곧 중간고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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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밍을 생각해보면, 아마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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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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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박광철이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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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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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웃음에는 어딘가 묘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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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온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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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해인, 아라 언니한테 얘기 들었어. 뭔 일 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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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 문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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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에 진동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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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온의 메시지를 확인하며 짧게 답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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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동시에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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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방 안에 들어선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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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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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을 등정 했던 당일, 나는 협회에서 동백검을 받아 내 방바닥에 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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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동백검은 지금 거실 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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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에서 뻗어 나온 붉은 덩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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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실내 곳곳을 뒤덮으며, 방을 완벽한 정글로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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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들은 덩굴에 휘감겨 형태를 알아볼 수 없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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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에는 엉킨 가지들이 얽혀, 마치 수목원 천장처럼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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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숨을 내쉬며, 옆에 걸어둔 창을 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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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언제 다 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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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앞을 막아선 덩굴을 베어내며, 거실 중심부로 접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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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 방의 한가운데 박혀있는 동백검은, 기분이 좋은 듯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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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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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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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힌 검을 검집째로 뽑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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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과 연결된 뿌리들이 하나둘 끊어지자, 마치 수명을 다한 것처럼 매달려 있던 덩굴들이 시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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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갖다줘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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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합한 주인을 찾으면 이럴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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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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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나랑은 아침 뜀걸음뿐만 아니라 파트너 트레이닝도 함께 하기로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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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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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바로 만나기는 늦었으니, 내일 약속이라도 잡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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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워치를 열고, 짧게 메시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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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 하나야, 혹시 내일 파트너 가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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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답변이 오기 전까지 워치를 닫고 시든 줄기들을 주우려 하던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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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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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초도 지나지 않아 메시지가 즉시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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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나]: 파트너?? 무슨 파트너?? 일단 나는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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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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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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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 저번에 말했던 파트너 트레이닝, 건네줄 것도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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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나]: 아… 기억났어. 그럼 내일 저녁 6시에 B동 훈련장에서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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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짧게 좋아. 라고 답하며 워치를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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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동 훈련장은 기숙사에서 가장 가까운 훈련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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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걸 어떻게 건네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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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검은 모로 봐도 보통의 물건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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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성격상 준다고 해서 덥썩 받을 것 같지는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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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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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쓸모없는 고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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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그냥 손에 강제로 쥐여주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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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검을 천장 전등에 대롱대롱 매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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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 적어도 다시 뿌리를 내릴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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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1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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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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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너무 바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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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정확히 9시 00분에 맞춘 등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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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소처럼 뒷문을 열고 지정석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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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곳에는 천여울이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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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별말 없이 그녀의 옆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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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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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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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천여울은 아무런 대답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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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몸 하나하나를 유심히 뜯어보는 듯한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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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내, 그녀의 얼굴에 환희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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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수업 뭐 별거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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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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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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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몇 초간 날 바라보던 그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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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정신을 차린 듯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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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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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여전히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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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라면 활기차게 말을 걸었을 그녀가, 지금은 딱 달라붙어 다소 조신하게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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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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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름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천여울은 여전히 시선을 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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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이 꼼지락거리고,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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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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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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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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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달라 보여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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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이 몰래 내 얼굴을 힐끗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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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다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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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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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성녀 후보인 그녀 또한 내 변화를 본능적으로 눈치챈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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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편린의 기운과 신성력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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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천여울이 더 묻기 전에, 강의실의 앞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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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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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교관인 도한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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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차분한 표정으로 걸어 들어와, 단상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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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출석부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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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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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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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녀는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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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한성은 별다른 말 없이 출석을 마친 후, 곧장 수업을 시작했다. 별것 없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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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무기에 대한 심층적인 이론 수업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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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 자체는 필요했지만, 실전 감각이 중요한 무기 전투의 커리큘럼을 생각하면, 딱히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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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며 시간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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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강의실의 공기가 느슨해지고, 집중력이 점차 흐려질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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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한성은 학생들을 향해 시선을 돌린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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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다음 주부터는 중간고사 기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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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이 술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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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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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온의 첫 중간고사는 굉장히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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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성적 평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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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의 시험은 곧, 가치 평가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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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 사이에서는 ‘입찰전’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평가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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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처럼 중간고사 성적이 단순한 점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길드, 단체, 혹은 개별 팀들이 시험을 참관해 학생들을 평가하고 ‘입찰’하는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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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단체는 자신이 원하는 학생을 선점하기 위해 금액을 걸어 입찰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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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찰 된 학생들은 해당 단체와 자동적인 커넥션이 형성되며, 이후 길드 인턴, 혹은 특별 프로그램을 통해 직접 실무 경험을 쌓을 기회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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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입찰가는 자연스레 가온의 랭킹에도 반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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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자본주의적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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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단 한 번의 기회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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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들에 더 높은 입찰가를 받기 위해, 자신을 최대한 어필해야 하는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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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학생 경매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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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잘 아시다시피 이번 중간고사 역시, 가치 평가전으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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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한성은 말을 마치며, 뒤를 돌아 칠판에 메모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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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번 평가전에 참여하는 메이저 단체들의 목록을 전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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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단체는 학생들의 목표이다. 메이저가 아닌 단체들도 많이 참여하지만, 학생들의 목표는 기본적으로 메이저 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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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의 모든 이목이 쏠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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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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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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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위 길드이자, 가장 강한 집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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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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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시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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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리 다음으로 세계 2위를 차지하는 길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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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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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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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디아 교단이 참여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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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치유 전문 지원가를 선발하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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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에도 몇몇 메이저 단체들의 이름이 칠판에 적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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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목록이 마무리되는 듯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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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한성 교관은 마지막으로 한 단체의 이름을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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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퀴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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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교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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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퀴셔가?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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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걸 참여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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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성시우는 벌떡 일어나며 칠판을 노려보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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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성거리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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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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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퀴셔는 팀원을 뽑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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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가치 평가전에도 참여하지 않는 편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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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번에는 메이저 단체로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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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학생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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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퀴셔가 직접 평가전에 참여한다는 것은, 반드시 한명은 데려가겠다는 뜻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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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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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길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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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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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퀴셔는 애초에 원작에서 평가전에 참여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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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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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곧 중간고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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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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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철이 나를 향해 던졌던 의미심장한 말과 그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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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마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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