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py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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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榮光) 그룹의 산하.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를 통틀어도 1위인 길드.
맹주(盟主).
그 본부의 최상층, 길드 마스터의 집무실.
방의 주인이어야 할 길드 마스터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있지 않았다.
그는 방 한쪽에 서서, 자신의 거대한 책상에 앉아 있는 한 소녀 그의 조카인 강아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온 아카데미 1학년 수석, 그리고 영광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
길드 마스터인 강윤혁은, 그런 강아린의 모습을 보고 감격에 겨울 수밖에 없었다.
제 오빠가 죽었어도, 강아린은 꺾이지 않고 결국 이렇게 다시 올라섰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그녀에게서는 이미 영광 그룹의 차기 총수이자 맹주의 차기 길드장 다운 위엄과 냉철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기뻐할 만한 이야기를 하나 가져왔다.
“아린아.”
“네. 삼촌.”
“펜타곤에서, 편린에 대한 연구를 잠정적으로 중단했다더구나.”
그 말에, 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강아린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요?”
“그래. 통제가 불가능한 변수를 발견해서, 모든 데이터를 재검토하기로 했다.”
싱글벙글하며, 강아린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럼 이제 본인에게도 차례가 온 것이 아닐까?
요즘 대외적으로는 펜타곤의 편린 문제, 대내적으로는 가업 인계 등, 그녀는 너무나도 바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미리 전부 해둬야, 나중에 차질이 없는 것들이었기에 그녀는 게을리할 수 없었다.
그런 강아린에게 펜타곤의 연구 중단 소식은, 둘도 없는 희소식이었다.
“일정 잡아야지~”
그녀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속삭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때 비서가 인터폰을 통해 이야기했다.
“길드장님, 부길드장님, 프론트라인이 도착했습니다.”
프론트라인.
강아린이 최근 바쁠 수밖에 없었던 대외적 행동 중 하나.
그녀는 방금 전의 기쁜 표정을 순식간에 지우고, 다리를 꼬며 냉철한 후계자의 얼굴로 돌아왔다.
- 스윽.
그때, 집무실의 묵직한 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인원들이 들어섰다.
일반적인 사복이었지만, 그들의 눈빛과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색은, 그들이 결코 일반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선두에 선 여자.
칠흑 같은 날카로운 단발, 그러나 그와 반대로 고요하고 부드러운 눈매를 가진 여자.
前 로터스 길드 1팀장, 유세린이었다.
그러나 기말고사에서 유세린과 직접 합을 겨루었던 강아린은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부드러워 보이는 그녀의 저 눈매가, 전투에 들어서는 순간 얼마나 맹수같이 변하는지.
강아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유세린과 시선을 맞췄다.
“로터스에서 나온 건, 탁월한 선택이었어요.”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런가요?”
유세린은 흐트러짐 없는 미소로 답했다.
“당연하죠.”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유세린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맹주로 온 것은… 그것보다 더, 탁월한 선택이에요.”
그녀는 유세린의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강아린의 붉은 눈동자가 유세린의 검은 눈동자를 꿰뚫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홀로그램 패널을 켜 맹주의 조직도를 띄웠다.
“아시다시피 저희 맹주에는 두 개의 핵심 팀이 있습니다. 선봉 글로리와. 2팀 맹호. 둘 다 맹주의 창립부터 함께한, 실력과 자부심이 대단한 팀들입니다.”
그녀는 유세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들의 실력을 생각하면… 뭐, 넘볼 수야 있겠지만 기존 팀원들의 반발과 조직의 위계 상, 지금 당장 그들을 앞지르기하는 것은 애매한 문제입니다.”
강아린의 설명은 합리적이었다.
제 아무리 타 길드의 핵심 전력이라 한들, 갑자기 굴러 들어온 돌이 기존의 박힌 돌들을 밀어내는 모양새는 좋지 않았다.
유세린과 프론트라인도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프론트라인에게 ‘3’ 이라는 번호를 붙이는 건, 또 예의가 아니고요.”
유세린은 조용히 강아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강아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패널 위로 새로운 조직도를 생성했다.
“그래서 새로운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조직도의 최상단 1팀 글로리의 바로 옆에 새로운 팀의 이름이 나타났다.
“기존의 1, 2팀 체계와는 완전히 분리된 별동대. 0팀이라고 해야 할까요. 팀, 제로… 다시 말해.”
유세린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이것은 파격적인 제안이다.
길드 내의 정치나 행정에 얽매이지 않는 직속 부대.
길드의 중추에 두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으니까.
“팬텀.”
강아린이 말했다.
“팬텀입니다.”
유세린의 차가웠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좋아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새로운 주군에게 예를 표했다.
“잘 부탁드려요. 부길드장님.”
강아린의 얼굴에도, 마침내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유세린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환영합니다, 유세린 팀장님. 그리고 프론트라인.”
두 여왕의 손이, 그렇게 마주 잡혔다.
그리고, 같은 시각.
로터스의 길드 본부.
- 콰자자창!
로터스의 길드장. 이도겸의 짐무실.
그가 내던진 재떨이가 비싼 홀로그램 패널을 작살냈다.
“이 개 같은 년이…!”
그의 앞 깨진 홀로그램에서는 뉴스 기사가 하나 떠올라 있었다.
[속보: 前 로터스 길드 1팀 프론트라인, 금일부로 맹주 길드 이적 완료.]
“유세린!!!”
그냥 얌전히, 쥐 죽은 듯이 있었다면, 죽이지는 않았을 터였다.
유세린의 야망이자 목적은 결국 로터스의 정상에 서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이도겸은 그녀가 결코 이 길드를 떠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유세린은 계약 종료를 명분으로, FA 신분을 주장하며 길드에서 나가버렸다.
그것도 제 팀원, 프론트라인 전부를 데리고.
이도겸의 분노에 찬 포효가 빌딩 전체를 울렸다.
길드의 상징과도 같았던 유세린과 프론트라인.
그들이, 가장 강력한 경쟁 길드인 맹주로 넘어갔다.
- 쾅!
그때, 집무실 문이 다급하게 열렸다.
“길드장님…! 기사와 동시에 주가가 폭락하고 있습니다!”
비서가 거의 울상이 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그의 손에 들린 태블릿에는 수직으로 곤두박질치는 로터스 그룹의 주가 그래프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
이미 프론트라인이 나간 뒤 연일 폭락한 주가다.
바닥 밑에 지하실 있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나가! 당장 꺼져!”
이도겸은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연꽃이 시드는 건.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맹주로 갔구나.”
나는 펜트하우스의 푹신한 침대에 누워, 벽면 전체를 차지하는 거대한 홀로그램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펜트하우스에는 TV도 있다.
워치로 고개 숙여 보지 않아도 되니 이렇게 편할 수가.
화면 속에는 긴급한 뉴스를 알리는 요란한 자막과 함께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로터스의 1팀 프론트라인이 라이벌 길드인 맹주로의 전격 이적을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라 로터스 그룹의 주가는…]
꼴이 좋다.
“보기 좋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이로써 로터스는 사실상 호흡기를 떼어버렸다.
길드의 상징이자 가장 강한 칼이었던 프론트 라인의 이탈은.
단순한 전력 손실로 치부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물론, 로터스의 길드 마스터인 이도겸은 보통 미친놈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부터 예의 주시해야 한다.
혹여나… 모든 것을 잃었다는 생각에 배수의 진을 칠 수도 있다.
마인이랑 손을 잡고 길드 자체를 홀랑 넘겨버릴 가능성마저도… 부정할 수가 없다는 게 정말 무서운 포인트.
- 띠링.
그때 워치에 메세지가 도착했다.
천여울이겠거니 싶어 워치를 열었다.
그러나 메세지의 대상은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SERIN]: 해인 씨! 뭐해요?
세린.
유세린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belief_: 연락처는 어떻게 아셨어요?
[SERIN]: 부길드장님한테 뜯어냈지요~
강아린이 줬을 것 같지 않은데.
belief_: 아닐 것 같은데
[SERIN]: 사실 해킹해써요..
입사하자마자 한 짓이 해킹이라니.
잘하는 짓이다.
[SERIN]: 아무튼, 지금 나올 수 있어요?
그러자 전화가 걸려 왔다.
- 어휴, 메세지로 하니까 눈 아푸당.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한 취기가 깃들어있었다.
- 무아관, 알죠? 여기로 와요! 지금 당장!
무아관.
가온의 전경이 전부 내려다보이는, 본관 옥상의 작은 전망대다.
가온의 학생들에게는 야경 명소이자 유명한 장소.
- 뚝.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가온 내부는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다.
물론 유세린은 제외다.
그녀는 암행의 달인이니까.
나는 짧게 혀를 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공기를 가르며 약속 장소인 무아관으로 향했다.
시원한 밤바람과 함께 탁 트인 가온의 야경이 나를 맞았다.
그곳의 벤치에, 한 여자가 앉아 있다.
칠흑 같은 단발, 몸에 달라붙는 깔끔한 와이셔츠.
유세린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맥주가 한 캔 들려있었다.
문제는 그녀 옆에 이미 서너 캔 정도가 찌그러져 있다는 것.
그에 알맞게 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녀는 나를 발견하고는 헤실거리며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왔어요? 히히. 앉아봐요!”
방금 통화할 때보다 더 혀가 꼬인 목소리.
그새 취했나.
나는 그녀의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유세린에게서 알코올 냄새와 그녀 특유의 향기가 섞여 풍겨왔다.
“예쁘다. 그쵸?”
유세린은 야경을 보며 말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와 함께 도시의 불빛을 바라봤다.
몇 분이 흘렀을까.
그녀는 내게 몸을 기울이며, 하소연하듯 말했다.
“있잖아요? 내가… 평생을 로터스에만 몸담고 있었어요. 내 청춘, 내 시간, 전부 로터스를 위해서만 썼는데…”
그녀는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근데 막상 나와서… 맹주로 오니까, 기분이 진짜… 요상? 하다고 해야 하나…. 내가 지키려고 했던 게 대체 뭐였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
“그래도 후회는 안 해요. 그놈 밑에 더 있었으면, 내가 먼저 죽여버렸을지도 모르니까. 근데, 그래도… 그래도 좀….”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유세린은 잠시 어깨를 들썩이다가, 이내 고개를 들어 젖은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해인 씨가 책임, 질 거죠?”
“… 제가요?”
“흐히히 농담.”
그녀는 뭔가 마음이 풀린 듯, 어색하게 웃으며 팔을 쭉 펼쳐 기지개를 켰다.
억지로 괜찮은 척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냥, 말할 사람이 필요했어요…. 해인 씨는 제게 길을 알려줬을 뿐이고, 선택해서 걸어 나온 건 나니까. 책임지라는 말 같은 건 안 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스스로를 다잡으려는 듯이 보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언제든지 부르세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살짝 웃었다.
운명을 벗어난 유세린에게 해줄 말과, 말을 들어줄 시간 정도는 충분히 있었으니까.
내 말에,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한번 환하게 웃었다.
“그럴게요!”
이번에는 좀 전의 웃음과는 다른, 진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