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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의 죽음은 처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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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은 더더욱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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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천여울은 이미 수 차례 그와 함께 죽고, 살아나고, 다시 죽는 과정을 겪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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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할수록, 뼈저리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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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은, 자신의 동료가 눈앞에서 쓰러지는 모습을 결코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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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내던져서라도, 차라리 본인이 죽을거면 죽을지언정, 절대로 동료의 죽음을 용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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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물에 젖은 전장 한가운데서, 정해인이 자신의 목에 부러진 칼을 억지로 밀어내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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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눈앞이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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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단 한 번도 정해인은 다른 이들에게 희생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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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본인이 가장 먼저 뛰어들었고, 그마저도 안 되면 끝까지 버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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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일을 도모할 수 있더라도, 그는 언제나 절대 동료들이 죽지 않는 방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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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고, 시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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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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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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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천여울이 눈을 뜬 것 또한 바로 그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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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은 창을 들어, 자신의 목에 겨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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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라면, 누군가가 또 다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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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처럼, 그는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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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그 팔을 단호하게 막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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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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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시간이 멈춘 듯,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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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그녀에게 편린이 내리는 시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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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전장이 한순간 희뿌옇게 물들고, 내면의 목소리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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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망의 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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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망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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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천여울에게 갈망은 아마, ‘명예를 얻는 것.’ 혹은 ‘교단을 차지하는 것.’ 손에 잡히지 않는 허상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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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적인, 그리고 어쩌면 텅 비고 단순한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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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편린은, 그런 공허한 목표조차 응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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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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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천여울에게 갈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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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확고하고, 또 강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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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을 살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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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를 도와 악신을 죽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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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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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온전히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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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그를 원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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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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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실체가 부끄러울 정도로, 적나라하게, 전신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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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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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지금의 그녀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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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인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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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갈망이 커질수록, 편린은 더욱 거세게 반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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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망의 편린은 결국, 그녀가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았을 때 비로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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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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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순백의 파동에 휩싸이며, 눈 앞에 펼쳐진 과거의 환상들이 한 겹, 한 겹 벗겨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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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환영들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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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공간의 가운데에 백색으로 빛나는 작은 돌덩이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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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떨어진 한 점의 별처럼, 눈부시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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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그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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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주저함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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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웃으며, 그 돌을 향해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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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에 힘을 주어, 강하게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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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는 순간, 순백의 마나가 파도처럼 몸 안으로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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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이 환하게 타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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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몸을, 백색의 기운이 감싸며 이내 신성한 예복이 입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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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능: 갈망의 편린(片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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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성화(聖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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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마를 불태우는, 신성한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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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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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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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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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순백의 새 한 마리가 조용히 날개를 퍼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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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라운 깃털, 투명하게 빛나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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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새는 마치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듯, 머리를 그녀의 손끝에 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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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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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새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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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가볍게 새의 볼에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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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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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새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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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니는 조용히 울음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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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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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단 하나뿐인, 순백의 성조(聖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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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금 그녀의 곁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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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모든 환상과 잔향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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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뜰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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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가니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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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조용히 울음을 토하고, 깃털을 파르르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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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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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그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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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영 좋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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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곧 편린을 손에 넣게 될 예정이니 기뻐해야 할 순간인 것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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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머릿속 어딘가엔 먹구름이 가득 깔린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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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변수가 생겼다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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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위안이 되는 점은… 아직 악신이 활약하기는 쉽지 않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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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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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커스를 사살함으로 인해 그 시기는 더욱 늦춰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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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정말 조금만 계획을 앞당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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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이 정도에서 알게 된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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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윽스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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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멍하니, 잠든 천여울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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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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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짹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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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안을 가로지르는 맑은 새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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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고개를 들자, 창밖 사이로 순백의 새가 살포시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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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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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천여울이 조용히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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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 내 손끝을 바라보더니, 조용히 내 손바닥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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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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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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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이 천천히 눈을 뜨더니, 내 손등에 가만히 입술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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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고, 부드러운 입맞춤이 손등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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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막 깨어난 듯한 눈으로, 천여울이 조용히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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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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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이 내려오자, 그녀가 짧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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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짹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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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순백의 새가 내 어깨에 가만히 내려앉아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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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번에 눈치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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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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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편린을 습득하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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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짧게 웃으며, 어깨 위의 순백의 새를 두 손으로 감싸 마구 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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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실몽실한 깃털이 손끝을 간지럽힌다. 새는 갑작스런 터치에 당황한 듯 몸을 바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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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짹? 짹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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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날개를 허둥지둥 퍼덕이며, 내 손 안에서 뱅뱅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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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이라고 해봐야, 그저 털이 내 손을 간지럽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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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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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드럽게 새의 등허리를 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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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가득 차오르는, 말랑하고 따스한 감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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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에서는 새의 크기로, 천여울이 얼마나 확실히 편린을 습득했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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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의 몸집을 살짝 눌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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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 가득 차오르는, 너무나 통통한 감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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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편린의 힘을 완벽하게 받아들였다는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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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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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심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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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했어. 여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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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세 미소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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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천여울 역시 마(魔)에 대적할 자격을 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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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첫번째 확장 권능은… 성화(聖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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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불꽃이 그녀의 아이덴티티이며, 동시에 에리엘의 아이덴티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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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니, 인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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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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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쪽을 보며 한 번 더 조용히 짹ㅡ 하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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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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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이름도 지어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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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천여울은 머쓱한 듯 볼을 붉히더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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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친해진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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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귀엽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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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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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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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해. 확실히, 뭔가 얻은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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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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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천여울은 아주 짧게, 그러나 깊은 감정이 묻어난 미소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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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너는 나한테 좋은 일만 하니까. 나는, 항상… 믿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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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신뢰는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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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줘서 고마운 마음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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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음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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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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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바깥으로 나오니, 공원은 여전히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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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의 어깨에 내려앉은 새의 깃털이 달빛에 반사되어 더욱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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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말 없이 걸었고, 다시 숙소 복도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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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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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의 두터운 돌벽이 밤공기를 차갑게 머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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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의 복도에 들어서자, 끝에 조용히 서 있던 수녀가 우리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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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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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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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가 조용히 고개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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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 준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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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이 수녀에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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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의 표정이 곧 확신에 찬 미소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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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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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의 발걸음이 복도를 따라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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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이 내 쪽을 돌아보며, 눈빛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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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탕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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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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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욕탕에서 나와, 곧장 거울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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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타월로 대충 훑어 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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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가 자신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물의 적절한 온도와 마나가 담긴 물이 온 몸의 피로를 지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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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옷을 입었다. 목욕 가운만 두를까 하다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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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드러나는 크롭티, 그리고 몸에 착 감기는 돌핀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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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는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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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괜히 쿵쾅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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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들어서자, 정해인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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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동으로 미소가 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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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또한, 긴장한듯 살짝 표정이 굳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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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본 순간, 둘 다 동시에 멈칫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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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은 무심하게 보이려 애쓰는 표정이지만, 시선이 어딘가 불안하게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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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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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늘은… 너무 아쉽고, 미칠듯이 아깝지만 때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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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린이 보여준 시련으로 다시금 깨달은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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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쌓아온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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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억제력이 찾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에, 욕망만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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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시온 말마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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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이 많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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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겁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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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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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은 천여울의 복장에 당황한 듯 시선을 이리저리 흩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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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마주칠 때마다, 금세 다시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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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조심스럽게 침대 끝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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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트를 만지작거리며, 슬며시 그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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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야경이 커튼 너머로 은은하게 방 안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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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정적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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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정해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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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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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긴장한 그의 표정이 그녀의 음심을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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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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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여울은 몸을 빠르게 일으켜 그의 입술을 막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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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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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깊은 입맞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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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끝이 스치다, 이내 그의 아랫입술을 앞니로 살짝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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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천여울의 시선이 그를 옭아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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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아래, 미묘하게 젖은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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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장난기와 애정이 뒤섞인 빛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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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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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느리게 웃으며, 손끝으로 그의 뺨선을 따라 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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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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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속삭임에, 손길이 그의 목덜미까지 미끄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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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안 잡아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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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입술 끝을 살짝 올리며 한 번 더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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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다음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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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눈동자에 어딘가 위태로운 빛이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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