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py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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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의 죽음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더더욱 아니었다.
벌써 천여울은 이미 수 차례 그와 함께 죽고, 살아나고, 다시 죽는 과정을 겪어왔다.
반복할수록, 뼈저리게 깨달았다.
정해인은, 자신의 동료가 눈앞에서 쓰러지는 모습을 결코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차라리 본인이 죽을거면 죽을지언정, 절대로 동료의 죽음을 용납하지 않는다.
핏물에 젖은 전장 한가운데서, 정해인이 자신의 목에 부러진 칼을 억지로 밀어내던 순간.
이따금, 눈앞이 번쩍였다.
돌이켜보면, 단 한 번도 정해인은 다른 이들에게 희생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본인이 가장 먼저 뛰어들었고, 그마저도 안 되면 끝까지 버텨냈다.
큰 일을 도모할 수 있더라도, 그는 언제나 절대 동료들이 죽지 않는 방향으로 향했다.
“하나하고, 시온은?”
“저기, 멀리.”
“됐다. 그럼.”
그리고, 천여울이 눈을 뜬 것 또한 바로 그 시점이었다.
정해인은 창을 들어, 자신의 목에 겨눴다.
이대로라면, 누군가가 또 다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언제나처럼, 그는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려 했다.
천여울은 그 팔을 단호하게 막아섰다.
“이제는, 안 돼.”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다.
이게, 그녀에게 편린이 내리는 시련이었다.
눈앞의 전장이 한순간 희뿌옇게 물들고, 내면의 목소리만이 남는다.
갈망의 편린.
‘갈망이란 무엇인가.’
예전의 천여울에게 갈망은 아마, ‘명예를 얻는 것.’ 혹은 ‘교단을 차지하는 것.’ 손에 잡히지 않는 허상에 가까웠다.
세속적인, 그리고 어쩌면 텅 비고 단순한 목표.
하지만 편린은, 그런 공허한 목표조차 응답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다르다.
지금의 천여울에게 갈망은.
너무나도 확고하고, 또 강인하다.
‘정해인을 살리고 싶다.’
‘또. 그를 도와 악신을 죽이고 싶다.’
그리고….
‘그를, 온전히 원한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그를 원하는 마음.
갈망.
욕망의 실체가 부끄러울 정도로, 적나라하게, 전신을 적신다.
내가, 그를 원한다.
그게, 지금의 그녀를 만들었다.
그걸 인정하고.
그리고 그 갈망이 커질수록, 편린은 더욱 거세게 반응할 것이다.
갈망의 편린은 결국, 그녀가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았을 때 비로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때.
온 세상이 순백의 파동에 휩싸이며, 눈 앞에 펼쳐진 과거의 환상들이 한 겹, 한 겹 벗겨지기 시작했다.
모든 환영들이 사라진다.
마침내, 공간의 가운데에 백색으로 빛나는 작은 돌덩이가 떠오른다.
하늘에서 떨어진 한 점의 별처럼, 눈부시게 빛난다.
천여울은 그 앞에 섰다.
그 어떤 주저함도 없다.
그녀는 웃으며, 그 돌을 향해 손을 뻗었다.
왼손에 힘을 주어, 강하게 쥐었다.
눈을 감는 순간, 순백의 마나가 파도처럼 몸 안으로 스며든다.
온몸이 환하게 타오른다.
그녀의 몸을, 백색의 기운이 감싸며 이내 신성한 예복이 입혀졌다.
====
[권능: 갈망의 편린(片鱗)]
① 성화(聖火)
ㅡ 마를 불태우는, 신성한 불꽃.
② ???
③ ???
====
- 짹.
어느새,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순백의 새 한 마리가 조용히 날개를 퍼덕였다.
보드라운 깃털, 투명하게 빛나는 눈.
그 새는 마치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듯, 머리를 그녀의 손끝에 비볐다.
“가니.”
그것이, 새의 이름.
그녀는 가볍게 새의 볼에 입을 맞췄다.
“보고 싶었어.”
순간, 새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가니는 조용히 울음소리를 냈다.
- 짹.
세상에 단 하나뿐인, 순백의 성조(聖雕)가.
이제, 다시금 그녀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 순간, 모든 환상과 잔향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눈을, 뜰 시간이었다.
천여울은 가니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새가 조용히 울음을 토하고, 깃털을 파르르 떤다.
나가자.
바깥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그를 향해.
속이, 영 좋지는 않다.
분명 곧 편린을 손에 넣게 될 예정이니 기뻐해야 할 순간인 것은 맞다.
하지만 머릿속 어딘가엔 먹구름이 가득 깔린 느낌.
뭔가 변수가 생겼다 볼 수 있겠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점은… 아직 악신이 활약하기는 쉽지 않다는 점.
사도들 역시 마찬가지다.
바르커스를 사살함으로 인해 그 시기는 더욱 늦춰졌을 것이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 계획을 앞당기면 된다.
오히려, 이 정도에서 알게 된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 스윽스윽.
나는 멍하니, 잠든 천여울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그때.
- 짹짹.
박물관 안을 가로지르는 맑은 새소리.
잠시 고개를 들자, 창밖 사이로 순백의 새가 살포시 내려앉는다.
“어?”
그 순간, 천여울이 조용히 눈을 떴다.
시선이 내 손끝을 바라보더니, 조용히 내 손바닥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
- 쪽.
천여울이 천천히 눈을 뜨더니, 내 손등에 가만히 입술을 맞췄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맞춤이 손등에 닿았다.
잠에서 막 깨어난 듯한 눈으로, 천여울이 조용히 속삭였다.
“좋은 아침.”
내 손이 내려오자, 그녀가 짧게 웃었다.
- 짹짹.
어느새 순백의 새가 내 어깨에 가만히 내려앉아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단번에 눈치챘다.
‘해냈구나.’
천여울은, 편린을 습득하는데 성공했다.
나는 짧게 웃으며, 어깨 위의 순백의 새를 두 손으로 감싸 마구 만졌다.
몽실몽실한 깃털이 손끝을 간지럽힌다. 새는 갑작스런 터치에 당황한 듯 몸을 바둥거렸다.
- 짹? 짹짹?!
작은 날개를 허둥지둥 퍼덕이며, 내 손 안에서 뱅뱅 돈다.
저항이라고 해봐야, 그저 털이 내 손을 간지럽힐 뿐이다.
“가만히 있어봐.”
나는 부드럽게 새의 등허리를 쓸었다.
손바닥 가득 차오르는, 말랑하고 따스한 감촉.
원작에서는 새의 크기로, 천여울이 얼마나 확실히 편린을 습득했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나는 새의 몸집을 살짝 눌러보았다.
한 손에 가득 차오르는, 너무나 통통한 감촉.
이 정도면, 편린의 힘을 완벽하게 받아들였다는 증거였다.
좋은 신호다.
내심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잘했어. 여울아.”
나는 작세 미소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이제, 천여울 역시 마(魔)에 대적할 자격을 손에 넣었다.
아마, 첫번째 확장 권능은… 성화(聖火).
흰 불꽃이 그녀의 아이덴티티이며, 동시에 에리엘의 아이덴티티이기도 하다.
“가니, 인사해.”
천여울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새는 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쪽을 보며 한 번 더 조용히 짹ㅡ 하고 울었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이름도 지어줬어?”
내 말에, 천여울은 머쓱한 듯 볼을 붉히더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벌써 친해진 모양.
“응. 귀엽지 않아?”
“귀엽네.”
천여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해. 확실히, 뭔가 얻은 것 같네.”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에 천여울은 아주 짧게, 그러나 깊은 감정이 묻어난 미소로 답했다.
“늘… 너는 나한테 좋은 일만 하니까. 나는, 항상… 믿고 있었어.”
이걸로 신뢰는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믿어줘서 고마운 마음 뿐.
나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음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자.”
박물관 바깥으로 나오니, 공원은 여전히 고요했다.
천여울의 어깨에 내려앉은 새의 깃털이 달빛에 반사되어 더욱 빛났다.
우리는 말 없이 걸었고, 다시 숙소 복도에 들어섰다.
조용한 복도.
성당의 두터운 돌벽이 밤공기를 차갑게 머금고 있었다.
숙소의 복도에 들어서자, 끝에 조용히 서 있던 수녀가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
“수녀님.”
수녀가 조용히 고개를 든다.
“목욕, 준비해주세요.”
천여울이 수녀에게 속삭였다.
수녀의 표정이 곧 확신에 찬 미소로 변했다.
“물론입니다.”
수녀의 발걸음이 복도를 따라 사라진다.
천여울이 내 쪽을 돌아보며, 눈빛을 맞춘다.
“욕탕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시작이다.
천여울은 욕탕에서 나와, 곧장 거울 앞에 섰다.
머리를 타월로 대충 훑어 말린다.
수녀가 자신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물의 적절한 온도와 마나가 담긴 물이 온 몸의 피로를 지워냈다.
그리고, 옷을 입었다. 목욕 가운만 두를까 하다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배가 드러나는 크롭티, 그리고 몸에 착 감기는 돌핀팬츠.
‘이 정도는 괜찮겠지.’
심장이 괜히 쿵쾅거린다.
방으로 들어서자, 정해인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자동으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 또한, 긴장한듯 살짝 표정이 굳어있다.
서로를 본 순간, 둘 다 동시에 멈칫한다.
정해인은 무심하게 보이려 애쓰는 표정이지만, 시선이 어딘가 불안하게 흔들린다.
천여울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하지만 오늘은… 너무 아쉽고, 미칠듯이 아깝지만 때는 아니었다.
편린이 보여준 시련으로 다시금 깨달은 게 있다.
그가 쌓아온 기회다.
어떻게 억제력이 찾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에, 욕망만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맞다, 시온 말마따나.
‘겁이 많아서.’
그녀는 겁이 많았다.
천여울은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정해인은 천여울의 복장에 당황한 듯 시선을 이리저리 흩뿌렸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금세 다시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귀엽다.
천여울은 조심스럽게 침대 끝에 앉았다.
시트를 만지작거리며, 슬며시 그를 바라봤다.
로마의 야경이 커튼 너머로 은은하게 방 안을 채웠다.
잠깐, 정적이 흐른다.
그리고, 정해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
잔뜩 긴장한 그의 표정이 그녀의 음심을 자극했다.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여울은 몸을 빠르게 일으켜 그의 입술을 막아버렸다.
- 쯉.
짧지만, 깊은 입맞춤.
혀끝이 스치다, 이내 그의 아랫입술을 앞니로 살짝 깨물었다.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천여울의 시선이 그를 옭아맸다.
달빛 아래, 미묘하게 젖은 숨결.
눈에 장난기와 애정이 뒤섞인 빛이 스쳤다.
“베에….”
그녀는 느리게 웃으며, 손끝으로 그의 뺨선을 따라 쓸었다.
“걱정하지마.”
부드러운 속삭임에, 손길이 그의 목덜미까지 미끄러졌다.
“오늘은… 안 잡아먹어.”
그러다 입술 끝을 살짝 올리며 한 번 더 속삭였다.
“대신… 다음은 없어.”
그녀의 눈동자에 어딘가 위태로운 빛이 일렁였다.